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눈물이 나오는 공감이 부처님의 동체대비 아닌가!”

“종교가 무엇이든 사람 사는 세상은 크게 다르지 않아...”

간월암 정경(석정경) 스님
간월암 정경(석정경) 주지 스님

저물어가는 저녁이었다. 썰물이 된 지는 조금 시간이 흐른 듯 물 빠진 해변은 질척거리지 않아 좋았다. 발밑으로 조그만 소리들이 교집합이 되어 귓가를 스친다. 천년을 이어갈 범종과 종각이 이 소리와 어우러진다면 뭇 중생들은 평온을, 고통받는 중생들은 아픔을 면할 것 같았다.

그날따라 때늦은 찬 기운이 구름을 몰고 왔다. 운이 없었다. 아름다운 풍광과 무학대사의 정기를 받은 낙조는 먹구름에 가려 아름다운 노을빛을 선물하진 못했다. 속세의 욕망이 덧없음을 가르치기라도 하듯 돌계단을 걸어 올라 법당 앞에 도착했다.

간월암 정경 스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어디선가 기도하는 간절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소리는 마치 그 옛날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천일기도를 했던 만공스님의 간절함 같은 것이었다. 두리번거리며 돌아보니 작은 소원등에 비치는 깨우침의 포말 소리였다.

“소원 적어서 다는 등입니다. 저 글자가 바래 지고 없어질 때까지 달아놓는 거예요. 등 밑에는 보리수잎이 달려있어요. 보리수가 깨달음을 상징하는 나무잖아요. 거기다가 소원을 적어 붙이는 거죠.” 소리 없이 다가온 정경 스님이 난간 위의 소원등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필자는 그렇게 접견실로 안내되었고, 간월암으로 오신 지 3년 되신 정경 스님의 담백한 차는 시간을 잊을 만큼 이야기를 이어주었다.

보원사수륙재설행위원회 운영위원장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하시는 정경스님(서산 간월암 주지)
보원사수륙재설행위원회 운영위원장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하시는 정경스님(서산 간월암 주지)

Q 저는 왜 이런 것이 참 궁금할까요. 실례가 될진 모르겠지만 스님은 어떻게 절로 들어오게 된 거예요?

1980년 매섭던 겨울이었습니다. 국민학교 1학년 막내아들이었던 제게 아버지가 갑자기 “짐 싸서 절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겁니다. 해병대 출신이셨던 아버지의 무서움 때문에 토를 달거나 싫다는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짐을 쌌지요.

엄청나게 가기 싫었어요. 형도 있고 누님도 있는 막내가 왜 절로 들어가야 하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어린 마음에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진 못했습니다. 보따리 두 개를 들고 영문도 모른 채 산길을 걸어 수덕사 산내암자이자 선원인 정혜사로 들어갔습니다.

5살 무렵 엄마만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요. 엄마가 차려주는 밥 대신 스님이 준비한 새벽밥을 먹고 1시간 30분 산길을 걸어 수덕국민학교에 다녔습니다.

등 하교를 하며 멀리서 본 우리 집은 그리움을 너머 슬픔이었습니다. 금방이라도 달려가 안기고 싶은 식구들, 하지만 아버지의 무서움 때문에 눈길도 거두지 못한 채 그렇게 산길을 올라 절로 들어가는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밤마다 정혜사 축대 끝에 앉아 산 아래 불빛을 봤습니다. ‘나는 언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눈물로 지내야 했던 날들. 하지만 저는 단 한 번도 산 아래 우리 집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조금씩 커나가면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내려놓게 됐지요. 참 잘 견뎌냈습니다. 절에 산다고 깔볼까 봐 어린 마음에도 무척 노력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은 배고픔이었어요.

당시 토요일은 오전수업을 할 때였는데 학교에서 정혜사까지 가려면 너무 배가 고팠죠. 개울물을 손으로 떠서 먹었습니다. 네발로 계단을 기어서 정혜사로 갔습니다. 한 달 넘도록 그렇게 다녔나 봐요. 지금도 기억나는 건 저의 모습을 가엾게 본 수덕사에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줬습니다. 찬밥이라도 비벼서 먹고 올라가는 날은 축지법을 쓴 것처럼 가볍게 정혜사 계단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간월암 난간에 걸려있는 소원등
간월암 난간에 걸려있는 소원등

Q 아버지는 물론이고 형제들도 막냇동생을 보러 오지 않았나요?

이미 외지로 나가 얼굴도 모르는 형제들도 있었고, 집에 계신 누님 한 분은 또 몸이 불편했습니다. 가슴 아픈 건 학교에 다니다 보면 먼발치에서 가족들을 보기도 하잖아요. 그때마다 정을 떼려고 그랬는지 서로 모른 척 지나쳤다는 거예요.

열 살도 안 된 아이에게 그리움과 보고픔은 항상 송곳이 되어 가슴을 찔렀습니다. 가난이 가족 간의 생이별을 만든 거죠. 원망도 있었지만 피는 물보다도 진하다고 ‘나만 절에서 따순 밥 먹나’ 싶어 밤에 몰래 쌀을 훔쳐 계곡을 타고 내려가 집에 내려놓기도 했어요. 사람들이 다니는 길로 가면 혹시 들킬까 봐 아무도 다니지 않은 곳을 택한 거죠. 그러다 스님들께 들켜 혼난 적도 있었어요.

