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유형의 판소리문화와의 결합에는 미온적 ‘아쉬움’

【기획취재】3대 읍성과 연계된 지역유형의 판소리문화와의 결합①

순천 낙안읍성 전경(드론)
순천 낙안읍성 전경(드론)

본 취재는 순천 낙안읍성과 동편제, 고창읍성과 서편제, 그리고 서산 해미읍성과 중고제 판소리문화와의 결합을 통해 상호 시너지 창출. 나아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한 목적으로 시도되는 기획취재이다. 본지는 본 취재를 통해 해당 지자체간 행정적 공조 및 시민들이 세계유산에 대한 인식과 민간 단위의 전략적 제휴와 협력을 모색한다. - 편집자 주


읍성은 조선시대 지방의 작은 행정단위인 마을을 지키는 성으로 조선 세종 이후 집중적으로 세워졌다. 고을의 방어기지와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함께 감당했던 읍성은 무엇보다 조선시대 지방문화와 마을 구조의 성격을 잘 알려주는 소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그중 순천의 낙안읍성과 고창읍성, 그리고 서산 해미읍성은 본래의 형태가 가장 온전하게 전해지고 있는 국내 3대 읍성이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전역에 남아있는 옛 성은 무려 2천여 곳에 이른다고 한다. 이만하면 전 국토가 요새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어떤 면에서 성은 유난히 잦은 외침에 시달려야 했던 작은 나라가 택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지혜롭고 효과적인 방책이었을지도 모른다. 조선이 성곽의 나라라는 명성은 이런 과정에서 얻어졌다.

시대에 따라 다소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우리나라 성의 운영체계는 대체로 산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험준한 산 정상이나 허리를 따라 난공불락의 든든한 성을 쌓고 적이 침입하면 마을이나 도시, 심지어 왕궁까지도 버려두고 산성으로 들어가 적이 물러날 때까지 농성을 했다. 이런 방법은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는 나름 효과가 컸지만, 문제점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삶의 현장을 적에 내주어 초토화되었고, 작은 전투에도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지켜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반성을 바탕으로 성의 운영체계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경부터였다. 산이 아닌 평지, 정확히 말하자면 생업의 중심지에 성을 쌓았다. 성안에는 주요 관청 등 행정시설과 시장과 같은 생활 시설을 두어 늘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케 했다. 전시에는 방어시설이었지만, 평상시에는 마을의 중심가 노릇을 했다. 이러한 기능을 가진 성을 읍성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렇듯 많았던 읍성이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난리로 무너져 없어지기도 했고, 특히 국권침탈을 전후해 일제의 강압으로 대부분 헐려버렸다. 그나마 본래 모습이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는 있는 읍성은 부산의 동래읍성, 서산의 해미읍성, 고창의 고창읍성, 순천의 낙안읍성, 진도의 남도석성 등 몇 곳에 지나지 않는다.

이 중에서도 가장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읍성으로 현재까지 주민의 삶터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전라남도 순천에 있는 낙안읍성을 첫손에 꼽아야 할 것이다.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 동문 낙풍루(樂豊樓)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 동문 낙풍루(樂豊樓)

낙안읍성, 조선시대 마을 구조와 풍경 보여주는 읍성의 전형

인위적으로 조성된 민속촌(民俗村) 아닌 실제 사람들이 생활하는 마을

순천시 낙안읍성은 성벽의 보존 상태가 좋기도 하지만, 성안의 마을이 거의 옛 모습에 가깝게 살아있다는 것이 가장 돋보이는 점이다.

낙안읍성은 관광객들을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민속촌(民俗村)이 아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는 마을이다. 성안에 주민이 살고 있는, 국내 유일의 민속마을이다. 낙안읍성에는 3개 마을(동내리, 남내리, 서내리) 108가구 중 80여 호에 주민 250여 명이 주민들이 실제로 살고 있다. 가옥은 대부분 초가집이다.

낙안읍성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태조 때 낙안 출신의 무인 김빈길(金贇吉) 장군이 흙으로 쌓았던 것을 세종임금 때인 1424년 돌로 다시 쌓으면서 규모를 크게 넓혔다고 한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수리와 개축을 했다는 사실이 <조선왕조실록>, <대동지지>, <증보문헌비고>, <낙안읍지> 등 여러 기록에 남아 전하고 있다.

낙안읍성도 격동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많이 무너지고 본래의 모습을 잃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지난 1983년 성곽과 성안의 마을이 한꺼번에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면서 1990년대 초까지 대대적인 발굴과 보수작업을 통해 새롭게 거듭난다. 읍성의 가장 중요한 시설인 동헌과 내아, 객사와 누각 등이 이 시기에 복원되거나 건립되었다.

낙안읍성은 성 뒤쪽으로 멀찍이 솟아오른 해발 681m의 금전산을 주산으로 삼고 낮은 구릉을 살짝 끌어안은 평지에 펼쳐진 자그마한 성이다. 전체적인 모양은 남북이 짧고 동서가 긴 장방형에 가까운 타원형이다. 성벽의 둘레는 약 1.2km 정도이고 높이는 평균 4m 정도이다.

