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개포구를 드나들던 비단장수 이야기는 전설로 남아”

【가로림만 스토리텔링】가로림만 닷개포구②

닷개포구를 막은 중왕방조제(왕산방조제) 전경
닷개포구를 막은 중왕방조제(왕산방조제) 전경

 

지난 밤 비가 온 탓인지 봄 날씨가 쌀쌀하다. 하늘도 찌뿌둥하고 한 차례 비가 쏟아질 듯 무겁다. 그래도 가자. 팔봉면 대황리 가느실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름이 예쁘다. ‘은 골짜기()를 가리키는 옛말이었다. 요즘에는 골짜기를 이라고 부르지만, 옛날에는 이라고도 불렀다. 나중에 가느실 마을 이야기도 담아야 겠다.

검은 바위가 있어 흑석리라 불리었다는 흑석리 해안을 지나 해변을 따라 중왕저수지를 향해 걸었다. 인연도 기억이 나는 사람도 많은 닷개포구 가는 길. 중왕저수지 둑 길 따라 누가 심었는지 유채꽃이 만발해 지나는 이를 외롭지 않게 한다.

 

닷개포(구) 안내문
닷개포(구) 안내문

 

닷개포...서산시 지곡면 산성리 1126번지. 이곳은 닷개포가 위치했던 곳이다. 백제 웅진·사비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 중국으로 오가는 사신들과 무역을 하던 배들이 오가던 출입항지로 전해진다. 닷개포는 백제시대에는 기군(基郡), 통일신라에는 부성군에 속해 있었으며, 당시 행정중심지인 부성산성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부성산성이 있던 이곳 일대는 중국과 교통의 요지였고, 당대 최고 학자였던 고운 최치원 선생이 부성태수로 7년간 근무하였던 곳으로 이곳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중국과의 무역이 이 포구를 통하여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까지 이 닷개포를 통하여 중국과의 무역이 있었음을 1926년도 발간된 서산군지에 기록되어 있다.(1926년에 작성된 서산군지의 기록에는 죽포(닻개포)”로 기록되어 있다.- 필자)

예부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중국 비단장수들이 수없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1977년 지곡면 중왕리와 팔봉면 흑석리를 잇는 제방이 만들어지고 갯벌이 매립되어 육지가 되었다.

- 안내문 중에서

 

둑 옆에 홀로 서 있는 안내판은 낡아 서 있는 모습조차 위태롭다. 사람들에게 잊혀지면 그 존재도 사라진다고 했던가. 낡은 안내판이나마 남아 있지 않다면 이처럼 아름다운 해안가를 접하고 있는 가로림만 닷개포가 백제시대 사신교류와 교역의 관문이었다는 사실을 누가 알까.

 

서산시 지곡면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접하여 치리국국이었고, 백제시대에는 지육현, 신라시대에는 부성군에 예속된 지육현이었다. 진성여왕 갑인 7(894)에는 고운 최치원이 부성태수가 되어 다스린 곳이다. 1284년 고려 충렬왕 10년 부성군을 서산군으로 개칭 지군사로 승격시켰으나 1914년 대한제국 시대에 지곡면으로 격하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국 어디를 가나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행정구역이 변함이 없으니 소나무도 죽이는 칡넝쿨보다 질기다.

 

 

백제 무령왕과 중국 남조 양나라 무제의 인연

닷개포는 백제와 양나라 사신이 왕래했던 관문

 

백제의 해상교류의 관문으로 일컫던 닷개포()는 오늘날 중왕저수지로 변했다. 이 일대가 닷개포로 고증된 데에는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서산의 향토사학자이신 이은우 선생의 노력 덕분이다. 선생님은 서산지역 곳곳을 직접 발로 뛰며 서산의 지명사를 만들었다.

그 이은우 선생님이 오랜 세월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졌던 닷개포를 세상에 끄집어냈다. 어느 날 이은우 선생님은 시간이 있냐며 닷개포구를 가자고 했다. 어떨결에 따라 나선 곳이 이곳이었다.

지금은 간척으로 매워진 논들이 전부 바다였지. 맞은 편 산 아래까지 바닷물이 넘실댔으니 상상을 해봐. 얼마나 넓은 포구였는지. 여기가 웅진백제 때 중국을 오가는 관문이었어.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포구 마을에는 주막이 성황했고, 중국에서 들어 온 비단은 명천을 통해 한양으로, 보부상을 통해 정미시장을 비롯해서 전국 오일장으로 나갔지.”

잊혀져 가는 옛 지명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운 듯 선생님은 두 손을 불끈 쥐며 열변을 토했다.

노을이 지면 닷개포구에는 크고 작은 상선들이 정박을 하고 주막마다 등불이 걸리고 뱃사람들을 맞이하는 여인네들의 노랫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바다를 막은 방조제 제방 길이만 1,270m나 되니 선생님 말씀이 아니라도 포구 안으로 정박했을 황포돛대 등 수 많은 배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렇다면 역사 속 백제와 중국의 해상을 통한 교류는 어떠했을까.

