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으로 남은 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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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으로 남은 카풀
  • 최윤애 시민전문기자
  • 승인 2021.05.16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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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점엄마의 200점 도전기-58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실천되기를 바란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실천되기를 바란다.

기숙사가 생겼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내가 다니던 여고는 지역에서 꽤 인정받는 곳이라 멀리 외곽에서도 지원해 오는 경우가 제법 있었고, 따라서 자취를 하는 이도 여럿이었다. 그런 학생들을 돕고자 건립된 기숙사였다.

기숙사가 오픈하면서 덩달아 나의 등하교 문제도 해결됐다. 버스 두 번을 갈아타야 하는 등하교길, 길에 쏟아 붓는 시간이 한 시간을 훌쩍 넘었다. 그러다 카풀을 하게 되었는데, 카풀의 경험은 편리함을 제고하고라도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당시 내가 사는 동네에 여고까지 아버지 차로 통학을 하는 자매가 있었다. 집에 차가 없는 나를 포함한 3명의 여고생 엄마는 그 아버지에게 카풀을 요청했다. 정확히 말하면 카풀로 이용하는 차량은 자매의 아버지 소유가 아닌, 아버지가 운전기사로 일하는 콘도의 셔틀버스였다.

카풀을 이용하는 대신 우리는 매달 교통비로 몇 만 원씩을 지불했다. 하루 4번의 버스비를 더한 비용보다 조금 적은 금액이었다. 카풀 차량의 승하차 장소는 마을 입구 버스 정류장. 나를 제외한 전원이 아랫마을 거주자였으니 별 무리 없는 결정이었으리라.

그러나 윗마을에 사는 내 사정은 달랐다. 아침에는 주위가 밝으니 상관없지만 야간 자율학습을 마친 밤 9시 이후의 시간에, 민가도 없이 논만 가득 펼쳐진 기나긴 길을 20-30분간 걸어 다니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주구장창 걸어 다니던 길이니 다소 늦은 시간이라도 같이 걸어갈 사람만 있으면 괜찮았다. 그러나 늦은 시간 관계상 동행할 사람이 없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날은 버스정류장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했다. 가끔은 아빠가 오토바이로 태우러 오셨고, 가끔은 초저녁잠을 주무시는 아빠를 대신해 엄마가 종종걸음으로 마중을 나오셨다. 아담한 나보다 더 작은 우리 엄마는 마을 중간쯤에서 만난 막내딸의 무거운 가방을 언제나 대신 받아 매고 앞장섰다.

이따금 나는 농사일로 힘드신 부모님이 안타까워 어둡고 고요한 길을 홀로 걸을 때도 있었다. 1990년대 농촌에는 사람보다 쌀이 더 중요했던가? 낱알이 가득 차려면 벼도 밤에는 잠을 자야 한다며 한여름 길가 가로등을 꺼두는 동네였다. 그럴 때면 기다란 그 길은 달빛만이 전부인 아득한 곳이 되어 10대 소녀의 가슴을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나의 엄마는 자매의 아버지에게 밤에만 윗마을까지 태워 주십사 부탁하였는데, 그분은 종일 운전을 해서 다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단칼에 거절했다. 그리고 한 번은 카풀 중단을 선언했다가 여고생 3명의 엄마가 카풀 비용을 올려주면서 무마된 일도 있었다. 그 때의 경험은 당사자인 나보다 어린 딸을 둔 엄마에게 더 한이 되었다. 나이 80이 된 지금까지도 그 일을 입에 올리시는 걸 보면.

어두운 길 한 가운데서,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서웠던 여고생은 이제 운전을 할 줄 아는 두 자매의 엄마가 되었다. 필요와 편리에 의해 언제든 내 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되고 보니 그때 그 자매의 아버지가 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다.
시대가 다르고 각자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굳이 그렇게까지 팍팍하게 굴어야 했을까. 자동차가 없음으로써 자식을 제대로 지켜 주지 못하는, 힘없는 부모가 되는 인과관계는 우습고도 슬픈 일이다.

81실의 기숙사에서 여고시절의 2년을 보냈다. 정해진 시간이면 복도에 늘어서서 점호를 하고, 공용 샤워실과 화장실을 사용하고 2층 침대에서 잠을 자며 보낸 2년간, 나는 학생이 된 후 처음으로 등하교 문제에서 자유로웠다. 태풍이 몰아쳐도 옷과 신발이 젖지 않은 상태로 등교가 가능한 것은 기숙사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가정의 달 5월은 맞이하며 이웃의 아이들까지 보듬어 줄수 있는 선한 마음이 이어지기를...
가정의 달 5월은 맞이하며 이웃의 아이들까지 보듬어 줄수 있는 선한 마음이 이어지기를...

우리 아이들은 그러한 수고로움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농사일로 허덕이면서도 자식에게는 가급적 일을 시키지 않았던 우리 엄마와 유사한 마음, 내가 겪은 어려움을 자식에게 대물림 해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거기에 이웃의 아이까지 보듬어 줄 수 있는 선한 마음을 더하여 작은 노력이라는 씨앗을 파종한다면 주변의 울타리가 조금 더 단단해지지 않을까.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함께 보듬어 키우는 세상이 오기를...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함께 보듬어 키우는 세상이 오기를...
최윤애 보건교사
최윤애 보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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