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역사의 길에 ‘바로(Barraux, 1903~1946)신부’가 계신다
고종 18년(1881년) ‘두세(Doucet, 1853~1917)신부’가 서산 소길리(현재 팡봉면 금학리) 일대에서 전교를 시작으로 서산지역에 천주교가 시작되었다.
서산지역 첫 본당은 구항면 공리(지금의 홍성)의 ‘수곡성당’으로 초대 본당 신부로 ‘폴리(Polly, 1884~1950)신부’가 부임했다. 그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징집되어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그로부터 5년 후 1919년 전쟁이 종전되자 제4대 본당 신부로 재부임하며 팔봉 금학리 본당을 맡게 됐다.
그러나 금학리 본당은 내포지역을 관할하는 본당으로는 너무 외진 곳에 치우쳐 있는 등 여러 이유로 폴리 신부는 본당 이전 계획을 세우고, 상홍리에 새로운 본당을 세우기로 한다. 마침내 1921년 3월, 상홍리에 한옥 목조양식의 성당과 함께 사제관이 완공되면서 금학리에서 상홍리로 본당을 옮기게 된다.
당시 상홍리 본당은 서산, 홍성, 예산지역을 관할하였고, 소속 공소는 18개, 총 신자수는 1,805명으로 상홍리 본당 신자는 118명이었다.
그후 1932년 7월 제6대 본당 신부로 ‘바로(Barraux, 1903~1946)신부’가 부임하게 된다. 그가 ‘해미순교성지’를 세상에 알린 신부다. 또 바로 신부는 1937년 10월 5일에 현재의 동문동으로 본당을 이전, 동문동 시대를 열었다. 동문동 성당에서는 ‘바로 신부’을 기억하고자, 2007년 7월 29일에 십자가의 길 동산을 조성하여 본당 뒷동산에 ‘바로(Barraux) 동산’을 만들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종 3년(1866년)에 시작된 천주교 탄압은 병인양요 이후에 더욱 극심했으며, 해미읍성 내 감옥에서는 짚으로 엮은 줄로 신자들을 때려 죽이는 ‘잘개질’, 해미읍성 서문 밖에서는 ‘참수’, ‘교수’ 등으로 신자들을 처형하였고, 해미 조산리에서는 교수하거나 생매장까지 자행되었다. 기록에 남은 자는 197명이지만 무명의 순교자는 2000여 명에 달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1935년 상홍리 본당에 부임한 ‘바로 신부’는 처참하게 죽어갔던 신자들의 처형 현장을 직접 목격한 ‘박승익(당시 17세)’, ‘이주필(당시 18세)’를 수소문 끝에 만나게 된다. ‘바로 신부’는 이들의 증언에 따라 해미 조산리 생매장 터를 발굴하여 10여 구의 유해를 수습하였고, 상홍리 성당 뒷산에 안장하였다.
그 후 1982년 해미에 순교비가 세워지고, 1985년 순교자의 유해를 본래의 자리로 옮기기로 결정, 1995년 9월 20일에 지금의 해미성지 순교탑 아래에 유해를 안장하게 됐다.
이처럼 상홍리 공소는 ‘순교자현양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며, 로마교황청의 해미국제성지 선정이라는 그 역사의 길에 ‘바로(Barraux, 1903~1946)신부’가 계신다.
독특하고 아름다운 건축양식으로 이름 난 상홍리 공소. 문화재청에서는 2007년 7월 3일, 등록문화재 제338호로 지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