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힘들어도 사람만 좋다면 그곳이 어디든 천국”

귀농하기 좋은 곳, 귀농 귀촌인들이 꿈꾸는 서산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

박형식 서산시귀농귀촌 회장
박형식 서산시귀농귀촌협회 회장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각자의 얼굴만큼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에서 순간순간에도 수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바람 같은 마음을 머물게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거란다.”

이 말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글이다.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가 고향이면서 생면부지 서산에 정착하여 지역민들과 소통하며 살아가고 있는 서산시 팔봉면 호리의 박형식 서산시귀농귀촌협회 회장.

박 회장을 잘 알고 있다는 한 지인은 귀농·귀촌하신 분들은 주로 연세가 좀 있으신데 이번에 취임하신 분은 57세로 젊은 분에 속한다. 우리 협회로 봤을 때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외부 시선으로는 어떻게 저분이 됐지?’ 물음표도 생길 거고 궁금하기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선선한 바람이 불던 7일 올해 서산시 귀농·귀촌 협회장에 취임한 박형식 회장을 만났다.

Q 만나 뵈어서 반갑다. 회장님의 어린 시절 얘기를 해달라.

내 고향은 꼬막 정식으로 유명한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다. 25녀 중 다섯째로 태어난 나는 어린 시절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아이로 자랐다.

우리 집은 평야만 아득히 펼쳐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부모님은 새벽닭이 울리는 신호로 7남매를 키우기 위해 농사일에 매달리셨고, 모든 부모님이 그러신 것처럼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으신, 참으로 억척스럽게 일을 했던 분들이셨다.

성실해라.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라는 것을 몸소 실천하신 부모님은 공무원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농사일의 힘듦을 내색하셨다. 어린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부모님의 심중을 헤아릴 정도의 심성은 가졌던 것 같다.

집에서 20분 거리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1시간 이상을 자전거로 통학해야 하는 벌교중학교로 진학을 했다. 지금은 라이딩동호회가 있을 만큼 자전거가 취미생활로 자리를 잡았지만, 그 당시 내게 자전거란 그저 단순한 교통수단이었다.

중학교 시절, 3년 내내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내 전용 자전거는 까까머리 어린 중학생에게 감수성을 실어 나르기에 충분한 매력을 선물했다. 서정적인 풍경이 그림처럼 그려졌던 농촌 풍경들, 지금 생각해도 아련하다.

그래서인지 명절 때가 되면 고향에 내려가 꼭 당시의 풍경을 떠올리며 지나간 세월을 그리워한다. 정말 유수와도 같은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다.

직접 만든 그네를 타고 있는 박형식 회장
직접 만든 그네를 타고 있는 박형식 회장

Q 고향은 누구에게나 아련한 것 같다. 그럼 중·고등학교도 모두 벌교에서 다녔나?

아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서울에서 신학대를 졸업하고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는 누나 곁에서 전자공고를 다녔고, 대학도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군대를 막 제대한 26살에 처음 100여 명이 근무하는 중소기업체에 취직해서 연구소 상대로 컴퓨터 샘플 계통 영업을 뛰었다. 그러다 금성이 LG로 바뀌는 중에 내가 다니던 회사는 삽시간에 부도가 나버렸다. 회사 대표는 행방불명이 됐고, 집에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기어 다니고 있고.

식구들 볼 면목도. 음식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질 않았다. 한 달을 꼼짝 않고 집에서 머리를 싸매고 누워있었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사람과 아이들이 나만 쳐다보는 걸 느꼈다. 순간 가장이란 두 글자가 내 머리를 때렸다.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났다.

그때 전에 다녔던 연구소에서 (사업)한번 시작해보라는 권유를 해왔다. 컴퓨터 샘플 시제품을 가지고 갔더니 제법 반응이 괜찮았다. 당시 군대 덕을 톡톡히 봤다. 선후배 중에서 삼성이나 LG연구소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꽤 여럿 있었다. 그들과 다시 연을 맺은 게 굉장한 힘이 됐다. 그렇게 시작한 사업이 20년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컴퓨터 업계가 대형에서 소형으로 옮겨지면서 하향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사업을 접을 때가 된 것이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이었다.

