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

"해미협동조합 만들어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 주고파"

공예작가 김영주 ‘목인, 숲’ 대표 (해미문화예술협회 사무국장)
공예작가 김영주 ‘목인, 숲’ 대표 (해미문화예술협회 사무국장)

“환갑이 되면 시집 한 권을 발간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문득 돌아보니 채 1년도 남지 않았다. 이 나이 되도록 아직 개인전도 하지 못했다. 기회가 된다면 해미읍성 앞 옛 집터에서 소박하게나마 의미 있는 전시회를 펼쳐보고 싶다. 좀 늦어져 할머니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설레서 울지도 모를 일이다.”

한때 교차로 신문사에서 김영주 기자로, 아동복지교사로 이름을 날린 그녀가 어느새 공예작가로 변신하여 해미신상가에서 공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자연을 벗 삼아 위로 받으며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 김영주 대표는 “제 곁에 계셔 든든한 부모님, 형제자매들, 예쁜 두 딸이 제 삶을 지탱하는 비타민이에요. 이만하면 저 너무 행복한 거죠?”라며 목단 꽃처럼 환하게 웃었다.

지난 25일 유난히 꽃과 자연을 사랑하는 김영주 대표를 해미 신상가에 있는 ‘목인, 숲’ 공방에서 만났다.

엄마가 만들어주신 예쁜 옷을 입고 무용을 했던 김영주 대표
엄마가 만들어주신 예쁜 옷을 입고 무용을 했던 김영주 대표

Q 만나고 싶었다. 어린 시절의 김영주를 소개해 준다면.

서산시 해미면이 고향이다. 엄마는 해미읍성 앞에서 송미의상실을 운영하셨고, 아버지는 농지개량조합에 근무하셨다. 4남매 중 첫 딸로 태어난 나는 의상실을 하시는 엄마 덕분에 예쁜 옷을 참 많이 입어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더구나 초등학교 때는 6년 내내 무용을 했는데 엄마는 그때마다 작품에 어울리는 의상을 만들어 주셨다. 어쩌면 그래서 더 즐겁고 흥미롭게 무용에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이뿐만 아니다. 그림대회에도 자주 나가는 등 어릴 적부터 예능 쪽에는 소질이 좀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골에서 그런 환경을 누리며 살아온 것은 대단한 축복이 아니었나 싶다.

장난감이 없던 시절, 엄마의 의상실은 내겐 작은 놀이터였다. 10살 남짓한 어린 여자아이가 자기보다 더 큰 재봉틀 앞에 앉아 남는 천으로 편지꽂이를 만드는 일.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마냥 아득하고 향기롭다.

서산시 해미읍성
서산시 해미읍성

Q 요즘 해미순교성지가 국제성지로 선포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작가님은 참 복도 많으시다. 어린 시절 이미 해미읍성을 품고 사신 걸 보니.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지 모르겠다. 역사적 가치가 뛰어난 해미읍성은 어린 시절 나의 유일한 놀이터였다. 장난감이 없고 놀이터가 따로 없었던 그 시절에는 그곳만큼 안전하고 놀기 좋은 장소가 없었다.

자연을 접하며 자라온 유년시절은 정서적으로 좋은 영향력을 주었다. 성인이 된 지금도 그때 그 마음이 남아있어서 인지 해미읍성은 내게 사색의 공간, 미래를 생각하기에 좋은 놀이터가 되고 있다. 성벽이 집안 앞마당이었으니 그 성벽마다 내 손때가 묻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게는 엄마 품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해미읍성이다. 이름만으로도 두근거린다.

Q 이런 이유 때문인지 예전에 작가님이 쓰셨던 글을 접해보면 주로 해미읍성 행사 기사가 많았던 것 같다. 학창시절 아픈 기억은 없었나?

꿈을 꿀 수 없었던 여고시절이 가장 아픈 기억이다. 한창 예민하던 중3 시절, 대전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기위해 시험을 쳤는데 떨어져 버렸다. 중학생 신분에 재수가 어디 가당키나 했겠나. 하는 수 없이 지역에 있는 학교에 입학하면서 속상함에 학업을 게을리 했었다.

그림 그리는 재능이 있었지만 시골이다 보니 미술선생님도 학원도 없어 그마저도 포기해야했다. 시골학교의 한계였다. 대학은 진학했지만 하고 싶은 일과 무관하게 전공을 택했다. 또다시 성향에 맞지 않은 공부를 해야 했고, 결국 졸업 후에야 전공과 무관한 미술학원 강사를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어린시절 의상실을 운영했던 어머니와 함께
아직도 소녀같은 어머니와 함께

Q 그나마 늦게라도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참 다행이다. 결혼과 그 후의 삶은 어땠나?

