그의 생가터에서 “어허 둥둥 내 사랑...‘자진사랑가’를 듣고 싶다”

【기획취재】3대 읍성과 연계된 지역유형의 판소리문화와의 결합③

연암산 자락 아래 서산시 고북면 초록리 명창 고수관 생가터
연암산 자락 아래 서산시 고북면 초록리 명창 고수관 생가터
명창 고수관 생가터 이모저모
명창 고수관 생가터 이모저모

연암산(燕岩山) 아래에 새초풀이 파랗고 무성하게 자라서 새푸르기라 불렸던 곳. 지명의 한자 표기에 따라 초록리(草綠里)라 이름지어진 서산시 고북면 초록리. 이 아름다운 마을이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날린 판소리 명창 고수관(1764~1849)이 태어난 곳이다.

그런데 사실 조선 시대에는 홍주목 고북면 초록리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초록리는 조선 시대에 55가구에 175명이 사는 큰 마을로 기록되어 있다. 고수관이 살아 생전은 홍주목이었다.

1895(고종 32)의 행정 구역 개편에서 해미군 상도면 초록리가 되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초록리, 연화리(蓮花里), 가구전리(加口前里)의 각 일부 지역이 합해져 옛 그대로 초록리로 서산군에 속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판소리 명창 고수관(1764~1849)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명창 고수관 기념비
명창 고수관 기념비

# 황소를 웃긴 고수관

2010년 충남대학교 마을연구단이 집필하고 민속원에서 간행한 서산 초록리243~244쪽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다. 이는 200896일 박종익이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초록리로 현지 조사를 나가 주민 김주영(, 72)으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초록리에서 나서 초록리에서 득음을 한 고수관은 당대 명창으로 이름을 얻었다. 그는 고향과 한양을 중심으로 소리판을 옮겨 다니며 창을 하였다. 그런 가운데 고수관이 춤추고 노래를 하면 황소가 웃는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고, 이 소문은 어전으로까지 번졌다.

하루는 왕이 신하를 불러,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야겠다고 하며 고수관을 궁으로 불러 소리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신하는 고수관을 찾아가 어명을 전했다. 임금의 뜻을 들은 고수관은 몹시 걱정하였다. 자신의 소리에 대한 항간의 명성은 고마운 일이지만 실제 황소가 웃는 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왕 앞에서 소리로 황소를 웃기지 못한다면 어떤 벌을 받게 될까 염려되어 전전긍긍하였다.

이처럼 고민을 하던 차에 묘안이 떠올렸다. 그는 발정 난 암소의 분비물을 구하여 춤출 때 입을 옷의 소매 끝에 발랐다. 그리고는 궁정에 들어가 왕 앞에서 춤을 추며 대기해 놓은 황소의 코끝에 옷소매가 스치도록 춤사위를 반복하였다.

그러자 황소는 그 냄새에 취하여 소리를 지르며 요동하였다. 이와 같은 황소의 행위와 표정은 마치 황소가 고수관의 소리에 취하여 격동하는 것으로 보이게 하였다. 왕 또한 황소의 흥분한 몸짓을 보면서, “과연 고수관은 명창이로구나!”라고 하였다 한다. 전해 오는 이야기의 사실을 떠나 명창에 대한 전설이 된 것이다.

명창 고수관 생가터 이모저모
명창 고수관 생가터 이모저모

# 고수관 꽃샘

고수관과 관련된 샘도 있다. 그 이름은 꽃샘으로 꽃샘은 초록마을 뒷산인 연암산의 산기슭에 있었다. 고수관은 초록리 꽃패집이라고 불리던 초가삼간 옴팡집에 살면서 뒷산 골짜기에 있는 꽃샘에서 목을 축여가며 소리를 연마했다. 비교적 이른 나이인 20세 전후 득음을 하니 그 목소리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실력을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한다. 샘물이 좋았던 것일까. 그의 득음을 향한 피나는 노력의 결실이었을까.

고수관은 고수관제라는 독특한 창법을 개발해 전수하며 소리계에 고유한 흔적을 남겼으나, 득음 후 곧 고향을 떠나 광대로 전국 곳곳을 떠돌다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꽃샘은 수량이 풍부하고 일정하게 물이 나와 마을 사람들의 식수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생가터 옆 개울로 흐르는 물소리가 청량하다. 하지만 꽃샘은 예전 홍수로 인해 토사와 산돌이 쓸려 내려와 희미하게 흔적만 남아있다.