서산시 팔봉면 호리 박 회장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바라본 풍경
서산시 팔봉면 호리 박 회장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바라본 풍경

Q 궁금한 것이 사업체를 접으면서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고 아무 연고도 없는 서산을 택한 이유는?

옛날부터 내 꿈은 앞에는 바다가 보이고 뒤에는 산이 있는 쾌적한 풍경인 배산임수형 전원주택에서 부모님 모시고 가족들과 오순도순 사는 것이었다. 아마 이것은 나이가 들면서 남자들이 주로 꿈꾸는 삶일 것이다. 이따금 한가로운 염소 떼가 무리 지어 노니는 것을 바라보며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농사를 짓는 노후의 전원생활.

고향 벌교로 내려가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단은 차가 밀리면 열 시간 이상 걸리는 게 너무 힘이 들었고, 두 번째 아쉬운 점은 바다와 산이 없고 오직 들판에 동네 하나뿐이니 내 꿈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적어도 2의 인생은 결국 힐링이란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서울과 근거리에 있는 서산을 택했다. 배산임수. 바로 내가 찾던 최적의 조건이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부동산 업자를 따라 가도가도 끝없이 들어갔던 곳 서산시 팔봉면 호리. 바다와 산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던 곳이 바로 지금 내가 사는 호리다. 그때가 2013년이었으니 벌써 햇수로만 8년이다.

그래도 가장 큰 소득원은 뭐니 뭐니해도 3년 전에 구입한 포크레인 중장비 사업이라는 박형식 회장
그래도 가장 큰 소득원은 뭐니 뭐니해도 3년 전에 구입한 포크레인 중장비 사업이라는 박형식 회장

Q 시골로 내려와 시도했던 것이 많았던 거로 안다.

사실 좀 어설픈 게 많다(웃음). 전원생활을 싫어하는 부인과 11녀를 서울에 두고 형님댁에서 살고 계시던 아흔의 노모를 모시고 팔봉면 호리로 내려왔다. 평생 땅만 파던 노인네가 얼마나 답답하실까 생각하니 망설일 겨를 없이 어머니와 함께할 수 있는 이것저것을 찾았다.

처음 했던 것이 뒷동산 1,200평에다 마을이장과 함께 염소목장을 만들었다. 평소 손재주가 좀 있었다. 솜씨를 발휘해 전망대와 그네, 포도나무 터널 등을 꾸몄다.

당시 새끼 한 마리에 50~60만 원 정도로 가장 최고치를 찍을 시점에 농장을 경영했다. 잘 될 리 만무다. 2년가량 열심히 키워서 막상 출하 시점이 되자 염소 한 마리 가격이 10만 원도 되지 않았다. 너무 큰 좌절감에 맥이 다 풀릴 지경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염소는 키우고 있지만 수입은 늘 저조하다. 하긴 크게 될 정도의 마릿수도 이제는 아니니 그럴 수밖에 없지만.

닭도 키우고 있다. 내가 직접 키운 정 때문에 닭이든 달걀이든 먹지 못한다. 왠지 미안한 마음에 남들에게 대접은 하지만 내가 취하기에는 죄스럽다. 지금도 소일거리로 여러 가지를 한다. 벌여놓은 건 많은데 딱히 이거다!’란 것도 없다.

그중에 하나가 체리 농사였다. 농업기술센터에서 권장하는 농사였다. 하지만 현재 상황으로 봐서는 체리에 대한 수익 창출은 여전히 논쟁거리다. 이처럼 딱히 이거다!’ 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형어선을 보유한 호리 어촌계 계장직과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하는 등 부지런한 귀촌인의 한사람으로 정착해 나갔다. 매년 2~4월이면 감태를 수확했다. 이리저리 돈은 안되지만 하는 일은 많았다.

