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하늘’을 받치고 있는 가로림만의 ‘연둣빛 물결’
해당화만 붉게 피어 슬픈 이야기를 전해 주는 ‘안섬 스토리’

가로림만 왕산포 앞 바다, ‘쪽빛 하늘’ 아래 짙푸른 현색(玄色)의 향연이 펼쳐졌다.
가로림만 왕산포 앞 바다, ‘쪽빛 하늘’ 아래 짙푸른 현색(玄色)의 향연이 펼쳐졌다.

 

가로림만의 가장 인상적인 풍경은 연둣빛 물빛이다. 마치 산속의 깊은 호수처럼 물결이 잔잔한 데다 쪽빛보다 조금은 더 연한 연둣빛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6월의 때 이른 장맛비가 그치고 쪽빛 하늘을 받치고 있는 가로림만의 연둣빛 물결이 기자를 유혹한다. 아니나 다를까 기대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한걸음에 달려간 가로림만은 녹색~노랑~회색~보라~연두~녹색~초록~청록색~파랑~쪽빛(남색)으로 변신한다. 짙푸른 현색(玄色)의 향연이 펼쳐졌다. - 편집자 주

 

황포 돛대와 ‘서산갯마을 노래비’(지곡면 중왕리 출신 김창곤 경원대 교수 작품)
황포 돛대와 ‘서산갯마을 노래비’(지곡면 중왕리 출신 김창곤 경원대 교수 작품)

 

# 굴을 따랴 전복을 따랴 서산갯마을/ 처녀들 부푼 가슴 꿈도 많은데/ 요놈의 풍랑은 왜 이다지도 사나운고/ 사공들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구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서산갯마을/ 쪼름한 바닷바람 한도 많은데/ 요놈의 풍랑은 왜 이다지도 사나운고/ 아낙네들 오지랖이 마를 날이 없구나. - 조미미 가수가 부른 서산갯마을가사

 

# ‘서산갯마을 노래비가 기자를 반겨준다. 노래비는 20106월 지곡면 중왕리 출신 김창곤 교수(경원대학교)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주민들의 진취적 기상과 열린 세계를 향한 정신을 담아 황포 돛대를 현대적으로 조형화하고, 그 옆에 1970년대에 가수 조미미가 불러 국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서산갯마을 노래 가사를 새겨 넣어 제작했다.

 

왕산포 어촌 마을 전경
왕산포 어촌 마을 전경

 

# 왕산포구는 행정구역상 지곡면 중왕리에 해당한다. 중왕리는 조선시대 지곡면 왕산리와 중촌리 등 두 마을로 되어 있었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 시 중촌리가 중리로 변경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중리와 왕산리를 한동리로 만들면서 중리의 중, 왕산리의 왕자를 따서 지곡면 중왕리가 되었다.

 

# ‘왕산(旺山)’인가 왕산(王山)’인가. 우리나라 지명사를 살펴보면 일제강점기인 1914년 조선총독부령에 따른 행정구역 개편으로 임금의 산이란 의미인 왕산(王山)이란 이름이 성할 왕()’을 써 왕산(旺山)’으로 바뀌었다.

당시 일제는 천황의 존재를 한반도에 인식시키기 위해 왕의 지명에 황을 상징하는 을 넣거나 한반도도 천황의 땅이라는 의미를 각인시키기 위해 왕 대신 일제히 으로 바꾸는 작업을 펼쳤던 것이다. 강원 강릉시 왕산면이 그러했고, 평창의 발왕산(發旺山)과 중왕산(中旺山), 인왕산, 양평 금왕산, 창녕 화왕산도 그중 하나다.

이들의 이름은 2000년대 들어 모두 왕산면(王山面), 발왕산(發王山)과 주왕산(住王山) 등 왕산(王山)으로 개명됐다. 서산 지곡면 왕산(旺山)포구도 본시 제 이름인 왕산(王山)포구로, 중왕리(中旺里)도 중왕리(中王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 왕산(王山)이란 이름은 원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 지곡 왕산포구가 위치한 산성리 부성산을 중심으로 반경 2km 이내에 원삼국시대 부족국가가 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지명들, 즉 대궐재, 망군말, 둥령당이, 옥터밭, 왕산이, 쇠팽이 등이 아직도 남아 있다.

