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맹세대다”...TV, 간판에 스마트폰까지 한글이 사라지고 있다
“매스컴 조차 외래어에 엉터리 외국어가 범람”...“교육계의 자성이 필요하다”

김종옥 선생님(97세)
김종옥 선생님(97세)

 

서산의 역사를 찾다보면 안타까움이라 해야할지, 아쉬움이라 해야할지 기록의 부재에 서운함을 느끼곤 했다. 충남지역에서 박물관 하나 없는 지역이 우리 서산뿐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던 중 한 세기에 해당하는 일제강점기에서 현대까지서산지역 근현대 교육자료를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에 기증 한 분이 있다는 소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서산시 죽성동 삼성아파트에 거주하고 계신 김종옥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2007125건에 달하는 자료에 이어 최근 추가로 21종을 연구원에 기증하셨다. 1세기를 살아 온 교직자의 생애사를 재구성할 수 있을 정도다.

인터뷰에서 선생님은 일제강점기 해미서(西)소학교 교사로 부임한 후 징병으로 끌려가 만주전선에 참전했다가 소련군의 포로가 된 비화와 광복 후 48년간의 교직생활을 자세히 회고했다.

 

Q. 사실, 전화상으로 건강하시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막상 뵙고 보니 선생님의 정정하심에 정말 놀랐습니다. 1925, 그러면 우리 나이로 97세 아니신가요?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독자셨고, 나는 둘째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 41, 늦둥이로 태어나서 그런지 병약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3살이 되도록 제대로 걷지 못하자 아버지께서 아이가 걸을 때까지 안방에 들어가지 않겠다며 사랑방에서 6달 동안 거처하셨다.”

잠시 말씀을 멈춘 선생님의 눈가에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물씬 묻어났다.

집안 대대로 서산에서 살아 오셨나요?”

연안 김씨의 후손으로 조선 광해군 때 계축사화를 피해 서산으로 내려와 8대에 거쳐 수석동에서 살아왔다. 영의정이셨던 8세조 할아버지가 경상도 산청 출신 조선시대 문신 정여창을 동향 사람으로 소개한 기록이 있다. 그 자료를 볼 때 산청이 본향이며 조식, 김집 선생님과 함께 영남학파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계축사화(癸丑士禍)’1613년 광해군이 이복동생인 8세밖에 안 된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과 세 아들을 죽이는 등 연안 김씨 일족이 화를 당한 사건이다.

 

Q. 일제강점기면 역사책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생활은 어떠했는지요?

 

요즘 사람들 입장에선 상상은 할 수 있어도 실감은 안날거야. 일상이 배고픔이었지, 오죽하면 남의 집 제사나 애경사에 가야 오랜만에 배를 채울 수 있었겠나.”

 

1930년대 서산지역 소학교 기념촬영 사진(학교명이 명확하지 않다)
1930년대 서산지역 소학교 기념촬영 사진(학교명이 명확하지 않다)

 

선생님은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줬다. 1930년대 음암공립보통학교 모습이다. 학교 교실을 배경으로 일본 군복 차림의 선생님과 아이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내가 그 학교를 나왔어. 어느날 그만 실수로 교실 유리창 하나를 깼어. 얼마나 놀랬던지, 아버지께서 변상해야 했는데 창문 전체도 아닌 유리창 한 장 값이 50전이여. 당시 쌀 한말이 50전이었고, 부잣집 머슴살이 여드레의 품삯이지. 공업화가 전혀 안된 나라의 유리창 값이 그토록 비쌌던 거지. 아버지가 쌀 한 말을 등에 지고 학교에 오시던 모습이 생생해.”

 

Q. 선생님 졸업장에 창씨개명 흔적이 있네요. 어떤 이름인지요?

선생님이 내보여 주신 소학교 졸업장에 1925년 음력 33일생. 김강종옥(金江鍾鈺) 1941(昭和 16) 음암심상소학교 졸업이라고 쓰여 있다. 음암심상소학교는 1929년에 개교한 음암공립보통학교로 1938년 음암심상소학교로 개칭한 6년제 학교다. 김종옥 선생님은 16세 되던 해인 1941년 음암심상소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장에 선생님 성함이 김강종옥(金江鍾鈺)이라 써 있네요?”

맞어. 아버지가 일제의 창씨개명에 따라 내 이름을 그리 지었지. 우리가 살던 마을 이름을 따서 붙인거여. 1914년 일제의 행정 구역 개편 때 마을 이름이 수동(壽洞)()’자와 강석리(江石里)()’자를 따서 수석리(壽石里)로 바뀌었는데, 아버님께서 강석리(江石里)의 강()을 따서 성씨 다음에 넣어 지은 이름이지.”

 

1941년(昭和 16년) 김종옥 음암심상소학교 졸업장
1941년(昭和 16년) 김종옥 음암심상소학교 졸업장

 

당시 일제는 조선이 일본 영토인 이상 한국어는 일본의 방언일 뿐이며 궁극적으로 소멸시켜야 한다며 1939년에 창씨개명 제도를 실시했다. 창씨개명에 응하지 않은 조선인에 대해서는 자녀를 학교에 취학하지 못하게 하고, 학생들에게 매질을 가하기도 하였으며, 경찰관 주재소로 호출하여 응할 때까지 무기한 구류와 박해를 가하기도 했다.

