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오줌통을 차고 놀던 소년이 대한민국 족구계의 전설이 되기까지

살아있는 족구 전설 족구해설가 곽춘선 선수
살아있는 족구 전설 족구해설가 곽춘선 선수

백수 시절 막다른 벽에 몰려 고민하고 있을 때 동네 형은 제게 신의 한 수였습니다. ‘기아자동차에 입사해라며 내밀었던 것이 백수 딱지를 던져 버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요.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없었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었기에 입사하고부터 1년 동안은 업무처리에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아주 단단하고 강하게 일머리를 키웠지요. 그리고 어느 정도 회사에 적응되던 찰나에 만난 것이 족구였습니다.

내게 맞는 또 다른 길이 족구인가?’ 생각할 정도로 제 인생 전체를 흔들어 놓았지요. 작은 공 하나가 저의 앞길을 이렇게 바꾸리라곤 어찌 감히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젊은 날, 족구에 대한 숱한 고민과 불면의 밤들이 모여 결국 쾌적대를 확장시키게 되었고, 또 그로 인해 살아있음의 환희도 느꼈습니다.”

대한민국 족구계에 큰 획을 그었던 그 이름 석 자 곽춘선. 기아자동차 족구팀원이자 현대파워텍 족구팀원이었던 그를 하늘 말간 지난 4일에 만났다.

족구 해설가 곽춘선 씨(오른쪽)
족구 해설가 곽춘선 선수(오른쪽)

Q TV에서 족구 해설을 아주 멋지게 하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봤다. 그 분이 서산에 살고 있는 줄 몰랐다. 서산이 고향인가?

직장 때문에 서산으로 왔지 고향은 안성이다. 고향 얘기가 나왔으니 어린시절 얘기를 좀 들려주고 싶다. 나는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해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핸드볼 선수 생활을 했다. 그때는 공이 굉장히 귀했다. 오죽했으면 형들과 함께 턱을 괴고 앉아 돼지 잡는 아저씨들 손만 바라보고 있었을까. 축구공을 대신할 돼지 오줌통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 속에 물을 넣고 끝을 단단히 묶으면 그게 바로 축구공이 됐다.

우리에게도 드디어 행운의 여신이 찾아왔다. 유학 간 동네 형이 축구공을 사 왔는데 운동신경이 남들보다 1%는 좋았던 나는 동네 형들의 암묵적인 허락 하에 귀하디귀한 축구공을 마음껏 찰 수 있었다. 안성천 모래사장에서 맨발로 축구시합을 했던 우리, 힘이 들면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끓여 먹기도 했던 추억은 두고두고 행복하다.

그 당시, 꼬꼬마 같았던 나였지만 나름 꿈도 원대했다. 핸드볼 선수가 되어 세계를 누비는 것이었는데 아쉽게도 교내 핸드볼부가 사라지면서 내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막상 상급학교 진학에 제동이 걸렸다. 차선책으로 악기 다루는 것은 공부보다는 몇 백 배나 재밌고 멋졌기에 밴드부가 있는 평택공고에 들어갔고 나는 그곳에서 튜바(tuba)라는 악기를 다뤘다. 오케스트라나 취주악에서 가장 낮은음 넓이를 담당하는 금관악기인 튜바때문에 군대에서도 경찰군악대에 배치되었다. 군대에서 내 인생을 바꿀 또 다른 운동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이 지금의 나를 바로 세워 준 족구였다.

수비수였던 나와 궁합이 잘 맞았던 족구는 내 군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라는 말이 있듯 어느 순간 군대도 끝이 났고 의외로 나는 이제 누구랑 족구 하지?’라는 생각에 약간은 서운해 하기도 했다.

학교 동문들을 모아 족구팀을 만든 곽춘선 씨
학교 동문들을 모아 사내 족구팀을 결성한 곽춘선 선수

Q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러면 족구로 유명세를 날렸던 기아자동차에 입사하게 된 얘기와 족구팀을 창단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가난한 부모님 밑에서 막내로 자랐다. 집안이 가난하다 보니 제대와 동시에 더는 음악도 족구도 사치라 생각하고 손을 놓고 있다 뭘 해서 먹고 살까!’에 심오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만난 것이 포장마차였고, 또 김밥 장사, 수염을 기르곤 도자기를 굽는 도공 등 다양한 직업도 선택했었다.

확실하게 내 것을 하지 못하고 근 2년을 취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즈음, 옆집 형으로부터 기아자동차에 취직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때가 19891010일 청명한 가을이었다.

기아자동차는 그 당시만 하더라도 내겐 꿈같은 회사였다. 운 좋게도 입사를 했고 이런 막내아들을 보며 부모님은 장가가는 데는 이제 한시름 놨다며 백수 청산에 한숨을 돌렸다.

1년이란 시간 동안 회사 업무에 내공이 쌓일 정도로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2년 차, 나는 그제야 여느 미생들처럼 점심시간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틈이 생겼다. 그 시간에 나는 동료들과 족구를 즐겼다. 내 속에 군 시절 접했던 족구에 대한 강한 미련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것을 알았다. 

좀 더 체계적으로 접해보고자 동문들을 모아 기아자동차 족구동호회 창단을 했다. 초보 족구 선수들로 구성했지만, 자타공인 대단한 소질들의 팀원들이었다. 사내에서는 절대 적수가 없을 정도로 음료수 내기 족구 최강자가 됐다.

