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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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 최윤애 시민전문기자
  • 승인 2021.06.13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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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점엄마의 200점 도전기 62
옷이 젖지 않게 스스로를 지켜내면서 앞질러 걸어가는 다연이
옷이 젖지 않게 스스로를 지켜내면서 앞질러 걸어가는 다연이

비 오는 날이면 딸들과 나는 각자의 장화를 신는다. 걸음을 뗄 때마다 종아리에 흙탕물이 튀는 게 찝찝해 작년부터 아이들을 따라 장화를 신었다. 그때부터 다리에 물이 튀거나 발이 젖는 일이 없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의 일이다. 우산 하나에 의지해 여느 때처럼 교복을 입고 버스정류장까지 1.4km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바람까지 심하게 불어 혹여나 우산이 뒤집히지는 않을까 걷는 내내 각별히 신경을 써야 했다. 간신히 얼굴과 상의를 가린 채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으나 우산이 가리지 못하는 교복치마와 다리, 신발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몸의 절반이 빗물에 잔뜩 젖어 물 먹은 솜 같은 기분으로 버스를 타야 했다.

다행히 학교 사물함에 체육복이 들어 있었다. 나는 교실에 도착해 고동색 교복치마 대신 하늘색 체육복 바지로 갈아입었다. 교실에 체육복을 입은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속이 상했다. 태풍이란 것이 대체 왜 와서 이렇게 젖은 채로 등교를 해야 하는지, 비와 바람을 뚫고 그 먼 길을 나 홀로 걸어야 하는 현실이, 학교에 오자마자 빗물에 젖은 옷을 갈아입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

그런 상황을 함께 겪고 공감할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 나는 더 외롭고 서러웠다. 뒤늦게 막내로 태어나, 깨알 같은 경험들을 함께 나눌 형제자매가 내 곁에는 없었다.

얼마 전 다은, 다연이가 장화를 신은 채 각자의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내리는 비에 옷이 젖지 않게 스스로를 지켜내면서 엄마를 앞질러 걸어가는 아이들이 대견했다. 어느새 건강하게 자라 비 오는 날 내딛는 걸음걸음에 손길이 필요하지 않은 어린이가 되었구나 하는 안도와 내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가 조금씩 가벼워지는구나 하는 해방감이 흠씬 느껴졌다. 시원한 빗줄기와 상쾌한 공기가 더없이 좋았다.

산책로에 접어든 아이들이 깡충거리기 시작했다. 엄마 눈치를 쓰윽 보며 물웅덩이에 한 번 들어가더니 이후로는 보이는 족족 여지없이 뛰어 들었다. 물이 깨끗하건 말건 개의치 않고 경쟁하듯 첨벙대던 아이들은 옷이 젖어갈수록 더 크게 깔깔거렸다. 아이들이 비 오는 날을 마음껏 즐기도록 응원하는 시간이었다.

25년 전 태풍 오던 날, 내 옆에 함께 걷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하는 상상을 해 본다. 그랬다면 바람에 흔들리는 우산을 온 힘을 다해 꽉 잡으면서도, 빗물에 젖어 축축함을 넘어 차가워진 교복을 입고도 마냥 신나게 재잘거리며 길을 걸었을 텐데. 그날이 이렇게 오래 기억되지도 않았을 텐데.

아이들이 건강한 사회를 꿈꾼다.
아이들이 건강한 사회를 꿈꾼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비가 내렸다. 비가 온다는 말에 다연이가 물 미끄럼을 타기로 했다며 좋아했다. 아이의 우의를 챙기고 있는데 옆에서 옷이 젖어도 되냐고 물었다. 코로나19 때문에 여름에 놀이터를 이용할 수 없으므로 비가 올 때 빗물놀이터에서 실컷 놀고 오겠다는 계획을 어린이집 선생님께 들은 바 있었다. ‘워터슬라이드 대신 레인슬라이드라니! 선생님의 기발한 생각에 감탄하며 다연이에게 대답했다.

그럼~ 옷 갈아입으면 되지.”

너의 황금 같은 체험에 그까짓 옷이 무에 그리 대수랴! 내 말에 애교덩어리 다연이가 함빡 웃었다.

최윤애 보건교사
최윤애 보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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