그중에서 그래도 가장 큰 소득원은 뭐니 뭐니해도 3년 전에 구입한 포크레인 중장비 사업이다. 열심히 한 만큼 보람을 느끼게 해주니 효자가 따로 없다.

시골에서 사는 생활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박형식 회장
시골에서 사는 생활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박형식 회장

Q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셨나 보다. 마음이 무거울 것 같다.

잘 모시겠다고 시골로 모셔왔는데 거동이 불편하셔서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고 더구나 치매를 앓고 계셨다. 집에 노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하는 수 없이 요양원에 모셨다.

갈 때마다 어머니 모습을 사진과 영상에 담아 온다. 집으로 돌아와 혼자 낮에 찍어온 자료를 보면 그저 죄스러움과 그리움에 목이 멘다. 7남매를 철철이 입히고 거두신 어머니가 혼자 요양원 생활을 하신다 생각하면 가슴이 더없이 먹먹하다.

어머니 계시는 요양원에서 색소폰을 부는 봉사를 한다. 그럴 때마다 밝은 노래보다 내 속에 눌려있던 슬픈 감정들이 멜로디가 되어 밖으로 흘러나와 나를 당황스럽게 할 때도 있다.

사실 음악을 하는 이유는 문화적 혜택이 고립된 우리 마을 행사에 서툴지만 참여하여 즐거움을 주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주민들보다도 내가 더 많은 힐링을 받게 된다. 아마도 어머니와의 추억이 색소폰에 많이 묻어 있어 더 그런 것 같다.

제5대 서산시귀농귀촌협회 회장에 당선된 박형식 회장
제5대 서산시귀농귀촌협회 회장에 당선된 박형식 회장

Q 2021년 서산시귀농귀촌협회 회장이 됐다. 이 자리에서 각오 한마디 해달라.

도시에서 시골로 내려오시는 분들이 상당수인데 서산시만 해도 무려 350여 명의 귀농귀촌인이 계신다. 예비 귀농·귀촌을 하시고자 생각하는 분들에게 협회에서는 상담과 멘토 역할을 해주고 있다.

특히 은퇴자나 사회경험이 많은 장년층 이상이 전원생활을 꿈꾼다. 잘못되면 큰일 날 수도 있기 때문에 우선 귀농귀촌인 댁에서 살아보기프로그램을 계획중에 있다. 이렇듯 실질적인 현장교육지원은 물론 물과 기름처럼 원주민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도 함께 해결책을 고민하기도 한다.

내가 살아보니 농촌만 한 게 없다. 농업이 국민경제의 근간이라 하지만 국민 정서의 근간이기도 하다. 이런 곳에서 여유도 찾고 행복하고 즐거운 생활을 한다는 것은 신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한 가지 고민해봐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사람과의 관계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만 좋다면 그곳이 어디든 천국이라고 했다. 그러니 무조건 지역민과 함께 화합을 도모하며 살아가야 한다.

귀농이나 귀촌을 하시는 분들을 위해 협회에서는 새로운 문화환경 조성과 회원 상호 간 친목 도모, 정보 교류, 나아가 서산시의 귀농 귀촌인들을 도와 성공적이고 안정적인 정착에 노력하고자 한다.

이렇게 하려면 무엇보다 정보교환과 함께 내부적인 결속력, 외부적으론 지역인들과의 화합과 소통을 도모해야 한다. 또 현장학습을 통해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서 함께 질적인 삶을 도모할 수 있도록 중간에서 가교역할을 잘하려고 노력할 예정이다.

가만 보면 우리 회원들은 재능이 상당히 많다. 그 속에 내재 되어 있는 재능을 찾아 아이디어를 조합하고 연구 개발해서 우리만의 차별화된 브랜드를 만드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겠다. 그래야 경쟁력이 있지 않겠나. 이것만으로도 행복지수는 상당히 높아지리라 예상한다.

다시 한번 다짐한다. 다른 지역에서 추종하리만큼 귀농하기 좋은 곳, 더 나아가 귀농 귀촌인들이 꿈꾸는 서산, 살기 좋은 서산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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