공주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에 설립한 명창 고수관 기념비
공주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에 설립한 명창 고수관 기념비

# 즉흥적으로 시를 읊었던 고품격의 소리꾼 고수관

판소리는 18세기 후반 음악적인 세련도와 서민적인 흥미를 바탕으로 급부상하면서, 오늘날의 형식과 내용을 비로소 갖추게 된다. 충청도와 서울 일원을 오가면서 활동했던 고수관은 당대 최고의 명창 송흥록, 모흥갑, 염계달 등과 같은 시기에 활동하며, 염계달의 중고제를 계승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수관에 대해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 1940, 조선일보출판사 발행에서 저자 정노식은 고수관은 서산 고북면 사람으로 그의 장기는 <춘향가>인데 성음이 극히 아름답고 여러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발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지식이 풍부하고 머리가 좋아 즉흥적인 사설을 만들어 관리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판소리계에서는 고수관이 경상도 대구감사 부임잔치에서 기생점고 대목을 당시의 기생들 이름으로 지어 불러서 좌석을 경탄케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 오고 있다. 또 조선 말기의 도남문고판 소설 <춘향전>에는 일등 명창 고수관이 명함을 드리겠소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는 소설에 나올 정도로 고수관은 당시는 최고의 명창으로 추앙받았다는 증거다. 하지만 고수관은 1840년 경, 즉 그의 말년에 공주로 이사하여 살았다.

당시 공주는 수부도시로 전국 각지 명창들이 찾아드는 곳이었다. 중고제의 창시자 김성옥, 이동백, 황호통, 박상도, 김석창, 김창룡 등도 공주에서 활동했다. 공산성 성안마을에는 오일장마다 소리판이 열렸고, 일제강점기 대명창들이 초청되어 공연이 성행했다. 동편제 송만갑, 서편제의 정정렬도 마찬가지였다. 이동백, 김창룡이 공주 옥룡동에 터를 잡고 산 이유이며 고수관 또한 말년을 공주에서 보낸 까닭이다.

명창 고수관의 ‘자진 사랑가’
명창 고수관의 ‘자진 사랑가’

# 어허 둥둥 내 사랑...고수관의 자진사랑가

고수관은 목소리가 각별히 아름답고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독특한 감동을 일으켜 딴청 일수 고수관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한다. 춘향가중에 특히 사랑 사랑 내 사랑 어허 둥둥 내 사랑으로 리듬을 타는 저 유명한 더늠 자진사랑가는 선배 염계달의 소리제를 받아 마치 그네를 타듯 더욱 신명나는 소리를 내는 고수관의 창작물이며, 이후 송만갑(宋萬甲)과 전도성(全道成)의 소리로 전승되어 왔다.

<사랑가>는 춘향과 이 도령의 사랑을 다양하게 표현한 소리로 춘향가 중에서도 가장 오래 되고 또 인기 있는 대목이다. 최초의 판소리 관련 문헌인 만화본춘향가(晩華本春香歌)에도 <사랑가>와 흡사한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사랑가>는 춘향가 발달 초기부터 불렸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고 있는 더늠으로는 고수관의 <사랑가>가 처음이다. 고수관의 <사랑가>는 이른바 <자진사랑가>로서 가는 태도·오는 태도·걷는 태도·웃는 태도를 보자고 하는 태도 보기 노래다음에 수박·개살구·포도·능금 등을 권하면서 먹겠느냐고 묻는 먹을거리 권하는 노래가 이어지는데, 중중모리장단으로 부른다.

신위의 문집 『경수당전고』 권34(제7책)에 수록되어 있는 1826년(순조 26)에 지은 「관극절구십이수」
신위의 문집 『경수당전고』 권34(제7책)에 수록되어 있는 1826년(순조 26)에 지은 「관극절구십이수」

# 조선후기 문인 紫霞 신위와의 우정

() ·() ·()의 삼절(三絶)이라 불렸던 조선 후기 문신 겸 시인, 서화가 등으로 알려진 자하 신위(紫霞 申緯1769~1845). 그와 고수관(1764~1849)의 이야기를 적어 본다.

한 사람은 문신·시인·서예가·화가로, 또 한 사람은 판소리 명창으로 신위와 고수관은 수십년의 우정을 나누었다.

신위는 여러 관직을 역임했지만 정치가라기보다는 예술가에 가깝다. 시서화 삼절이라고 불릴 만큼 예술의 각 장르에서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였으며, 예술 작품 감식안이 높고 까다롭기로 유명하였다.

신위는 판소리 귀명창이기도 했다. 특히 고수관과 교분이 두터워 그를 집으로 초청하여 함께 지내면서 판소리를 즐기고는 하였다(1825, 1840, 1843). 그는 관극시 다섯 편을 남겼다. 1826(순조 26)에 지은 관극절구십이수는 그 다섯 편의 관극시(觀劇詩)들 중의 하나로서 경수당전고에 실려 있다.

