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방울로 골프연습했던 청년이 프로골프계 전설이 되다!

최한필 프로(서산 로얄골프클럽)
최한필 골프 프로

어둠이 짙어질수록 별들은 더 아름답다. 밤이 있기에 새벽이 오고 밤이 있기에 우리는 찬란한 아침을 맞이한다. 서산에서 최프로라는 닉네임을 달고 바쁜 걸음을 옮긴 최한필 프로에게 지나온 골프 외길 40년은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시간이었다.

창가에 비치는 햇살이 포근했던 지난 15,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그간의 긴 이야기를 나눴다. 때론 감정에 복받쳐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고 때론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이다.

많은 일들을 거쳐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다. 깜짝깜짝 놀라는 것은 협회장배 대회에 나가면 회원들이 프로골프계 전설이라고 놀린다. 전설은 잊혀져 간다는 증건데 살짝 아쉽다.”

40년 골프 역사가 세월 속에 묻혀가지 않기 위해 최 프로를 만난 날 그는 우리 세대가 골프계의 전환점이라며 씽긋 웃었다.

그때는 골프공 공급기가 없던 시절이라 연습장마다 기계가 하는 일을 대신 해주기 위해 캐디들이 있었다. 지금 애들에게 이런 얘길 하면 호랑이 담배 피던 얘기라며 흘려들을 것이다.”

최한필 프로의 골프 얘기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Q 어떻게 골프에 입문하게 됐나?

골프의 골자도 몰랐다. 그냥 운동을 늘 좋아했던 것 같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100달리기 선수를 했고, 중학교 시절에는 축구를 했다. 실력이 출중했으면 스카우트됐겠지만 그 정도로 또 잘하진 못했던 것 같다.

경찰이셨던 아버지는 아들이 운동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셨고 그러다 보니 자연 선수 생활과는 점점 멀어지면서 고등학교 진학을 했다.

가만 보면 주로 삶의 변화에는 동네 형이 끼어 있었다. 나도 그랬다. 1 때였나 여름방학이 되자 동네 형이 낚시가방 같은 걸 차에 실으며 나를 데리고 의정부에 있는 로얄골프장으로 갔다. 그렇게 큰 클럽하우스는 처음 봤다.

그것이 그 형의 프로테스트 연습라운딩 1일 캐디로 따라가게 된 것이다. 한창 먹성 좋은 나로서는 새로운 신세계를 구경하는데다 밥까지 사준다니 그야말로 횡재를 했던 날이었다. 손수레 카트를 끌고 형을 졸졸 따라다녔다. 처음 본 광활한 잔디밭, 더 넓은 자연과 신선한 공기, 멋진 복장에 여기저기 환호성들. 그 모든 것들이 어린 나로서는 정말 기막히는 일들이었다.

그동안은 늘 호루라기를 불며 잔디 밟지 마라란 소리만 듣다가 막상 최고로 잘 꾸며진 잔디를 마음껏 밟고 간다는 것은 짜릿함의 극치였다. 거기다 1번 홀에 볼을 놓고 드라이브로 작은 공을 때리는데 비행기처럼 어찌나 멀리 날아가던지 숨이 콱콱 막혔다.

18홀까지 도는 내내 작은 구멍에 공을 넣는 모습이라니... 멍하니 형을 바라보자 내 마음을 읽었는지 형이 한번 쳐보라고 했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헛스윙 다섯 번 만에 드디어 그린 홀 위에 내가 친 공이 딱 올라서는 걸 눈으로 목격했다.

, 내가 쳐도 되는구나란 걸 느끼는 그날의 환희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셨다. ‘야 이거다. 골프를 한번 해보자그날로부터 내 꿈은 다시 골프로 바뀌어 버렸다. 세상 죽어도 그 작은 공을 푸른 잔디밭 위에서 칠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자녀들에게만은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갈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했던 최 프로(연습장 초창기 막내딸의 스윙 연습 장면
자녀들에게만은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갈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했던 최 프로(연습장 초창기 막내딸의 스윙 연습 장면

Q 운동하는 걸 반대하는 아버님을 어떻게 설득했나?

아버지야 당연히 그만두라고 하셨다. 하지만 자려고 누워있으면 천정에 골프공이 왔다 갔다 하는데 어떻게 그만둘 수가 있겠나. 6개월을 싸웠지만 아버지는 골프 하면 밥 못 먹고 산다는 이유로 미동도 하지 않으셨고, 나는 결국 어머니를 달달 볶아 허락을 받아냈다. 그때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날부터 나의 골프 연습은 시작되었다. 수업이 끝나면 연습장으로 직행해 새벽까지 맹연습을 했다. 장갑이 없어서 손님이 쓰다 버린 것을 주워서 꼈고, 그마저도 찢어지면 손가락을 잘라 구멍 난 곳을 돼지접착제로 붙여서 사용했다.

당시 비싼 골프신발은 그림의 떡이었다. 누가 버린 신발을 찾으면 그날은 횡재하는 날이었다. 그놈을 들고 구둣방으로 달려가 수리해서 신고 또 신었다.