유난히 정이 많은 나는 따뜻한 사람을 좋아했다. 나이 서른에 결혼을 하여 예쁜 두 딸을 낳았다. 그렇게 나는 큰 어려움 없이 육아에만 전념하며 6년을 행복하게 살았다.

어느 날 남편이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사업을 하겠다고 뛰어들었다. 염려했던 부분이 터져버렸다. 첫 번째 사업이 부도가 났고, 연이어 두 번째 시작한 사업마저 잘못되는 바람에 우리집은 일순간 토네이도가 불어 닥친 것처럼 한꺼번에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시련을 겪다 보니 육신이 시들어 가고 의욕이 상실되는 고통을 겪었다. 평소 전혀 낮잠을 자지 않는 나는 피곤한 나머지 낮잠을 자며 꿈을 꾸었다. 아주 높은 낭떠러지에 손가락 여덟 개의 손끝으로 간신히 매달려 있는 나를 보았다. 정말 긴박한 상황이었는데 무심코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어린 두 딸이 나를 울면서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순간 정신이 번뜩 나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온 몸엔 식은땀으로 흥건히 고여 있었다.

‘내겐 두 딸이 있었구나!’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엄마로서 아이들을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중심을 잡아야 가정이 살아날 수 있다’는 마음에 툭툭 털고 일어났다.

다시 시작이었다. 우리 아이들과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공부방을 하게 되었고, 친정 엄마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알바를 했다. 그 돈으로 두 아이를 키우며 생활해야 하는 것이 버겁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든든한 지팡이가 되어 주었다.

사랑하는 두 딸과 함께
지난해 10월, 해미행정복지센터 전시회장에서 두 딸과 함께

Q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떠오른다. 듣는 내내 마음이 너무 아프다.

나는 엄마니까. 엄마는 강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나는 가장처럼 살아가야 했다. 그런 날들이 너무 길어져서 어깨가 무겁고 힘들어 죽을 지경이었지만 내가 무너지면 우리 집안은 풍비박산이 날 것 같아 꾹꾹 누르며 악착같이 살아냈다. 그러다보니 겉으론 웃지만 속으로는 늘 바위덩어리를 안고 살아가는 것처럼 무겁고 눅진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내가 누리지 못한 것들이 아니라 두 딸에게 해주지 못한 것들이다. 그것 때문에 많이 아팠다. 학원도 보내주지 못한 부모, 물질적으로 늘 부족하게 만들어 준 부모.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고 바르게 잘 자라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가끔 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내게 왜 이런 시련을 주셨을까. 부부가 착하게 살았는데 왜? 아마도 감당할 만큼의 시련을 주셨겠지. 험한 세상 속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나를 단단하게 연마시켰겠지.

내가 선택한 가정이었기에 피눈물 났던 많은 시간들. 그렇지만 노력의 결실이 지금 바로 내 눈앞에 나를 보며 웃고 서 있는 우리 아이들이 있기에 조금도 억울하지 않다. 사랑하는 두 딸과 남편은 내겐 축복의 존재다.

늘 물질적으로 부족했을지라도 사랑만큼은 누구보다 풍족하게 주려고 노력했던 시간들이 우리 아이들을 건강하고 바르게 성장시킨 것 같아 감사하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도 물질이 부족했던 시기에 얻은 것이 더 많다는 사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 아름다운 것을 볼 줄 아는 심미안, 풀꽃 하나에도 감동하는 눈과 귀 그리고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위로할 줄 아는 정. 지금 나는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않고 최대한 누리면서 소확행을 제대로 느끼고 있다. 이 시간들이 참 귀하디귀하다.

 

Q 40대가 힘들었으니 50대는 힘겨움에서 좀 벗어난 것 같은데 어땠나?

40대는 물론이고 50대가 되면서 더 열정적으로 일했다. 내게 50대는 노년을 준비해야 하는 단계이기도 하고 아직 정리가 안 된 빚들이 남아있어 미래가 두렵기도 한 상황이었지만 하는 일들은 즐거웠고, 바쁜 덕분에 갱년기 우울증도 없이 잘 지나가게 되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다만 수입이 있어도 밑 빠진 독에 물만 붓는 것처럼 어려움은 참으로 긴 고행길이다.