 

Q. 광복 1년 전인 1944년도에 교직을 시작하셨는데요. 그 이야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김종옥 선생님은 일제강점기였던 1944년 해미초(당시 해미西소학교’) 교사로 입문하여 서산초, 음암초 교사로 12, 운산초, 공주 이인초, 동암초 등 교감으로 14, 서산초, 부여 백제초, 홍성 광동초 등 교장으로 22, 48년을 교육의 현장에 계셨다.

일제강점기에 대전중학교는 일본 사람만 다녔고, 충남도에 상급학교는 예산농고(5년제), 홍성농업전수학교(3년제), 공주고보(5년제), 강경상고(3년제) 등이었지. 서산지역에는 상급학교가 없었어. 지금 생각하면 격세지감이지만 그땐 소학교만 나와도 면서기, 순사를 했던 시절이여. 교사가 되려면 사범학교를 졸업하거나 3종 교원시험을 통과해야 했지. 사범학교는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라야 가능했던 일이었으니 나에겐 그림의 떡이지. 나는 1942년 충청남도도립예산농민도장(忠淸南道道立禮山農民道場)을 수료하고, 둔산동에 있던 대전중학교 실과 조수를 했어. 그후 3종 교원시험을 통과하여 교사직을 시작했지. 지금 생각해도 3종 교원시험 합격을 위해 죽어라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나.”

3종 교원시험을 통과한 선생님은 1944년에 해미서(西)소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첫 번째 부임 학교였다. 당시 해미에는 일본 사람이 20여 명으로 살고 있었고, 그들 자녀는 해미동()소학교를 다녔고, 조선사람은 해미서(西)소학교를 다녔다.

일제는 일본 사람과 조선인을 같은 학교에 넣지 않았어. 서산초도 마찬가지였지. 그때는 서산영()소학교라 했는데 현재 서산초등학교 교표를 보면 영화로울 영()을 의미하는 구름문양으로 만들어져있어. 사실 이것은 일제가 만든 문양이지. 안타깝게도 그 역사를 잘 모르고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서산 교육계에도 일제 잔재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지.”

 

Q. 학교 선생님도 징병에 끌려갔나요? 소련군 포로생활도 하셨다던데 그 비화를 들려주세요?

 

그때가 453월이었지. 일제는 태평양전쟁이 막판에 이르자 학교 교사뿐만 아니라 후보생제도를 만들어 문맹자들에게 기초적인 글을 가르치며 징병으로 끌고 갔어. 난 기초 군사훈련을 마치고 8월에 만주전선으로 끌려갔지. 거기서 배치된 지 일주일만에 광복을 맞게 된 거야.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함경북도에서 3개월의 포로생활을 했어. 비참했지. 포로수용소라고 해봐야 시멘트 공장 바닥이었고, 짚을 깔고 시멘트 푸대라도 구할 수 있으면 이불 삼아 잠을 청할 수 있었지. 소련군은 일본사람과 조선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성이 무어냐에 이어 어떤 파냐며 본을 물어 구별해 냈어. 일본 애들은 그 답을 못하더라구. 3개월 쯤 지나서 이북에서는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소련군과 협조하여 포로를 풀어주기 시작했어. 일본 애들은 어디로 끌려갔는지 몰라. 이때 기지를 발휘하여 인민위원회의 엉성한 서류에 몰래 이름을 써넣어 풀려났지.”

 

Q. 세상이 어수선하고, 교통도 엉망이었을텐데 함경북도에서 고향까지는 어떻게 오셨나요?

 

광복을 맞았지만 혼란의 시기라고 할 수 있지. ‘의지가 없어 못살지 의지가 있으면 산다.’ 그것이 당시 겪었던 경험에서 얻은 나의 지론이여. 포로 생활에서 벗어나 함경북도 고모산에서 걸어서 고향을 향해 걸었어. 간혹 기차를 얻어 타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다 떨어진 일본 군화를 끈으로 묶고 한 달여를 걸어 서산으로 내려왔어. 인민위원회에서 내 준 빨간 비표를 받아 통행은 가능했지만, 매일 걸식에 무전취식이었지. 거지중에서도 상거지가 바로 그 꼴이였을거야.”

원산을 거쳐 경기도 연천에 도착했을 때는 경계가 심했더랬어. 야밤에 배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 동두천에 도착하니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거야. 거기서 별것도 없었지만 소지품을 다 빼앗기기도 했지. 서울에 도착해보니 한국군 1기 간부후보생 모집이라는 현수막이 있는 거야. 찾아갔어. 면접관이 묻길래 일본 기병대 소속으로 어디 어디 지역에 있었다고 하니까 바로 합격이라는 거야. 합격통지서가 집으로 갈 거라며 집에서 기다리라더군. 그 길로 집으로 내려왔고, 한달 후 합격통지서를 받았지.”

