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어려움은 잠깐, 졸업장은 평생' 졸업장에 날개를 달아드리고 싶었어요!

양숙현 서산검정고시학원(노둣돌평생교육원) 원장
양숙현 서산검정고시학원(노둣돌평생교육원) 원장

딸이라는 이유로,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이유로 그렇게 죽도록 일만 했던 분들이 바로 우리 학원생들이에요. 이분들이 한글을 몰라 은행 일도, 차표도, 심지어는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도 마음대로 시키지 못하시는 분들이에요. 이름 석 자를 배우기 위해 병원 간다는 말로 둘러대고 학원에 다니는 게 너무 마음 아팠어요. 이분들이 바로 우리나라를 이만큼 성장시킨 분들이거든요.”
배움에 목마른 분들이 벽이라고 생각하며 돌아설 때 벽 뒤에는 반드시 문이 있다는 것을 학원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는 서산검정고시학원(노둣돌평생교육원) 양숙현 원장.
지난 26일 서산시 율지210에 있는 교실에서 그간의 못다한 이야기들을 양 원장에게 들을 수 있었다.

Q 성장 배경에 대해 말해달라.

내 고향은 전라북도 순창이다. 전 국민이 모르면 간첩인 맛깔스런 고추장으로 유명하고 사계절 아름다운 강천산이 근거리에 위치해 있다, 고향집 뒤로는 무량산과 용궐산이 우직하게 자리하고 허리께엔 맑은 섬진강이 흐르는 곳이다. 객지 생활할 때 이런 내 고향을 얘기해주면 사람들은 ~~깡촌이라고 했다.

난 그 깡촌의 정기를 먹고 15녀의 장녀로 태어났다. 농사꾼의 자식으로, 게다가 형제 많은 집 큰 놈 역할은 뉘 집이든 어땠을지 뻔하지 않은가. 어린 동생들 돌보고 밥하고, 빨랫감 들고 도랑 돌팍에 앉아 빨래하는 날엔 넘쳐나는 물에 옷가지 떠내려 보낸 게 어디 한 두 번이던가.

부모님께서 쌀 방아 찧으러 방앗간에 가서 늦도록 오시지 않는 날에는 동생들이 유난히도 보채고 울어댔다. 그런 밤엔 무서움에 덩달아 울던 날이 또 몇 날인지 모르겠다.

가마솥에 보리쌀 한 솥 넣어 아궁이에 불 지펴 밥했던 초등학교 시절, 학교 파하면 친구들과 산에 가서 긴 장대 끝에 낫을 묶어 소나무 죽은 가지를 꺾고 갈퀴로 솔잎을 긁어 묶어 두면 아버지가 오셔서 지게로 나르셨다.

나는 내가 감당할 만큼의 나무동을 이고 아버지 뒤를 따랐다. 나와 11살 차이나는 막내 여동생이 태어나던 12, 눈 내린 날 마른 땔나무가 부족해 퍼런 솔가지를 꺾어 아궁이에 넣는데 타닥타닥 소리만 요란하고 아궁이 바깥으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는 또 왜 그렇게나 맵던지. 매워서도 울고, 설움에도 울고, 내 눈알이 빠지는 것 같아서도 덩달아 울었다.

어지간한 농사일은 안 해본 것 빼곤 다 해본 것 같다. 누에치기며 길쌈 등등.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보고 자란 게 그 생활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장녀로서의 몫이라고 당연하게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Q 당시 시골 생활은 대부분 그렇게 사신 것 같다. 그럼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

 

지금도 기억나는 영화 같은 장면의 엄마 모습이 오버랩된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어렸던 우리 엄마는 베틀 위에 앉아 짤깍짤깍 박자에 맞춰 베를 짜셨다. 젊은 엄마는 뭐든 척척 잘해 내셨다.