Q 어린 시절, 절에서 생활하며 정말 힘들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던 것이었죠. 당시 스님들은 ‘공부시키면 중 안되고 다 뛰쳐나간다’라는 생각들이 주류를 이뤘던 시대였어요. 그러다 보니 학생 신분의 저는 상당히 미운털이 박혔던 거예요. 그나마 저는 국민학교 1학년에 다니다 절로 들어갔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 학교 정문도 못 밟았을 거예요.

당시 정혜사 계신 벽초 노스님은 제게 휴지통 하나 비우는 것도 시키지 않으실 정도로 없는 사람 취급했죠. 엄청난 차별이었습니다. “제가 할게요”라고 해도 본 척도 안 하셨으니까요. 서러움에 산 아래 집 한번 보고 멀리 AB방조제 공사현장 불빛 한번 번갈아 쳐다보고. 그렇게 울기도 참 많이 울었습니다.

정혜사에서 1년을 못 채운 어느 날 밤, 집에서 절로 들어올 당시와 같이 책과 옷 보따리만 들고 수덕사로 쫓겨났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영문도 모른 채 그렇게 된 거죠. 저는 또다시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와중에 제가 수덕사로 내려온 지 1년 정도 되는 날, 제 바로 위에 형님이 짐을 싸 들고 수덕사로 들어왔습니다. 서로 의지하며 생활했던 것 같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출가 후, 당시 정혜사에 계셨던 광덕사 노스님께 인사드리러 갈 기회가 있었어요. 스님께서 “너 수덕사로 왜 내려갔는지 아느냐?”고 하시더라고요. 미운털이 박혀서 쫓겨났다고 했더니 스님은 “그 당시에 너 밑으로 내려가지 않았으면 학교 못 다녔다”고 하시는 거예요. 스님께서 저의 딱한 사정을 아시고 수덕사로 빼내 주신 걸 그때야 알았습니다.

정경스님이 직접 드론으로 촬영한 간월암 풍경
정경스님이 직접 드론으로 촬영한 간월암 풍경

Q 스님께서는 학교 다닐 때도 혹시 승복을 입고 다니신 거예요?

저는 사복을 입었습니다. 머리도 안 깎았어요. 수덕사에 있으면서 중학교는 통학했고 홍성고등학교 시절에는 자취를 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잊지 못할 학창시절을 보냈죠. 1년 남겨둔 시점에서야 정신 차리고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하기 위해 공부다운 공부를 했었습니다. 당시 학력고사를 보면서 ‘잘 봤다’고 생각하며 교실을 나왔답니다. 그런데 학생마다 다 잘 봤다는 거예요. 발표 나기도 전에 ‘난 이미 틀렸구나!’ 생각하고 그길로 행자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2월에 하는 졸업식도 가지 못했어요.

(대학)떨어졌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너무 궁금한 거예요. 공중전화에서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이나 눌렀는지 몰라요. 누르곤 자신 없어 수화기 내려놓고, 또 누르고를 반복했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진짜 떨리는 마음으로 안 끊고 끝까지 들었단 거 아니에요. 그런데 세상에 팡파르가 나오는 거예요. 잘못 눌렀나 끊고서 다시 눌렀는데 또 팡파르가 나오는 거예요. 합격했다는 말을 두 번 세 번 확인했다니까요.

서울로 올라가기 전, 개심사 주지 선광 스님께서 “너 머리 깎지 말고 기르고 대학가라”는 거예요. 다른 스님들은 다 깎고 가라고 하시는데 그 스님만 유독 머리를 기르고 학교에 가라는 겁니다. 스님은 제게 “세속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을 수도 있다. 그러니 너는 머리 기르고 다니면서 살인만 빼고 다 해보며 살아라. 연애도 해보고, 돈도 벌어보고, 알바도 하고, 공부도 하고”라며 제 등을 떠미셨어요. 스님 말씀을 들고선 행자복을 벗고 머리를 기른 상태로 대학 생활을 했습니다.

Q 그럼 등록금은 어떻게 마련하셨고 수계는 언제 받은 거예요?

첫 해에 은사 스님이 사비로 등록금을 내주셨습니다. 그 당시 법장 스님이 수덕사 주지 스님일 때 그 모습을 보시고 “자식처럼 절에서 다 키웠는데 (절)학비를 대줘야지” 하시며 그때부터 절에서 자란 학생에게 대학등록금을 다 대주셨어요. 감사하게도 제가 첫 수혜자가 됐고요.

장학금 제도까지 잘 되어있어 저는 걱정 없이 대학을 다녔습니다. 심지어 방학 때 인사드리러 주지 스님을 뵈면 공부하느라 힘들다며 용돈을 통 크게 주시기도 하셨어요. 불사(佛事)도 잘하셨지만 공부하는 학인들에게는 지원을 팍팍 해주셨죠.