보통 읍성에는 동서남북 네 방향에 하나씩 모두 4곳의 문이 있는 것이 보통인데, 더러는 풍수적인 이유로 주산이 있는 북쪽에는 문을 두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낙안읍성이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옛 기록에도 낙안읍성에는 북문이 없고 동서남쪽에 3개의 문만 있었다고 전한다. 동문은 낙풍루(樂豊樓), 남문은 쌍청루(雙淸樓) 또는 진남루(鎭南樓)라고 했다. 서문은 낙추문(樂秋門)이다.

읍성의 정문은 보통 남문이지만 현재 낙안읍성은 동문인 낙풍루(樂豊樓)가 정문 역할을 하고 있다. 성벽을 휘감아 도는 해자를 건너 자 형태의 옹성을 통과해 낙풍루로 들어서면 읍성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낙풍루에서 가장 가까운 성벽에 오르면 성의 가장 중요한 방어와 공격 시설인 성가퀴와 치성을 볼 수 있다. 낙안읍성의 치성은 모두 4곳인데, 4곳 모두 동쪽 성벽에 모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4개의 치성 중 2곳은 벽 중간에 돌출되어 있고 나머지 2곳은 성곽의 좌우 모서리에 설치돼 있다. 성가퀴는 낙풍루 근처의 성벽 위에만 있어 이곳에서만 성가퀴의 구조를 살필 수 있다.

우선 주산이 있는 북쪽으로 행정관서인 동헌과 객사가 자리 잡고 있다. 왼쪽에는 동헌과 내아, 오른쪽으로는 객사가 있다. 객사는 읍성에서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인 만큼 본래는 홍살문외삼문내삼문객사마당의 동선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낙안읍성의 객사는 내삼문 하나와 객사만 복원되어 단출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객사 앞에는 전설의 주인공인 임경업 장군의 선정비각이 자리 잡고 있다.

고을 사또의 일터인 동헌과 거처인 내아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붙어있고, 그 앞으로는 누각인 낙민루가 서 있다. 읍성에서 누각은 관아의 부속 건물 중 하나로 내빈의 접대와 연회 등이 주요 기능이다. 낙민루는 헌종 연간 낙안군수로 부임한 민중헌이 중건했으나 이후 유실되었던 것을 1984년부터 시작된 보수공사에서 새롭게 복원했다.

객사와 동헌 앞으로는 동서와 남북으로 교차하는 열십자 형태의 길이 나 있다. 이 길은 동문과 서문, 남문과 북문을 이어주는 이른바 동서대로남북대로인데, 북문이 없는 낙안읍성에서는 관아와 객사 권역 앞에서 길이 끊겨 T자형 길을 이루고 있다. 두 길의 교차지점에는 시장이 있다. 본래는 오일장이었을 터이다. 그밖에 읍성 남쪽으로 옥사와 연못, 그리고 우물이 자리 잡고 있다.

지형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이런 정도가 조선시대 읍성의 전형적인 구조이다. 복원된 건물의 위치에 다소의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낙안읍성은 대체로 조선시대 읍성의 전형적인 구조를 충실히 보여주고 있다.

낙안읍성 성벽
낙안읍성 성벽

낙안읍성, 왜구·일군 침탈의 역사

근현대사 격변이 훑고 지나간 곳

낙안읍성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은 백제시대에 등장한다. 낙안읍성이 파지성(波知城)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백제시대 이전부터 낙안에는 성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외적의 침입이 빈번해 들판에 살 수가 없었다. 아마도 사는 곳 바깥에 돌무더기를 쌓아올리고 모여 살았을 것이다. 초기 군집사회(群集社會)였던 마한시대부터 성이 있었을 것이다.

낙안은 너른 들판이 있는 곳이면서도 해안에 가까운 곳이다. ‘살기 좋은 곳이다. 또 낙안은 순천과 보성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교통요충지. 살기 좋고 교통이 좋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지리·생활환경적인 측면만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역사의 잔혹사를 더듬어보면 그 반대다. 나는 것(農産物)이 많기에 탐관오리들의 수탈이 극심했다. 해안가에 가까운 곳이기에 왜구의 침탈이 끊이질 않았다.

고려 때 순천 쪽으로 상륙해 내륙으로 쳐들어간 왜구들은 어김없이 낙안을 통과했다. 낙안을 거쳐 곡성과 담양·장성(진원)으로 몰려가 약탈하고 사람을 죽였다. 호란(胡亂) 때는 북쪽에서 내려온 몽골군들이 낙안을 짓밟고 보성과 순천으로 진군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주 전투장은 전라도였다. 하동~광양~구례를 거쳐 남원을 점령한 일본군은 후에 순천에 성을 쌓고 그 일대를 통치했다. 낙안 사람들이 얼마나 시달렸을지를 가늠할 수 있다.

또 전쟁의 화마는 낙안을 비켜간 적이 없었다. 어김없이 낙안을 덮치곤 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도 낙안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다. 동학농민군은 수성군(관군)을 죽이고 낙안을 함락시켰다. 이때 순천 쪽 동학군과 보성 쪽 동학농민군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동학농민군들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은 낙안읍성 전투가 유일하다. 순천에 기반을 둔 김개남 휘하의 농민군들이 낙안과 보성에 너무 큰 피해를 끼치기에 낙안·보성농민군들이 맞서 싸운 것이다.