엄마는 지금도 가끔 말씀하신다. “큰 놈이라 우리 애기가 고생 많이 혔지. 그것이 맴에 걸려.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하고그런 엄마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뭣이 맴에 걸린다고 그려 엄마~~뒤늦게 대학원 공부도 하고 이렇게 잘 사는데, 엄마 고생한 거는 말도 못허지. 엄만 또 그러네~~마지막 학기 등록금은 아빠가 대줬으니 그걸로 됐어 괜찮여 엄마~~”

난 정말 괜찮다. 솔직히 말하자면 괜찮은 게 아니어서 대학원 마지막 학기 등록금은 아부지께 부탁드렸었다. 지원이라는 말 얼마나 든든한 울타리던가.

예전이야 궁핍하여 모든 자식 교육에 여유가 없었다 쳐도 지금은 얼마든지 댈 수 있으니 말만 하라는 우리 아버지였다. 약주라도 드신 날엔 자식들에게 돌아가며 전화 걸어 하시는 똑같은 멘트. “이놈아, 이제는 엄마 아빠 힘이 있다. 걱정 말고 필요하면 얘기혀 이놈아. 헤헴~ 잘 있그라~~”

당신 말씀만 훌떡 넘기고 끊어진 수화기 너머에서 눈물 찔끔 훔치고 계실 우리 아버지였다. 대한민국 아버지들은 그렇게 우시는 것 같다.

2018년 노둣돌 수학여행 군산에서 남편과 함께
2018년 노둣돌 수학여행 군산에서 남편과 함께

Q 부군 되시는 분이 이곳 검정고시학원 노둣돌의 대표님이던데 어떻게 만나게 됐나?

결혼 전 나는 서울에 있는 검정고시학원에서 근무했다. 그때 고졸 검정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학원을 노크한 한 남자가 있었다. 공부는 뒷전이었다. 우리는 공부보다 마음이 맞아버려서 결국 결혼에 골인했다. 소위 나는 검정고시와 결혼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결혼도 하고 교육사업으로도 이어졌으니 이럴 때 일석다조라고 하든가.

결혼 생활 내내 셀 수 없는 삐걱거림에도 유지하고 유지되었던 비결이라면 아마도 검정고시라는 중매쟁이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검정고시는 버릴 수 없고, 버리면 안 되는 무기임을 스스로 되뇌며 살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1995년 내 나이 27살 때, 천안역 부근에 검정고시학원을 설립했다. 어리다면 어린 나이에 교육계 경영을 전공한 것도 아닌 교육 경험만으로 사업을 시작한 게 무리수였음에도 그 당시에는 성인학습자들이 대세였고 건물 위층을 더 임대해야 할 정도로 수강생은 날로 늘었다.

무식하니 용감해진다는 말처럼 참으로 용감했던 것 같다. 다른 건 몰라도 과묵하게 걸어온 성실·근면한 미덕을 우주가 알아준 탓일까(웃음). 돌아보면 그렇다.

3주 전 큰딸이 천안에서 응시하는 시험이 있어 시험장 내려주고 천안역 앞 옛 학원 자리를 찾았다. 세월이 지나 많이 낡긴 했지만, 그 시절 그곳에서 고민하고, 나누고, 함께 했던 시공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는데 콧등이 시큰했다.

사업이 무엇이지 내게 일러준 곳이었다. 무지한 젊은 날의 아쉬움만 가득한 곳. 용감하기에 시작할 수 있었던 곳이 나의 노둣돌이었다.

노둣돌평생교육원(서산검정고시학원)
노둣돌평생교육원(서산검정고시학원)

Q 서산에서 검정고시학원을 설립한 배경이 듣고 싶다.