서력기원부터 서기 300년경까지를 부족국가 혹은 초기철기시대에 해당하는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라 부른다. 당시 한반도 남부에는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마한(馬韓), 각각 12개 소국으로 구성된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이 있었다. 그중 치리국국(致利鞠國)은 서산의 지곡면 중심으로 태안에는 신소도국(臣蘇塗國), 당진에는 염로국(冉路國) 등 소국이 있었다. , 왕산(王山)이란 임금의 산인 것이다.

역사의 흐름속에 부족국가 치리국국(致利鞠國)은 백제 때 지륙현(知六縣)이 되었고, 신라에는 지육(地育)으로 고려시대에는 지곡현(地谷縣), 즉 지금의 서산시 지곡면이 되었다.

 

왕산포구 앞 안섬 전경
왕산포구 앞 안섬 전경

 

# 안도(安島)를 마을사람들은 안섬이라 부른다. 실제로 안섬이 정면을 막아주고 있는 왕산포구는 어떤 파도와 바람에도 호수처럼 잔잔하다. 섬 모양이 기러기를 닮아서 안도라는 했다는 설이 있지만 오히려 뱃사람에게 편안한 섬이라 해서 붙여졌다는 말에 더 솔깃하다.

안섬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아주 먼 옛날, 아마도 부족국가인 치리국국 시대였나 보다. 안섬에는 젊은 한쌍의 용모가 준수한 부부가 오손도손 살고 있었다. 여인의 미모가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가로림만 용궁의 선녀들도 시기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부성산성에 있던 왕이 왕산포로 행차를 나왔다가 그만 그 여인을 먼발치에서 보고 말았다. 덕망이 높았던 왕이었지만 그날 이후 그 여인의 자태가 눈앞에 어른거려 진수성찬도 마다할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왕이지 않는가. 그녀를 궁녀로 들인다 해도 백성들이 이해 할거야.” 그만 욕정이 사리분별을 가려버렸다. 궁녀를 뽑는다는 방을 붙이고 군사를 안섬으로 보냈다.

왕에게 아내를 빼앗긴 남자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목을 매고 말았다. 그녀가 없는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궁궐로 끌려간 그녀는 왕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왕이시여. 덕망이 높으신 왕을 모시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한 남자의 아내이며, 제 뱃속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사옵니다. 왕을 모실 자격이 없사옵니다.” 실제 그녀는 아이를 가진 상태였다.

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욕정에 눈이 멀어 남의 아내를 탐하다니...거기에다 아이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금수만도 못한 내가 아닌가.” 왕은 사과의 뜻으로 금은보화 한 상자를 들려 그녀를 돌려보냈다.

 

안섬 슬픈 전설을 품고 있는 해당화
안섬 슬픈 전설을 품고 있는 해당화

 

사랑하는 남편을 다시 볼 기쁨에 한달음에 달려온 그녀는 그만 넋을 잃고 주저앉고 말았다.

이미 세상을 떠난 남편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을 했다. 멈추진 않는 눈물은 남편의 시신을 적시고 가로림만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녀의 눈물에 젖은 남편의 시신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짙은 분홍빛의 가시가 돋은 애잔한 꽃이 피었다. 그날 이후 안섬에는 그녀도 사라지고 해당화만 붉게 피어 슬픈 이야기를 전해오고 있다.

그후 가로림만 바닷소리에 실려오는 이야기로는 가로림만 용왕이 홀로 된 그녀를 용궁으로 데려갔고,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자 안섬에서 도성리 저섬 사이에 아기섬이 솟아났다고 한다.

 

가로림만 용왕이 홀로 된 그녀를 용궁으로 데려갔고,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자 안섬에서 도성리 저섬 사이에 아기섬이 솟아났다고 한다.
가로림만 용왕이 홀로 된 그녀를 용궁으로 데려갔고,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자 안섬에서 도성리 저섬 사이에 아기섬이 솟아났다고 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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