여기에 낙안 일대는 항일의병들이 일제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운 곳이기도 하다. 안규홍 의병부대는 19084월부터 190910월까지 16개월 동안 보성·순천을 중심으로 한 전남 중동부 지역에서 모두 26회의 전투를 치렀다. 안규홍 의병부대는 일본 순사와 군인, 일진회원 등 200여 명을 사살했다. 광양까지 활동범위를 넓혀 일본 어민들과 측량대를 습격하기도 했다. 보성은 그의 출생지이자 성장지였던 만큼 안규홍 의병부대의 중심활동지였다.

지금의 보성은 안규홍 의병부대가 활동할 당시 상당지역이 낙안군에 해당됐다. 일제는 벌교를 중심으로 한 낙안이 항일투쟁의 중심지가 되자 19081015일 칙령 제72호를 발효시켜 낙안군을 없애버렸다. 벌교·조성은 보성군에 예속시키고 나머지는 순천군으로 보내버렸다. 19세기 말까지 낙안군수는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겸했었다. 큰 고을이었던 낙안군은 일제의 민족혼 말살정책에 따라 순천군 낙안면이 돼버린 것이다.

일제는 조선을 병합한 후 조선총독부령 제1호를 통해 조선 역사의 상징인 관아와 성곽들을 헐어버리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하게 했다. 낙안객사는 낙안초등학교 건물로 사용해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다행히 헐리는 것은 면했다. 그러므로 1986년 학교를 이전하고 내부를 보수해 원형을 되찾을 수 있었다.

19193·1만세운동 당시에도 역사적으로 낙안이었던 곳에서는 독립만세운동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49일 순천군 낙안면 신기리 전평규 등이 벌교 장좌리 아래 시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다수의 장꾼들이 이에 호응하여 만세행렬을 이뤘다. 13일에는 낙안면 신기리의 유흥주 등에 의해 낙안읍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14일 벌교장에서 안규삼, 안규진, 안운수, 안상규 등이 두 차례에 걸쳐 만세시위를 펼쳤다.

19481019일에 발생한 여순사건은 낙안에도 피바람을 불러왔다. 지리산 빨치산들이 활발하게 움직인 곳도 낙안이다. 예전의 낙안군(樂安郡)은 지금 보성 벌교읍과 고흥 동강·대서면, 순천 외서면 등을 포함했다. 1908년 일제가 낙안군을 폐군시키면서 벌교·동강·대서·외서 등을 다른 군으로 넘겨버렸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주 무대로 등장하는 보성 벌교와 순천 외서는 그 뿌리가 낙안에 있다. 빨치산의 준동이 심했던 곳이니 그만큼 피아간의 살육이 극심했다. 6·25 전쟁 때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역사 속의 낙안은 수많은 외세의 외침에 백성들이 고통받던 곳이다. 평화로울 때에는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신음했던 곳이다. 낙안의 흑역사(黑歷史)는 잔인하고 처참하다. 지금 우리가 보는 관광지 낙안읍성은 평화롭기만 하다. 무엇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이 평화가 오래토록 지켜지지 않는다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낙안읍성 내 민가 초가집들
낙안읍성 내 민가 초가집들

볼거리에 치중하면 낙안읍성의 역사적 가치는 매몰된다

역사교육의 장, 무형문화의 뿌리를 잊지 말아야

지금의 낙안읍성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와 고려·조선시대 성안의 풍경과 백성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다. 재현돼 있는 것들은 관아풍경과 백성들의 일상생활이다. 그렇지만 왜구의 침탈을 막기 위해 낙안읍성이 본격적으로 쌓아지기 시작했으며 또 수많은 왜구와의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홍보나 안내가 부족하다.

낙안읍성은 이 나라를 외세에 지키기 위해 일어선 동학농민군들의 처절한 항쟁이 스며있는 곳이다. 일제의 조선 혼 말살 현장임에도 어떻게 낙안읍성이 파괴되고, 낙안군(樂安郡)이라는 충의의 고장이 없어져 버렸는지에 대한 설명도 생략돼 있다. 단순히 먹고 즐길 수 있는 관광지로서만 낙안읍성을 소개할 일이 아니다. 참담했던 과거의 역사를 알리고 그 안에서 교훈을 느끼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여기에 낙안읍성에서 삶을 살고 있는 주민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도 필요하다. 그들은 월급을 받고 볼거리를 제공하는 직업인이 아니다. 일반 시민과 똑같은 주민이며, 사생활을 보호 받을 권리가 있는 국민이다.

지속가능한 문화유산은 그만한 댓가와 노력을 통해서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유산이 관광객의 볼거리, 즐길거리에서 그친다면 상업적 놀이동산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낙안읍성 동문
낙안읍성 동문

<<< '순천시, 세계문화유산 등재 목표로 (가칭)한국읍성도시협의회 구성 계획' 편으로 이어집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서산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