인근 서산 지곡면 무장3리에서는 분청사기요지’, ‘개원통보원풍통보등 중국 유물이 출토된 적이 있다. 이 외진 바닷가 마을에 중국 황실이나 귀족들이 사용하던 유물이라니...상식적인 생각으로 닷개포구는 중국 문물의 유입지였음을 반증하는 일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백제와 중국의 관계를 시대별로 보면 중국 남북조 시대 강남에 건국된 남조의 3번째 왕조로 양(, 502~557)나라가 있었다. 백제의 웅진시대(475~538) 및 사비시대(538~660)와 그 시기를 같이 한다.

기록에 나타 난 웅진시대(475~538)의 대 중국 교류는 476년 송나라와 외교를 시작으로 534년 양나라와의 외교에 이르기까지 모두 21회나 전개되었다. 한성백제가 무너지며 한강유역을 빼앗긴 백제가 웅진, 사비시대 대중국 교류를 어느 곳을 통해서 했던 것일까.

당시 목선 수준의 선박이나 항해 기술상 바다항로는 연안을 따라 항해할 수 밖에 없었던 때였다. 한반도 해안을 따라 중국으로 연안항해를 했었다. 한강이남으로 밀린 백제로는 닷개포구가 중국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지점이었다. 초기에는 고구려의 방해가 있었지만 백제 무령왕은 이를 극복해 나갔다.

 

양직공도
양직공도
양직공도에 그려진 백제 사신의 모습
양직공도에 그려진 백제 사신의 모습

 

양직공도(梁職貢圖)로 밝혀진 백제 사신의 모습

닷개포구는 6세기 해상강국 백제의 관문

 

당시 닷개포구를 떠나 양나라로 갔던 백제사신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양 나라에서 고대 백제인을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양직공도(梁職貢圖). 양직공도는 6세기 동아시아 최강국 양()나라에 조공 온 외국 사신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은 관직에 임명된 인물은 요즘 증명사진 찍듯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러한 관례가 외국 사신에게도 적용되어 양직공도가 탄생하였다. 양직공도는 양나라의 세자이자 화가였던 소역(蕭繹)이 그렸다. 현재 원본은 사라지고 없으며 모사본만 세 종류가 있다.

양직공도 중 가장 사료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는 남경박물관 소장본에는 원래 25개국 이상의 사신이 그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12개국 사신 그림만이 남아 있다. 12개국 사신의 국가명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활국(滑國:아프가니스탄), 파사국(波斯國:페르시아), 백제(百濟), 구자국(龜玆國:중국 신강성 주변 국가), 왜국(倭國:일본), 탕창국(宕昌國:감숙성 주변 국가), 낭아수국(狼牙修國:말레이반도 국가), 등지국(鄧至國:감숙성 주변 국가), 주고가국(周古柯國:아프가니스탄 주변 국가), 가발단국(呵跋檀國:아프가니스탄 주변 국가), 호밀단국(胡密丹國:아프가니스탄 주변 국가), 백제국(白題國: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 중간 국가), 말국(末國:서역 36국 중 하나)이다.

시기적으로 양직공도 속 백제 사신은 웅진시대 무령왕이 파견한 사신으로 추정되니 곧 닷개포구를 통한 항해였을 것이다. 문화교류는 절정에 달했다. 예를 들어 무령왕릉은 양나라 왕실 무덤인 아치형 전축분을 본 따 조성한 벽돌무덤이다. 실제로 무령왕릉에서는 梁官瓦爲師矣(양나라 관청 벽돌을 모범으로 삼았다)”라는 글자를 새긴 벽돌이 발견되었고, 양나라 왕실 무덤에서만 발견되는 유물도 다량 출토되어 당시 양나라와 백제의 긴밀한 관계를 입증하고 있다.

흥미 있는 사실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백제가 일본과 신라보다 위상이 높았음을 양직공도가 증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양직공도 속 왜국 사신은 천으로 대충 감싼 남루한 옷차림에 맨발을 하고 있어 세련되고 품격있는 백제 사신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난다. 또 왜국 사신은 백제 사신 뒤에 그려져 있다. 신라와 고구려 사신 역시 백제 사신 뒤에 보인다. 특히 백제 사신은 그림 맨 앞의 양나라 황제 바로 뒤 페르시아 사신 다음에 그려져 있다. 이는 당시 백제가 페르시아와 함께 6세기 동아시아 패권국가 양나라의 핵심 교역국이었음을 보여준다. 양직공도를 통해 닷개포구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짐작을 할 수 있는 추리이다.

하지만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은 서기 538년에 웅진을 뒤로하고 수도를 사비(부여)로 옮기게 된다. 성왕은 세계적인 해양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늪지대였던 사비를 계획도시로 건설하고 서해를 향해 흐르는 백마강을 통해 국제해상왕국의 꿈을 이어 나갔다.

오늘 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구드래 나루터는 옛날 사비백제의 관문 역할과 백제의 대표 무역항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지금은 백마강을 타고 낙화암을 지나 고란사를 왕복하는 유람선과 둔치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처럼 닷개포구는 6세기 무령왕의 해상왕국 건설을 위한 꿈이었으며, 아들 성왕이 해상강국 사비백제를 이루게 하는 발판이 되었다. 수백만 년을 변함없이 지켜보고 있는 닷개포구 입구의 바위산들. 그들이 노래하는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동남아 국제항으로서의 닷개포구에 얽힌 희노애락을 들을수 있으련만.......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서산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