천안에서 검정고시학원을 먼저 운영했다. 초창기 태안에서 천안까지 유학 오신 남자 수강생이 서산·태안 쪽에 나 처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많을 텐디 배울 디가 없슈. 서울까지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유라며 지나가는 바람보다도 더 빠르게 말씀하셨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음을 정하고 서산교차로 담당자에게 학원 자리 광고를 의뢰했다.
시장조사차 서산에 처음 오던 날은 억수 같은 비가 내렸고, 천둥번개까지 치는 악천후였다. 속으로 서산에 들어와 살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날씨마저 나를 시험했던 걸까. 올 놈인지, 말 놈인지라며 툴툴거렸다.
남편의 고향은 온양이다. 나고 자란 곳을 떠나기가 참으로 쉽지 않았을 남편과 슬하에 42살인 어린 두 딸을 놓고 서산에 입성했다.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 아니었나 싶다. 엄마로서 자녀교육은 생각 끝에라도 있기는 했던 건지. 간혹 그 시절을 생각하면 현기증이 나기도 한다.
하긴 후회하면 뭣하랴. 그때는 그게 맞았노라고 위로해 본다. 후회가 밀려들 때마다 두 딸에게 얘기한다. “엄마 사랑으로 컸어야 할 니들을 챙기지 못해 그게 제일 맘에 걸려. 말할 수 없이 미안해. 나중에 니들 애기들은 엄마가 잘 키워 줄 거야.”
그 말이 끝나면 큰 애의 기억은 어느새 4~5살에 가 있는지 낮잠에서 깨보니 할머니가 없어서 울었다는 둥, 아기스포츠단 시절 수영복을 안 챙겨가서 창피했는데 진주라는 아이의 엄마가 빌려줬다는 둥. 사실 그때마다 딸 아이의 애린 기억을 잊게 할 마법의 약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천안 학원은 다행히 듬직한 강사에게 인계하고 그렇게 지역을 옮겨 서산에서 터전을 잡았다. 꼽아보니 어느새 21년이다. “21년이면 서산 유지다 야. 애썼다 애썼어~~.” 이 말은 한 달 전쯤 고창 너른 청보리밭에서 난생처음 통화한 외사촌 이모의 말씀이다.
입김을 내쉬며 여기까지 참 잘 왔다. 그런고로, 그때도 맞았고 지금도 맞노라고...’ 나는 스스로를 다독인다.
노둣돌문해교육생들 3명과 함께 참석했던 충청문해교육협의회 열린운동회
노둣돌문해교육생들 3명과 함께 참석했던 충청문해교육협의회 열린운동회

Q 검정고시를 서산에서 설립하고 소중한 인연들’, ‘날개 편 인연들이 많았을 것 같다.

서산에 검정고시학원 둥지를 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수강생들이 몰려들었다. 시대적, 경제적, 여자라는 이유 등으로 교육의 기회를 놓쳐 늘 마음 한쪽이 휑하도록 베어내고 계시는 분들이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 배움의 갈증은 배우자의 성공도, 자녀들의 높은 교육도, 옷장 안에 자리한 고급 모피코드도 치장한 보석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아픔이다.
그래 배우지 못해 생긴 병이다. 이대로 못 배우고 인생 끝나면 너무 억울하지 않나하는 생각에 학생들은 죽기 살기로 공부에 매달렸다. 서로가 기로에 선 만남들이었기에 영어 수학이 문제였겠나. 까짓것 어렵다 해도 못 해낼 게 뭐 있겠나. 정말 오기로 한마음이 되어 한 차례씩 오는 공부병()을 이겨가며 졸업장을 거머쥐었다.

노둣돌평생교육원 교실 전경
노둣돌평생교육원 교실 전경

Q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이런 아픔을 많이 겪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분들이 있나?

