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생 김남욱이 말하는 “도전이 저를 이만큼 성장시켰습니다”

그린케미칼(주) 김남욱 사원
90년생 서른둘의 김남욱씨

그날 90년생 김남욱씨는 서른둘의 나이에 거울 앞에 섰다. 10여 년 동안 다시 못 올 청춘처럼 치열하게 살아낸 한 남자가 웃고 서 있었다. 그는 말했다.

살아가면서 한 가지 배운 게 있습니다. 우선 제가 잘 돼야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도, 끌어줄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잘 되기 위해 잠을 포기하며 미친 듯이 살았습니다.

젊어서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무엇이든 다양한 경험을 하면 결국 그것이 곧 평생의 재산으로 저를 바로 세워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거든요. 그리고 그 생각은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제게 오는 것들을 피하지 않고 멋지게 도전하겠습니다.”

때로는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정말 열심히, 당당하게 삶에 도전했던 김남욱씨. 그는 앞으로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떠한 어려움에 부닥치더라도 반드시 이겨낼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시련이란 해가 떠서 지는 것만큼이나 불가피한 것이다. 여기에 도전이 추가된다면 자신을 한층 더 나은 사람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다는 김남욱씨.

그는 짧은 인생이지만 살아보니 도전과 노력이 뒤따르면 안되는 게 없던 것 같아요. 꿈과 희망이라는 씨앗이 선물로 주어지더라고요. 이번 인터뷰가 코로나로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상의 수많은 분들에게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라고 말했다.

지난 15일 만난 청년 김남욱씨의 서른둘 인생 얘기를 들어보자.

Q 어린 시절 얘기를 들려 달라.

안동에서 21녀 중 둘째로 태어났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달리기를 좀 했죠. 육상선수 출신이거든요. 당시 서산으로 이사 왔는데 중학교는 (육상부)없더라고요. 의기소침했죠. 원래 꿈이 운동선수와 개그맨이었어요.

음암중학교로 전학 와서부터 저는 마치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제 사투리를 듣기 위해 친구들이 막 몰려들었거든요. “어느 나라 사람이야?” “너 말투 왜 그래?”라고 하는데 진짜 너무 어색한 거예요(웃음).

체육 선생님께서 이 모습을 지켜보시곤 체육부장직을 시켜주더라고요. 리드 역할을 해야 빨리 적응할 수 있다고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바닥을 기던 학업도 어느 사이엔가 전교 5등으로 치고 올라갈 수 있었죠. 그 여파를 몰아 중학교 3학년 때는 전교 부회장을 했답니다.

체육 선생님 덕분에 용기를 얻었죠. 그때 배운 것들이 기타, 드럼, 비트박스, 마술 등이었는데 나름 친구들에게 굉장히 인기 있었습니다.

검도를 하고 있는 김남욱씨
검도를 하고 있는 김남욱씨

Q 소문에 의하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생활력이 강했다고 들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사업체가 부도를 맞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아르바이트를 참 많이 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입학 때는 그래도 부모님이 등록금을 내주셨는데 그조차도 저는 상당히 죄송했어요.

그 후에는 다시 자력갱생(자신의 힘으로 생존 추구)으로 헤쳐 나가야 했죠. 그래도 참 다행인 것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는 거예요. 군 입대 전까지는 매일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방값과 부대비용을 댈 수 있었죠. 힘들었던 와중에도 꿋꿋하게 헤쳐 나가는 제 자신이 때로는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수시로 되뇌었죠. ‘가난은 수치가 아니고 다만 일시적인 결함일 뿐이다라고요. 꿈과 노력이 있다면 언젠가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죠. 가난함으로써 돈 귀한 줄을 알았고, 그러다 보니 차마 부모님께 용돈 달라는 소리도 미안해서 할 수가 없었어요.

아르바이트를 참 많이 했습니다. 일명 노가다를 시작해서 택배, 식당, 피자 배달, 심지어 새벽반 수영강사까지 다양하게요. 지금 생각하면 이런 일들은 돈도 돈이지만 무엇보다 젊은 나이에 다양한 도전과 경험이란 재산을 남겨주었습니다.

조교 출신 김남욱씨
조교 출신 김남욱씨

Q 32년을 살아가면서 가장 잘 살았구나란 생각을 했던 때는 언제였나?