신위의 관극절구(觀劇絶句)는 판소리의 공연 순서에 맞추어 칠언절구 12수로 구성되어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관중이 공연장으로 모여드는 광경(1)

청관중 중 어떤 총각과 처녀가 서로 눈짓을 맞추는 정경(2)

창자가 허두가(단가(短歌))를 부르는 장면의 분위기와 정서(3)

고수관 명창이 <춘향가(春香歌)>를 부르는 기교에 대한 감탄(4)

당시 명창들의 열거 및 판소리 예술성의 매력(5)

청관중이 추임새를 하며 판소리에 몰입하는 정경(6)

창자가 소리를 자유자재로 엮어내는 기교에 대한 감탄(7)

창자와 고수의 호흡이 절묘하게 일치되는 연극술에 대한 감탄(8)

판소리를 들으면서 환상적 경지에 몰입하는 정경(9, 10)

청관중이 창자의 외모와 연극술에 매혹되어 있는 정경(11)

공연이 끝난 후 공연장의 공허한 분위기(12)를 각각 서술하였다.

그 내용을 일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高壽寬宋興祿廉季達牟興甲噪海陬 : 고수관 송흥록 염계달 모흥갑은 노래로 이름나

往歡引我脫詩囚 : ()만 짓는 나를 지난날의 즐거움으로 끌어내네

淋漓慷慨金龍運 : 강개함이 넘쳐나는 김용운은

演到荊釵一鴈秋 : 노래가 형차에 이르니 한 마리 기러기라네

 

激賞時時一聲哄(격상시시일성홍) : 이따금 환호하는 외마디 소리

廣庭人海疊人山(광정인해첩인산) : 넓은 뜰엔 구경꾼이 인산인해라

今宵莫漫勤添炬(금소막만근첨거) : 이밤사 부질없이 횃불을 걱정마오

早有雲頭掛月彎(조유운두괘월만) : 반달이 구름 끝에 걸려 있으니

天生牙頰付伶優(천생아협부령우) : 타고난 목청을 광대에 점지하여

細嚼宮商字字愁(세작궁상자자수) : 궁상의 가는 소리 마디마디 수심이라

墮珥遺簪渾不惜(타이유잠혼불석) : 귀고리와 비녀가 떨어져도 아깝지 않아

通宵忘返爲君留(통소망반위군류) : 밤새도록 넋을 잃고 님을 위해 머문다.


명창 고수관 생가터 이모저모
명창 고수관 생가터 이모저모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는 <광대가>에서 고수관을 白樂天에 비유하여 말한 바 있거니와 중국의 유명한 문장가에 비유될 정도로 음유시인처럼 묘사했다.

고수관과 신위의 관계는 근 20년간 지속된다. 시인은 판소리 명창의 소리를 들으니 시를 짓지 않을 수 없다고 격정적으로 토로하고 있다. 신위는 고수관과 나이도 비슷하지만 고수관의 예술세계에 대하여 특히 공감하여 친밀한 사이를 유지했다.

신위는 1825<관극시>를 쓰던 해부터 1843년까지 고수관을 중심에 두고 그의 소리에 대한 감상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만년의 고수관은 자진사랑가를 鼻聲(코먹은 소리)으로 곧잘 불렀다고 한다. 신위가 고수관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843년의 일이다. 고수관의 춘향가 공연을 마주하면서 신위는 귀밑머리 하얗게 세어있는 광대 고수관을 안쓰러이 바라보고 있다. 스러져가는 늙은 광대를 추억하는 내용의 시다.


팔순에 만나 보니 귀밑머리 세었고

光陰은 거품처럼 소리판에서 부서졌네

산빛에 푸르스름한 갈대는 뱃전에 서걱이고

禪房은 적막하여 달빛 아래 물소리뿐

뒤에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할 수 있다 해도

예전의 춘향가 소리를 다시 해낼 수는 없으리


팔십 먹은 시인이 팔십 먹은 예술가를 쓸쓸히 노래한다. 신위는 온 생애를 판소리에 바친 늙은 가객의 하얗게 센 귀밑머리를 찾아낸다. 귀밑머리가 하얗게 세는데도 명창은 그의 나이에 걸맞게 소리하고 있다.

고수관의 여든 해는 모두 소리판에서 보낸 것인데 번개같다는 말로 그 빠름을 아쉬워한다. 물론 그 시간은 허무한 시간은 아니다. 아주 귀하면서도 빨리 지나가 버린 시간이기에 아쉬워한다.

신위는 비록 신분이 현저하게 다르기는 해도 예술의 아름다움을 추구해온 고수관의 삶에 숙연해 한다. 그럼에도 그의 뛰어난 예술이 머지않아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애달파했다.

명창 고수관이 세상을 떠난지 170여년. 그가 태어난 초록리 생가터를 찾아 연암산 자락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어디선가 지저귀는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래. 그의 춘향가를 듣고 싶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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