40대에 시작한 공부방, 일하며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했던 것이 10년도 훌쩍 넘게 했고, 그 일을 접은 후 시청 소속으로 지역아동센터 아동복지교사를 했다. 아이들의 환경을 이해하며 사랑을 듬뿍 주었던 보람 있는 직업이었다. 틈틈이 주말에는 교차로 신문 리포터가 되어 기사를 쓰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일 또한 다른 사람들의 삶을 통해 배우는 것도 많고 참 보람 있는 일로 간직하고 있다.

뒤돌아 볼 틈도 없이 정말 열정적으로 앞만 보고 달려왔다. 나의 50대는 가장 행복했다. 남편도 일을 하고 있고 아이들은 모두 독립해서 직장생활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주변 자연의 아름다움이 나를 보듬어 주며 늘 푸른 쉼을 쉴 수 있게 해주었다.

시 부분 신인상을 받아 등단의 기쁨을 누린 김영주 대표
시부문 신인문학상 수상 모습(시 등단)

Q 지역에서 굉장히 글 잘 쓰는 기자님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교차로 신문 기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

과외수입만으로는 생활하기 힘들어 뭔가 수입이 될 만한 것을 찾아보려고 교차로 신문을 밤새 뒤적였던 게 계기가 됐다. 그날도 첫 장부터 끝까지 샅샅이 보고 또 찾아보다가 내 눈에 띈 것이 바로 ‘리포터 모집광고’였다.

다음 날 “경험도 없고 컴퓨터도 잘 못하는데 그래도 지원할 수 있냐?”고 전화로 물었더니 “배우면 되니 글 쓴 것을 몇 점 제출하라”고 했다. 그 당시 하얀 종이에 초록색 색연필로 시 몇 점과 자기소개서를 써서 제출했다. “컴퓨터 활자만 보다가 오히려 신선하고 좋다”는 칭찬을 하며 나를 받아주었다.

그렇게 시작한 교차로 기자 생활 5년, 신이 나 열정적으로 취재를 했고 기사를 본 독자와 인터뷰이들이 칭찬을 해주었다. 감사한 것은 교차로에 몸을 담으면서 잠재적인 재능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 한국문인협회 서산지부 회원으로 활동하게 됐고, 시 부분 신인상을 받아 등단의 기쁨도 누렸다.

신인상은 어려운 삶을 견디고 감당해 온 내게 한 줄기 빛처럼 다가 온 커다란 선물이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과 용기였다. 나의 뿌리를 견고하게 받쳐주는 버팀목이었다. 아직은 자신에게 투자할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한 권의 시집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 그 꿈도 이룬다면 나는 아마도 품에 꼭 끌어안고 펑펑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싶다. 생각만으로도 대단히 설렌다.

김영주 대표가 만든 작품들
김영주 대표가 만든 작품들

Q 이제 60대에 입문하셨다. 다시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는데.

몇 년 전부터 60대 70대 아니 더 나이 들어가면서도 스스로 움직여서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해 왔다. 그게 바로 글, 그림, 칠보·수공예 등이다. 20대 때 통가죽 공예를 배우러 서울로 열심히 다닐 정도로 공예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많았다.

그림을 하게 된 계기는 기자 시절 그림 전시를 취재하러 갔다가 직접 만든 장신구를 보고 “작가 보다 더 작가 같으세요.” 라는 칭찬과 함께 전시회를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아 어·울림 전시회에 첫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 이후 그 작가에게서 수채화를 배웠다. 내 속에 잠자고 있던 예술의 혼이 서서히 꿈틀 대면서 기지개를 켰고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꿈꾸던 일을 하는 작가가 되어 있다.

부족하지만 현재 해미문화예술협회 사무국장직을 수행하며 각종 전시회, 벽화그리기, 각 축제에 참여하여 전시 판매를 하는 등 지역의 문화행사에 참여하고 해미를 아름다운 문화지역으로 만들어 가는 일에 즐겁게 참여하고 있다.

만드는 것을 특히 좋아하는 나는 작년에 해미시장 신상가에 작은 아트칠보수공예공방 ‘목인,숲’을 오픈했다. 하필 개업 하자마자 코로나 19가 터졌고 뜻하지 않은 어려움에 봉착했지만 그래도 내 가게가 생겼고, 작업공간이 생겨서 맘껏 만들 수 있으니 너무 행복하다. 다만 공간이 너무 작아 체험활동이나, 취미반 수강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없어 아쉬움이 크다.

목인, 숲 (아트칠보수공예공방)에서목단화 코사지를 디피하는 모습
목인, 숲 (아트칠보수공예공방)에서목단화 코사지를 디피하는 모습

Q ‘목인, 숲’은 어떤 공간이며 운영상의 어려움은 무엇인가?