저는 조교 출신 때입니다. 늦은 밤까지 훈련병들 재워놓고 졸린 눈을 비비며 다음날 교육을 위해 공부를 해야 했죠. 당시 얘기를 하자면, 잠을 못 잘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어요. 실습 훈련을 할 때는 꼭 선임들이 보고 있었죠. 못하면 저녁에 다시 불려가는 거고요. 선임들의 불호령은 똑바로 공부해. 제대로 각 잡힐 때까지!” 그들의 말 한마디는 곧 법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면 밤 1~2시가 돼야 겨우 눈을 붙였죠.

어쩌다 부모님께 공중전화로 통화할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힘든 와중에 그리운 목소리라 그만 울컥할 때도 있어요. 화들짝 스스로 놀래요. 혹시 힘들어서 그러나 걱정하실까봐 조마조마하며 수화기를 내려놓곤 했죠. 저보다 더 힘든 삶을 사시는 두 분이었잖아요.

그때마다 제 속에 있는 또 다른 제가 말하더군요. ‘니가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넌 결국 낙오자다.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는 인생이라면 너는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다. 그러니 반드시 이겨내라. ? 너는 젊으니까. 너는 청년이니까. 적어도 청년이라면 이 정도 고생쯤은 충분히 즐길만 하잖아.’

조교훈련을 받다가 너무 힘들어 자살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힘든 군 생활이었습니다. 하지만 힘든 만큼 얻은 것도 상당히 많았어요. 그중에서도 사람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었죠.

그도 그럴 것이 한 기수에 300명씩 2년 동안 3,000여 명 이상을 만났습니다. 이런 인연들이 취업에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결국 군대 생활은 제게 둘도 없는 큰 재산이 됐답니다.

도전을 즐기는 김남욱씨
도전을 즐기는 김남욱씨

Q 간혹 군대를 가지 않으려고 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그러니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군대를 가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다고 생각해요. 어느 정도 군 생활에 적응할 때쯤 책을 참 많이 읽었어요. ‘젊었을 때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해야 한다는 글을 접했거든요. 전역 후 제가 해야 할 것에 대한 리스트를 작성하기도 했죠. 하나씩 적을 때마다 만족감과 자존감이 물 밀려오듯 쑥쑥 올라오더군요.

왜 지금까지 이렇게 살았지?’라는 자책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자부컨대 남들보다 조금 더 열심히 살았어요. 그래도 허투루 쓴 시간이 막 떠오르는 거 있죠. 가만 보면 경험이 풍부한 어르신들이 이런 말씀들 하시잖아요. “눈만 봐도 알 수 있다고요. 이제야 그 말의 뜻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책을 통한 간접경험이 있었기에 군에서도 앞장서서 무언가를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남들이 꺼리는 일을 하기도 했죠. 그 원천이 바로 책이었어요. 언젠가는 이런 일들이 제 미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란 확신이 섰거든요.

선임들이 너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스스럼없이 뛰어드는데 비결이 뭐냐?”고 하더군요. 그때 도전정신이라고 말했던 것 같아요.

그렇잖아요. 도전이 있기에 성공과 실패가 존재하잖아요. 저는 일단 먼저 해보자. 해보고 나면 실패든 성공이든 될 것 아니냐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죠. 전역 후에도 저는 군대에서 하던 것처럼 무조건 한 달에 5권 이상 독서가 몸에 배게 됐습니다. 어쩌면 제게 군대는 자아정체성을 확고히 심어준 곳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 같아요.

김남욱씨 모습
김남욱씨 모습

Q 군대에서 확실한 에너지를 받았다. 그럼 제대하고는 모든 것이 잘 풀리던가?

모든 것이 술술 풀릴 것 같은 느낌으로 제대를 했죠. 하지만 역시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어요. 퍽퍽한 삶의 여정이 또다시 저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2012년 복학 대신 1년 정도 지역 중견기업에 들어가 일하면서 다시 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형편이 어려우니 먼저 돈을 모아놓고 복학하자는 심산이 컸어요.

그곳에서 좋으신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특히 이듬해 복학을 할까 아니면 지금 있는 직장에 다니며 돈을 더 모을까!’ 갈등하고 있을 때 공장은 나중에 들어와도 되니 대학을 먼저 졸업하고 와도 늦지 않다며 직원들과 사장님이 말씀해주시는 거예요.