60년대 가난한 골프 연습생들은 대부분 이랬다. 어디 그뿐이겠나. 비싼 라운딩을 나갈 수 없어 산에 떨어진 솔방울을 주워 깔아 놓고 볼이라 생각하며 쳤다. 지금도 후회되는 것은 사부님이 물려준 골프채를 가보로 간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땅에서 연습했으면 낡아질 대로 낡아져서 한쪽 끝이 뭉그러졌겠는가.

늦은 밤까지 주니어들의 레슨으로 시간가는 줄 몰랐던 최 프로
늦은 밤까지 주니어들의 레슨으로 시간가는 줄 몰랐던 최 프로

Q 서산으로 내려오게 된 계기와 음암면에서 골프 연습장을 오픈하게 된 이유가 있나?

물론이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산으로 내려온 건 1993년이었다. 연습장 후배가 아는 분이 골프 연습장을 오픈하는데 프로를 구해달라고 한다는 말에 바로 코흘리개 두 아이와 집사람을 데리고 내려왔다. 그곳이 바로 서산 가야골프연습장이었다.

서울에서 살다 내려와 보니 서산은 그 당시만 해도 아무것도 없는 이른바 깡촌이었다. 10년가량 서산에서 근무하곤 아이들 중학교도 그렇고 해서 다시 서울로 올라가려고 가족들을 미리 올려보냈다. 그때였다. 그만두는 나를 붙잡은 것은.

지금 가봐야 기다려주는 사람도 없고, 또 그곳에서 뭐할 거냐가지 말고 여기서 연습장을 오픈하라고 친분이 두터운 회원들이 말렸다. 나는 상도의에 어긋난다며 거절했지만, 당시 모시고 계시던 사장님께서 허락하는 바람에 서산에서 정착하게 된 이유였다.

2003년 조립식 건물에서 주니어 골프연습생 다섯 명을 가르쳤다. 그 아이들에게 더 좋은 환경에서 연습할 수 있도록 서산시 음암면 석동로 99번지에 땅을 매입하고 로얄골프클럽을 오픈했다. 집사람에게 말했다. “여기는 시내와도 좀 떨어진 외곽이니 사람이 많이 안 올 거다. 아이들만이라도 잘 키워서 세상에 내보내자.”

불행인지 다행인지 주변 분들이 어떻게 얘기를 듣고 한두 두분이 오시더니 손님들이 차츰차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꿈나무를 육성하고 대신 일반인들을 위해서는 선생을 구해주려 노력했지만 결국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아이들을 떠나 보냈고 나는 성인부만 가르치게 됐다.

막내딸이자 제자였던 최희은 양의 필드 레슨
막내딸이자 제자였던 최희은 양의 필드 레슨

Q LPGA에서 뛰고 있는 양희영 선수 사부가 바로 최 프로님이시란 소리를 들었는데?

맞다. 꿈나무를 육성할 때 서산시 동문동에서 살았던 초등학교 4학년 양희영 선수도 있었다. 6학년때까지 가르쳤는데 힘이 대단했다. 그때 이미 대단한 선수가 될 것이란 걸 어렴풋이 느낄수 있었다. 그러다 희영이가 중학교 진학을 하면서 서울로 떠났다. 당시에는 서산 시내 대부분 학교에서 골프를 하기 위해 시간을 배려하는 학교가 없었다. 어쩔수 없이 양 선수 아버지는 딸의 장래를 위해 서울로 올라가셨다. 두 부녀를 떠나보내면서 참 마음이 아팠다.

사람마다 소질이 있을 텐데 그것을 개발하지 못하고 사장한다는 것은 국가 장래를 위해서도 아니란 생각을 했다. 천편일률적인 주입식 수업만을 강요하는 교육이 참교육인가!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합숙 훈련을 하며 가르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아까운 아이들을 타 도시로 떠나보내지 말고 내가 주니어를 양성해보자는 마음으로 라운딩 나가는 게 힘들어 아이들을 몽산포에 데려가 연습을 시키곤 했다.

딱딱한 모래사장에 거리 표시 나무를 박아 놓고, 채로 치고 나가고, 다시 치고 나가고 했다. 때론 몽대백사장에서도 연습을 시키곤 했는데 의외로 그런 방법들이 아이들 정서에도 참 좋았던 것 같다.

그 후에는 합숙훈련을 시키고자 고풍저수지 근처 운산초등학교 영락분교가 폐교란 걸 알고 그곳을 찾아가 의사타진도 했다. 당시 그곳을 담당하고 계시던 분과 이장님께서도 취지를 듣곤 승낙을 해줬다. 나는 일사천리로 골프연습공간을 만들기 위해 지인들의 도움으로 전봇대를 박고, 망을 씌우고, 전기공사를 했다.

하지만 다 된 줄 알았던 승낙은 동네 주민들의 결사반대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고 아이들의 부푼 꿈과 나의 꿈은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해 버렸다. 나는 그 일 이후로 큰소리가 들려오거나 과격한 모습을 보면 굉장히 무서워하는 어떤 트라우마가 있다.