수계는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받았지요. 어찌 보면 전공을 100% 살린 거죠(웃음).

Q 살아오면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 추억들이 많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절에서 있었던 얘기들이죠. 당시 '전설의 고향'이 라는 프로그램이 인기였는데 수덕사에서 촬영을 한 적이 있었어요. 주인공이 아역 탤런트로 유명했던 이상아 씨였어요. 부엌에서 밥을 푸는데 누룽지 냄새가 얼마나 구수했던지 먹고 싶다고 하는 거예요. 당시 500원 지폐를 받고 몰래 팔았던 기억이 있어요. 그 당시는 용돈이 참 귀한 시절이었고 오직 자력갱생으로 살았잖아요.

배가 고파서 관광객들이 수곽에 소원을 빌며 돈을 던진 걸 밤에 몰래 잠수해서 긁어다가 과자를 사 먹기도 했어요. 불탁위에 올려진 지폐를 훔쳐 배를 채우기도 했고요. 다 지난 얘기니 추억으로 남았네요(웃음).

직지사에서 수계식을 받기 전날 있었던 일도 기억나요. 오후불식이라 저녁 공양을 하지 않아요. 더구나 오른쪽 무릎이 고장 난 상태로 힘들게 3,000배를 마쳤고요. 그러니 얼마나 배가 고프겠어요. 그때 화장실에서 직지사 행자가 제사 지낸 산자를 몰래 준거예요. 그것 한 조각 얻어 먹었다가 습의사 스님에게 들켜서 혼난 적이 있어요. 잠도 안 자고 천팔십 배를 또 했다니까요. 얼마나 서럽던지.

수계 받을 때는 각자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향해 마지막 삼배를 하거든요. 그때 가슴이 울컥하며 뜨거운 눈물이 나더군요. 긴 인고의 시간을 달려 드디어 큰 품에 안기는 듯했습니다.

간월암으로 오신 지 3년 되신 정경 스님, 스님이 건네주는 차는 시간을 잊을 만큼 담백한 맛이었다.
간월암으로 오신 지 3년 되신 정경 스님, 스님이 건네주는 차는 시간을 잊을 만큼 담백한 맛이었다.

Q 스님께선 9살에 절에 들어와 벌써 40여 년을 살고 계신다. 차가운 인상을 바꾸려고 거울까지 보면서 연습했다는데 사실입니까?

맞습니다. 인상 때문에 대학 다닐 때는 째려본다며 뒤통수를 맞기도 했어요. 너무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부드러운 인상을 만들려고 거울 보며 연습을 했죠. 사실 되돌아보면 절집 생활이란 게 자신을 한없이 다잡아야 하잖아요. 스스로 냉정해질 수밖에 없었던 거죠.

처음에는 적응하기 위해서, 중간에는 버티기 위해서, 나중에는 살기 위해서,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제 적응되니까 무표정이 가슴 깊이 들어와 버린 거예요. 또 절집 안에선 말 없는 것이 미덕이라 여겼었죠. 그러니 누가 먼저 물어보지 않는 한 먼저 말을 안 붙이는 거예요.

어쩌면 ‘냉정하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난다’는 걸 자랑으로 여겼던 시절이었습니다. 자연스러운 감정들을 억눌러놨던 거지요. 그게 절에서는 공부라고 생각했거든요.

15년 전쯤부터 제사 지낼 때 제주(祭主)들이 너무 슬프게 울면 염불을 하기 힘들 정도로 그 마음이 이입돼요. 사실 그 감정을 느끼는 게 정상이거든요. 그래도 염불을 해야 하니까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눈을 감아요. 목이 메어 소리가 잘 안 나오면 안 되잖아요. 그럴 때는 참느라 마른 눈물이 나오는 때도 있어요. 이게 바로 공감이었던 거죠.

처음에는 부끄럽게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마음이야말로 관세음보살 부처님의 동체대비의 마음이 아닌가 싶어요. 이거 깨달은 지가 얼마 안 됐으니 그동안은 거꾸로 살았던 거죠.

정경스님이 드론으로 찍은 간월암 풍경
정경 스님이 드론으로 찍은 간월암 풍경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종교가 무엇이건 상관없이 사람 사는 세상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아요. 또 인연이란 거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도 있잖아요. 예전에 절에서 종무 보셨던 분께 “출가하라”라고 권했던 적이 있었어요. 흥분해서 얼굴까지 벌게진 아가씨가 “내가 미쳤냐. 멀쩡한 나보고 출가하라고 하냐”는 말에 “아니 그럼 멀쩡한 사람이 출가하지 덜 떨어진 사람이 출가하냐”고 했었거든요(웃음).

그런데 10년 뒤 어느날 그 여자분이 동학사 비구니 스님으로 계시더라고요. 그러니 인연이란 것이 참으로 묘한 것이란걸 알게 되었답니다.

세상은 인연 따라가고 인연 따라오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니 오는 사람 친절하게 맞고, 가는 사람 다정히 보내주면 되지 않겠어요. 서로 만나 싸우고 헐뜯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즐겁고 행복한 일 있으면 서로 나누고, 화합하고, 감싸주고, 이해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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