목인, 숲은 누구든지 편하게 와서 휴식공간처럼 차도 마시고, 작품을 감상하면서 힐링 할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이며, 주로 제가 제작하는 그림 소품과 장신구, 칠보공예악세서리, 모자, 가방, 스카프 등을 전시 판매하는 곳이다. 다른 좋은 상품을 제작하는 작가 분들의 작품도 볼 수 있는 열려 있는 공간이다.

운영상의 어려움이야 역시 코로나 아니겠나. 많은 변화가 왔다. 오프라인의 영업은 점점 어려워지고 온라인으로 전향하여 홍보·판매해야 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특히 공예를 해서 수입을 창출하는 일은 점점 어렵다. 가끔은 심란하고 흔들릴 때가 있다. 급변해가는 현실에 맞추어가기가 결코 만만치 않아서 말이다.

이건 운영상의 어려움이라기보다 신체적 어려움인데, 긴 세월 고개 숙여 작업하는 자세가 목 디스크와 허리디스크를 남겼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새벽녘까지 작업할 때가 많다. 수면이 부족하다. 요즘 화두는 건강이다. 모든 열정과 하는 일들은 결국 건강 아래 있다. ‘건강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하는 생각에 일을 줄여보려 하지만 일상이 매일 바쁘고 줄다리기다.

가만 보면 나는 타고난 성향이거나 아니면 일복이 많은 운명인가보다. 좋아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여러 일을 하다 보니 몸을 너무 혹사시키는 듯해서 걱정이다.

작품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김영주 대표
작품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김영주 대표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해미와 해미읍성, 해미성지의 문화적 방향성과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다.

해미에서 나고 자라고 지금도 해미에서 살고 있는 토박이로서 더 아름다운 해미, 살기 좋은 해미, 경제가 살아 움직이는 장사하기 좋은 해미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해미는 작은 면단위지만 서산시 1경이 있는 문화관광도시다. 해미읍성 주차장 쪽에 아트 공 예관이 있었으면 좋겠다. 여기에는 해미, 해미읍성, 해미성지를 대표할 수 있는 관광 상품뿐만 아니라 관내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창작품을 상시적으로 전시·판매할 수 있도록 하고, 볼거리 제공과 함께 구매자와 작가들이 상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시기가 왔다고 본다.

다음은 해미 하천을 문화공간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하천변에 작은 부스의 갤러리를 만들어 주민들이 산책하며 소품들을 감상할 수 있게 하고, 공중전화 박스 같은 작은 책방을 만들어 시 한편이라도 볼 수 있는 정서적으로 힐링 될 만한 공간을 만들면 좋겠다.

해미읍성과 해미천 쪽을 적절하게 분산시켜 볼거리를 제공한다면 해미시장 중심으로 상권이 골고루 형성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해미읍성에서 중학교를 거쳐 가는 성지 순례 길도 실제로 맨발로 체험 할 수 있는 구간을 만들어 관광객들의 역사 체험도 이루어진다면 그 또한 이색적이고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개인적인 소망은 ‘목인, 숲’ 공방을 운영하다보니 시장 활성화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현재 대부분의 행사가 해미읍성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 성 안에서는 문화적인 행사, 시장에서는 팔고 사는 시장 경제가 원활하게 이루어졌으면 한다. 그렇게 되면 지역경제의 쏠림 현상이 조금이나마 해소되지 않을까 싶다.

아직은 결정되지 않았지만 상인회 회장을 비롯해 해미시장 상인회에서 협동조합을 결성하여 자체적으로 활성화 방안을 마련해 홍보도 하고, 좋은 프로그램으로 관광객은 물론이고 주민들이 문화적으로도 접근 가능하게 하려는 노력을 함께 할 계획이다.


남편을 만나 어려운 인생을 살아왔지만 그래도 매 순간 가족들의 격려와 응원이 있었기에 잘 견뎌낼 수 있었다는 김영주 대표.

“한 때는 원망도 많이 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안쓰러운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봐요. 한편으론 고마워요. 살아보려 노력하다보니 발견된 재능들이 의외로 저를 즐겁게 해줬거든요. 앞으로 하고픈 것도 어린 시절 해미읍성의 추억과 함께 저의 재능을 살려서 현재 하고 있는 일들을 연결해서 책으로 엮고 싶어요.”

곁에서 응원해 주는 가족의 따뜻한 사랑과 소소한 행복을 마음껏 누리는 김영주 대표가 내내 여여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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