대부분의 학원생이 기억난다. 이곳은 일반 학원과 달리 배우자와 가족에게 비밀로 하고 다니시는 분들이 많다. 좁은 지역에서 뉘 집에 밥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만도 하는 사이에는 둘러댈 말도 한정돼 있다.
날마다 어데를 그렇게 나가나라고 물으면 안 아픈 데가 없어. 병원 가”, “아들네 가. 손주 좀 봐 달랴라고 둘러댔단다. 춤 바람나서 그랴라고 하는 분들에게는 자꾸 알려고 하면 다쳐라며 적당히 둘러대기도 했다는 학생들이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검정고시학원은 학원이 아니고 병원이요, 시장이요, 한의원이요, 아들네 집으로 둔갑하여 비밀리에 공부하는 불안한 곳이었다. 그 이면에는 짜릿함이 더 컸을 것도 같고.
컴퓨터나 요리나 영어학원에 다닌다고 하면 가벼운 찬사라도 받겠지만 졸업장이 없어서 공부하러 다닌다고 하면 모르는 사람들은 졸업장이 밥 멕여 주냐, 졸업장 없이도 잘살아왔는데 웬 고생을 사서 하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솔직히 말하고 나면 더 얕본다는 사람이 많아서 더욱 비밀리에 하려는 입장이 바로 우리 늦깎이 학생들이다. 괜히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
그런 소리를 학원에 와서 하게 되면 내 임무는 더 커진다. 교과목 익혀서 합격도 시켜야 하고, 배웠으니 더 큰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하니 말이다. 더 당당하고 멋진 사람이 되어 어디서든 빛이 나도록 해야 하니까. 충동질이 많고 클수록 상대적으로 목표물의 질량치 역시 커졌다. 어찌 보면 그런 다짐이 고맙기만 하다.

노둣돌과 실버통합교육 강사와 워크샵(용인에서)
노둣돌과 실버통합교육 강사와 워크샵(용인에서)

Q 검정고시학원을 하며 보람 있는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

못 배운 공간을 채워 대학에 진학하신 분들, 석사 박사과정도 마친 이들, 정치가가 꿈이었던 이는 그 꿈을 이룬 분도 계신다. 글쓰기를 좋아했던 이는 국문학을 전공하여 시집도 여러 권 내셨고, 복지 분야 전공 후 복지기관을 설립하여 사업을 하는 이들도 있다.
21년 동안 배출한 합격생만 해도 어림잡아 1700여 명이다. 서로의 안부를 꾸준히 물으며 만나는 졸업생들이 많다. 우리의 보석 같은 인연이 결실이 되어 현 위치에서 더 강하고 넓게 자리하고 있음에 감사한다.
최근에는 18살 지로가 생각난다. 이쁘기 그지없는 지로는 올 4월에 고졸검정고시에 합격했다. 3월만 해도 선생님, 저 합격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준비하는데 떨어지면 창피해서 어떡하죠?”, “하우~~붙겠죠? 잘 해볼게요. 또 해봅시다.”

지로는 자문자답에 능한 아이다. 그런 지로가 보란 듯이 시험에 합격해 케이크 상자를 들고 학원을 찾아왔다.
선생님 덕분에 합격했어요. 많은 얘기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준비하는 학생들도 8월에는 다 합격하길 바래요라는 덕담도 함께 선사했다.
지로와 나는 수업하는 동안 기회가 될 때마다 얘기꽃을 피운 것 같다. 하하 호호 깔깔대며 한자 급수도 공부하고, 우쿨렐레도 함께하며 말이다. 때로 공부하다 지치면 퀴즈풀이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바둑 알까기도 하고 서로의 꿈을 공유하며 시간을 메워갔다.
위로 형제가 없던 나로서 언니 오빠가 있었다면 내게 해줬음 직한 얘기들, 내가 듣고 싶은 얘기들을 지로를 통해 또는 노둣돌 학습자를 통해 설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제 올해는 811일 검정고시 2회 시험을 앞두고 있다. 준비하는 모든 학생이 무난히 합격하기를 기원한다.

2018년 노둣돌 수학여행 군산에서
2018년 노둣돌 수학여행 군산에서

Q 노둣돌평생교육원 설립 배경과 교육 과정은 어떻게 되나?