로얄골프동호회 임원 단합대회
로얄골프동호회 임원 단합대회

Q 한때 음암초등학교 방과후 골프가 인기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혹시 가르치게 된 계기라도 있었나?

우리 골프 연습장에는 로얄골프동호회가 있다. 버디를 하면 만 원씩 기부하는데 50만 원이 모였고, 우리는 그것을 가까운 음암초에 장학금으로 전달하자라는 의견에 따라 돈을 들고 학교를 방문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애들을 가르치셨던 선생님이 교감 선생님으로 와 계신게 아닌가. 그때 얘기가 돼서 무료로 학생 10명을 데리고 우리 연습장 2층에서 방과후 지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고, 이듬해 교장 선생님이 바뀌면서 아쉽게도 없어져 버렸다.

사실 내 꿈은 재능있는 학생들을 한 조로 만들어 주니어골프선수권대회에 내보내는 것이었다. 티셔츠에 서산시 음암초등학교라는 마크를 붙이고 나가면 대한민국 속에 서산시 음암면이 널리 알려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비록 시골이지만 어쩌면 골프학교로 유명세를 타지 않을까 하고.

더 이상 희영이처럼 재능있는 학생들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외부로 나가지 않아도 충분히 골프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게 어떻게 흐지부지 없어져 버렸다. 지금도 그 꿈은 변함이 없다. 시설에서 자라는 아이 중에서 재능있는 아이가 있다면 골프를 가르쳐주고 싶다. 그 아이들에게는 우리 어른들이 조금만 도와줘도 골프로 성공해보겠다는 어떤 희망같은게 생기지 않을까.

골프를 지도하고 있는 최한필 프로
골프를 지도하고 있는 최한필 프로

Q 태풍 곤파스 당시 골프연습장들이 굉장히 힘들었다고 들었다. 혹시 어땠나?

그때를 되돌아보면 지금도 울컥울컥 눈물이 흐른다.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날아가서 일어설 힘조차 없었는데 주위 분들 도움으로 무사히 극복할 수 있었다.

사실 로얄골프클럽을 오픈할 때 내 수중에는 땅 살 돈밖에 가진 것이 없었다. 대출을 받고, 빚을 내고, 그도 모자라 평소 챙겨주시던 형님에게 할부로 갚는 조건으로 망공사 등을 부탁했고, 정말 나는 열심히 운영을 해나가고 있던 중이었다.

어느날 태풍 곤파스가 터졌다. 탑만 멀쩡하고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그리곤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살아야 할 의욕도, 먹어야 할 생각도 없었다. 그냥 머리 싸매고 누워 한없는 실의에 빠져있었다. 하늘이 나를 버렸나 싶어 억울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방에 누워있는데 아는 형님이 한필이 어딨냐라며 나를 찾아왔다. 그때 나의 몰골을 본 형님은 다짜고짜 들어와 내 멱살을 잡아 일으키며 쌍욕과 동시에 수습해야지 니가 누워있으면 애들과 집사람은 어떡할 거냐!”당장 일어나라고 고함을 질렀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며 눈물을 쏙 빼게 호통을 쳤다.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형님과 함께 주변을 정리하고 같이 청소를 하고 바람에 날려 들어온 나무 등을 톱으로 잘랐다. 그 당시 그 형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도 자포자기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나는 우리 애들에게 말한다. “사람은 자기보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다. 다 귀하다. 이 사람들이 훗날 너희에게 어떻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지 모른다. 그러니 절대 하대(下待)하지 말아라고 한다. 나도 살면서 여러 번의 경험이 있었기에 사람 귀함은 늘 강조하는 말이다.

'서산 골프계의 전설'로 통하는 최한필 프로
'서산 골프계의 전설'로 통하는 최한필 프로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내겐 바램이 하나 있다. 사라져가는 전통골프를 계승·발전하는 것이다. 골프가 대중화되면서 차츰차츰 전통이 사라져가는 것 같아 늘 아쉽다고 생각했다. 골프가 대중화되고 성장하는 건 상당히 좋다. 그런데 기본적인 규칙과 에티켓도 함께 성장하고 지켜나갔으면 좋겠다.

나는 손님들에게 그런다. “사장님, 젊었을 때는 이렇게 슬리퍼 끌고 오고, 츄리닝 복장으로 와도 좋다. 하지만 나이가 60, 70, 80이 되면서 젊은이들처럼 슬리퍼 끌고 반바지 입고 (골프)치러 오신다면 사장님 마음이 어떨 것 같냐? 그러면 일단은 사장님이 그곳에 가기 싫어질 것이다. 그것은 곧 사장님이 피해를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앞으로 기본 골프 규칙과 예절을 가르쳐 주며 로얄골프클럽과 함께 나이들어 갈 것이다. 더불어 서산에서 받은 만큼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주니어골프선수들을 키워내는 골프 프로가 되기 위해 남은 힘을 쏟고 싶다.

 

 

 

 

 

 

 

저작권자 © 서산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