2013년의 5월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축제 기간에 저는 갖은 핑계를 대며 운동장을 빠져나와야 했어요. 저녁 시간에 맞춰 배달을 해야 했거든요. 피자집으로, 주말에는 예식장 뷔페식당으로요. 틈틈이 모아놓은 돈으로 미리 라이프가드(인명구조요원)자격증을 취득했고, 새벽 시간에는 2시간씩 수영강습을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 것 같아요. 집안 형편이 어려우니 저도 저였지만 집안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그런데 직장인도 아니고 오롯이 학생 신분으로 일을 해야 했으니 이것저것 가릴 게 없었어요. 새벽 5시부터 늦은 밤까지 겨우 잠이라곤 5시간도 채 못 자면서 생활했답니다. 장학금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죠.

25, 어느 날 자취방에 누워있는데 피곤하면서도 너무 행복한 거예요. ‘왜 이렇게 재밌지?’ ‘왜 이렇게 기쁘지?’ 저 자신이 얼마나 대견하던지 갑자기 복잡하던 머리가 풀어지면서 행복하다는 생각이 막 드는 거예요.

아마도 포기하지 않고 부모님 도움 없이 스스로 돈 벌고, 통신비 내고, 월세 내며 공부를 이어가는 현실이 굉장히 기특했습니다.

직원들과 축구를 즐기는 김남욱씨
직원들과 축구를 즐기는 김남욱씨

Q 젊은 분이 장난 아니게 생활력이 강하다. 취업은 어땠나?

당연히 조기취업을 했죠. 가난과 도전이 성과물을 만들어준 것 같아요. 사실 저도 대학 4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어요. 바로 취업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생활이 흔들릴 수도 있었거든요. 조바심에 그때부터 교수님들을 일일이 찾아다녔어요. 평소에도 학과 교수님들과는 친분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거든요.

조기 취업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전공이 체육이고 부전공이 호텔컨벤션쪽이었는데 호텔 쪽을 소개시켜주더군요. 그곳이 바로 서울 반얀트리호텔이었죠.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면접관이 인맥에 관한 얘기와 경험담을 얘기하라고 하는 거예요. 저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군 시절 얘기와 함께 지금까지 숱하게 그쳐온 아르바이트 경험담을 말했어요. 그리고 말미에는 사람이 좋으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죠. 그리고 2주 만에 출근하게 됐답니다.

태권도를 가르치는 김남욱씨
태권도 사범이었던 김남욱씨

Q 뜻하지 않은 어머니 병환으로 서산으로 내려왔다던데?

맞아요. 서울 호텔에 취업한 지 1년이 채 되기 전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큰 병에 걸리셨어요. 아버지와는 주말부부로 계셨고, 누나와 동생은 타지에 있다 보니 어머니 곁에 아무도 없었어요.

결정적인 계기는 어느날 서산 집에 왔는데 어머니 얼굴이 예전에 제가 보던 모습과 너무 달라져 있었어요. 이러다가 큰일 나겠다 싶어 짐을 챙겨 (서산) 내려왔죠. 그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게 됐습니다.

친구 소개로 일자리도 갖게 됐어요. 굉장히 힘든 자리였죠. 사람들이 한 달도 못 버티고 나가버리는 자리였습니다. 저는 면접 보는 자리에서 할 수 있습니다. 뭐든 다 맡겨만 주십시오라고 했어요. 쿠팡맨도 했었고, 공사장에도 다닌 제가 어려운 게 뭐가 있겠습니까. 특히 어머니와 함께 생활할 수 있다는데.

어머니 곁에서 회사에 다니니 돈 들어가지 않아 좋았습니다. 일 끝나자마자 편찮으신 어머니와 얘기도 하고, 여행도 가니 병색이 말끔히 사라져서 또한 좋았습니다. 열심히 하다 보니 정규직원이 됐고, 지금은 서산에서 다양한 공부를 하니 또한 너무 좋습니다.

'도전은 김남욱'이라는 김씨
'도전은 김남욱'이라는 김씨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조만간 저의 삶을 설 풀기라는 경험담 주제로 유튜브를 할 계획입니다. 책도 출간할거구요. 하루 일상을 가계부가 딸린 수첩에 매일매일 기록해 나가는데 벌써 세권 째 채워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유튜브 하는 사람들 끼리 잡지를 하나 만들었는데 제 글도 그곳에 실렸어요. 아주 재밌는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주로 사진과 영상을 남기는데 아마도 오래 기억하기에는 영상이 좀 더 나은 것 같아요. 그 첫 주인공으로 요즘 부모님 모습을 많이 찍고 있습니다. 기대돼요 상당히.

앞으로도 다양한 도전을 계속 할 겁니다. 저는 아직도 도전에 목마른 청년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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