2001년부터 교육인적자원부에서 평생학습도시 조성사업이 시작되었고 서산시는 2006년에 평생학습도시로 선정됐다. 평생교육이란 정규학교 교육 이외의 모든 교육을 말한다.
평생교육의 시대가 온다는 화두를 들고 교육의 현장에서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우선 나부터 평생교육을 받아야겠다고 결정하고 공부를 했다. 교육사업을 하며 가르치는 일에만 급급하다가 서른 중반의 나이에 또다시 학생의 신분이 된 나 자신을 보니 그게 얼마나 설레고 기쁜 일인지 학생들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었다.
레크리에이션을 시작으로 웃음치료사, 한자지도사, 청소년지도사, 사회복지, 평생교육사, 성폭력상담사 공부를 즐겁게 해나갔다. 공부가 힘들기도 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재충전하는 시간이라 말하면 콧방귀 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정말 적어도 내겐 그런 의미가 더 컸다.
배우는 일이 내 교육의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지침서이니 그 외에 바랄 게 뭐가 있겠는가. 대학원에 등록하여 평생교육 석·박사과정을 마쳤고 2015년 수료했다. 그리고 노둣돌평생교육원을 설립했다.

2020년 푸드테라피 프로그램 학습자와 교사들. 프로그램 진행 강사는 노둣돌이 배출한 유능한 강사 강정희 선생님.
2020년 충남평생교육진흥원 소외계층 사업 프로그램에서 하트김밥 만들기를 하며

Q 이름이 참 특이하다. 노둣돌은 어떤 뜻인가?

노둣돌은 말에 오르내릴 때 딛는 디딤석이다. 꿈을 꾸려는 이들이 안전하게 딛고 올라서라는 뜻으로, 정호승의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라는 수필집을 읽다가 발견한 보석 같은 말이다.
안 그래도 검정고시 합격 후에 원생들과 소통거리 부재의 아쉬움이 있었는데 노둣돌 설립 후 학습자들이 요구하는 부분들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더 즐거운 소통을 하고 있다.
학력보완교육(검정고시), 문해교육, 충남평생교육진흥원 공유로 사업·평생교육사 실습 기관, 실버통합교육, 동아리활동, 교육부 지원사업인 디지털배움터, 남편의 학부전공인 컴퓨터교육과 대학원 전공 분야인 한자급수교육 및 아동한자지도사, 교육부 주관 평생교육 바우처 지원 기관으로 등록되어 있다.

Q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한 말씀 해달라.

적어도 기초학력교육을 받는 학습자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더 이상 밀려나지 않도록 다양한 지원책을 찾아 도움을 드리고 싶다. 학력보완교육 책무를 하다 보니 기초교육 졸업장 없는 설움이 어떤 마음일지 크게 공감이 간다.
꿈은 있되 경제적인 이유와 시대적인 이유로 시도하지 못하고 좌절하거나 포기해야만 했던 아픈 과거의 우리 부모님 세대. 그리고 살면서 개인과 가족과 사회에서 소외와 위축을 느끼며 살아왔던 분들의 삶.
학력취득 후에 비로소 평생교육에 입문하게 된 사례들을 보며 학력보완교육은 가장 기본적인 교육의 시작이요. 평생교육의 자양분이 되는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사업, 기업이나 개원 후원을 동원해서라도 교육의 격차를 좁혀가도록 힘쓸 예정이다.
또한 희망의 날갯짓을 위해 잠시 머물다 가는 이곳이 더 안전하고 든든한 디딤석이 되도록 자리매김하고 싶다.
노둣돌 부부 역시 시대가 요구하는 교육인의 표상과 귀감이 되도록 쉼 없이 정진하고 노둣돌을 찾는 이들과 함께 가르치고 배우면서 함께 성장하는 교학상장(敎學相長) 정신을 생각하며 오늘의 희망을 잇는 터전으로 가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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