 

Q. 그럼 한국군 1기로 군대에 몸을 담으셨나요?

아니지. 아마 그때 한국군으로 들어 갔으면 백선엽 장군 같은 분하고 같이 근무했겠지.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가 완강했지. 아버지는 우리 집안은 무관이 아닌 문관의 집안이다. 군대로 갈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잘라버리셨어.”

귀한 막내 아들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게지. 형님에게 말씀을 들어보니 아버지께서는 징병에 끌려간 남의 자식들은 하나 둘 다 돌아오는데 막내는 언제 오냐며 매일 나를 기다렸다는 거야. 현재 이마트 부근에 오동나무 주막이 있었는데, 거기서 상홍리 저수지에서 잠홍동 방향으로 들어오는 길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아들을 기다렸다는 거지.”

결국 아버지 뜻을 거슬릴 수 없어 형님 일을 도와 농사를 짓다가 어는 날 해미에서 제자를 만났어. 그 제자가 해미서소학교 이명덕 교장선생님에게 내가 전쟁에서 돌아왔다고 얘기를 했고, 교장선생님은 직원을 보내 학교 복귀를 하라는 거야.”

하지만 일제치하에서 일본어로 학생을 가르쳤던 내가 무슨 양심으로 다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겠어. 교장선생님을 찾아 뵙고 내 입장을 밝혔지. 그때 교장선생님께서 지금 이 나라엔 교사가 없다. 나를 비롯하여 일제 치하에서 교사를 했다는 이유로 모든 교사가 교정을 떠난다면 아이들의 교육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라며 다시 교사를 하라는 거야. 집에 돌아 와 많은 고민을 하다 결국 학교로 복귀했지.”

 

Q. 그 후 48년을 교육자로 사셨군요. 교육자로서 아쉬웠던 적도, 보람 있었던 일도 많으셨을텐데...?

 

음암초등학교 제21회 졸업기념사진
음암초등학교 제21회 졸업기념사진

 

아마 교육자에게 가장 기뻤던 일을 묻는다면 제자들이 잘될 때이지 않겠나. 6.25사변 직후인 음암초등학교 21회 졸업생들이 많이 생각나. 당시 6학년 담임으로 상급학교 수험생 교육을 맡았어. 처음 국가고시가 시행된 해로 서산중학교 입학 성적 1~20등 중 13명이 들어가는 쾌거를 달성했지.”

아쉬운 점, 반 백년인데 왜 없겠나. 지금은 중앙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당시 서산농고에는 부석 강당리 출신인 이휘준 선생님이 계셨어. 동국대 교육학과 출신으로 대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6.25 전쟁으로 서산농고로 내려오셨지. 선생님은 서산농고 1, 2, 3, 4회와 서산중 1, 2, 그리고 서산여중 1, 2회 졸업생들에게 교육심리학을 가르쳤고, 준교사자격증을 줬어. 이휘준 선생님이 가르친 그 학생들이 서산의 향토교육의 시초가 된 거야. 나는 선생님들에게 이휘준 선생님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여러차례 말했어.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 공적비가 세워지지 않고 있어. 너무들 쉽게 잊는 건 아닌지........ 다행스럽게도 국어를 담당했던 조재혁 선생님에 대한 공적비는 제자였던 이희영 전 천안시장과 시인 이생진의 주도로 세워졌지.”

 

Q. 한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오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요즘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은?

나는 문맹세대여. 매스컴에서 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외래어에 엉터리 외국어가 범람하고 있는 세태에 너무나 분통이 터져. 오죽하면 교사 출신인 내가 나 스스로를 문맹세대라 말하겠는가. 일제 치하에서 우리 말을 쓰지 못하게 했던 일이 아직 100년도 채 안됐는데...교육계의 자성이 필요해.”

선생님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우리 사회에 존경이라는 말이 없어졌어. 걱정이라는 말도 없어졌지. 어른들의 이야기를 걱정이 아니라 핀잔으로 듣는 경향이 많아. 지역사회에 존경 받는 진정한 어른이 없다는 것도 문제지만, 젊은 사람들도 마냥 핀잔으로 듣는 자세를 바꾸어야 해.”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씀도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 기록에 대한 소중함을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 기록은 역사여.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며 미래를 설계하는 기초지. 젊은이들이 자기 성취는 자기가 만드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기 바래다. ‘의지가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의지가 없어 못살지 의지가 있으면 산다는 말을 명심해 주길 바래.”

 

제2회 유물 기증 기탁자 초청행사 사진(출처 : 충청남도역사박물관)
제2회 유물 기증 기탁자 초청행사 사진(출처 : 충청남도역사박물관)
김종옥 선생님 퇴임 사진
김종옥 선생님 퇴임 사진

 

선생님의 가르침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며 인터뷰를 마쳤다. 돌아 오는 길. 아파트 입구까지 배웅을 나서는 김종옥 선생님. ‘사람에 대한 예절이 어떠해야 하는 지 몸소 보여주신 가르침과 100년의 역사를 올곶이 전해주심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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