"펄펄 날아다녔다"는 곽춘선 씨
"펄펄 날아다녔다"는 곽춘선 선수

Q 당시 기아자동차 하면 족구를 떠올릴 정도로 대단한 파워를 자랑했다. 승승장구했지만 이면에는 뼈아픈 쓰라림도 있었을 텐데.

물론이다. 처절하게 피눈물 흘렸던 시간이 있었기에 최강이 될 수 있었다. 창단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우리 팀은 평택 YMCA에서 개최하는 족구대회에 자신만만하게 출전했고 뜻하지 않게 무참히 패배를 당했다. ‘역시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당시 팀원들의 상실감은 극에 다다랐고, 패배의 아픔을 안주 삼아 우리는 애꿎은 싸구려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 콧물을 찍어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우리도 할 수 있다”, “엄마 뱃속부터 족구 배워서 나온 거 아니다”, “실패는 있어도 좌절은 없다”, “다시 한번 해보자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슴에 날을 세웠다. 우리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눈에 불을 켜고 족구 연습에 몰입했다.

선수들 모두는 눈을 감으면 천장에 공이 투영될 정도로 족구에 미쳐있었다. ‘어떻게 하면 족구를 잘할 수 있을까? 자세는? 부상방지는? 실력은? 팀 호흡은? 실력 향상 방법은?’ 등 수많은 소통과 연습으로 우리의 실력은 조금씩 향상됐다.

상대팀 경기의 비디오 분석은 물론, 출퇴근하면서 나무를 앞에 두고 피나는 연습을 하기도 했던 그 시절, 오죽하면 세터는 하루에 300개 이상 토스를 해야 잠이 온다는 얘기를 했을까. 선수들과 소주를 마시다가도 족구 얘기만 나오면 밤을 새웠고, 그것도 모자라 자동차 라이트를 켜 놓고 경기를 하곤 했다.

그렇게 연습에 연습을 하다 보니 개인기와 기본기가 탄탄하게 다져졌다. 그것이 바탕이 되어 선수들 간에 호흡과 경기력이 살아나는 결과로 이어졌다.

Q 선수들의 기량 증가로 우승을 연달아 차지하게 됐다.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다.

얘기하면서도 그 당시 일들이 다시 생각나 가슴이 벅차다. 기아자동차 창단 1년 만에 우리 팀은 평택시 관내 대회는 모두 가볍게 석권했다. 창단 3년 만에 경기도지사기, 창단 4년 만에 전국대회에 처녀 출전하여 전국을 제패하는 쾌거로 이어졌다. 이것이 훗날 전국 최고의 명문팀으로 불리는 전설의 현대파워텍 최강부 족구팀 탄생의 발판이 됐다.

19946월부터 우리는 드디어 파란을 일으키는 진정한 강자가 됐다. ‘한강사랑 전국족구대회가 열리던 날, 전국에서 내놓으라 하는 400여 개의 팀이 서울 반포지구 고수부지에 운집했다. 지금처럼 실력에 따라 부서가 나누어져 있던 시절이 아니므로 전국에서 출전한 팀들이 전부 조를 나누어 실력을 겨루게 되는 방식으로 대회가 진행됐다.

기아자동차 족구팀은 창단 후 첫 전국대회에 출전하게 되어 떨리는 가슴으로 경기에 임했다. 조별 리그를 거쳐 당당히 본선 토너먼트에 진출하게 됐고, 우리는 우수팀들을 차례로 제패하며 불꽃 튀는 대결 끝에 세트 스코어 32로 대망의 우승컵을 거머쥐게 됐다. ‘처녀 출전 전국 제패 기아자동차 족구팀!’이 전국에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우승을 마치고 돌아오니 방송국에서 인터뷰가 이어졌다. 우승 대가로 그해 국가대표 자격 태극마크를 달고 우리는 호주에 파견되어 족구의 우수성을 알리는 홍보활동을 했다.

기아자동차 족구팀은 그때부터 탄탄대로를 걷게 됐다. 한 해 승률이 무려 4할에서 5할에 이르는 역대 전무후무한 기록들을 양산해 나가면서 신들린 듯이 우승을 이어가게 된 기아자동차 족구팀. 그때는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구름 위를 걷는 듯 신이 났었다.

1997년 그 당시 팬들을 몰고 다니던 수원 삼성전자와 결승전에서 맞붙게 됐고, 우리는 결국 그 대회에서도 우승을 했고, 태국으로 파견되어 세팍타크로 팀과 족구 교류전을 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전국 최초 SBS 아침마당에 80분간 기아자동차 족구팀과 수원 삼성전자 족구팀과의 골목에서 그라운드라는 제목으로 공중파 방송을 타기도 했다. ‘가로수 닷컴 배우승, 문화체육부장관 기 전국 최초 3연패 등 수많은 족적을 남겼다.

'기아자동차에 이어 현대파워텍 지금은 현대트렌시스까지 족구는 계속 이어져야한다'는 곽춘선 씨.
'기아자동차에 이어 현대파워텍 지금은 현대트렌시스까지 족구의 영광은 계속 이어져야한다'는 곽춘선 선수

Q 승승장구하던 족구팀 팀원들이 갑자기 서산 현대파워텍에 둥지를 털었다. 사실 현대파워텍 족구팀이 전 기아자동차 족구팀인 줄 모르는 분들도 꽤 많았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마치 순간이동 한 것처럼 서산에 둥지를 턴 것 같다. 그날도 우승을 하고 우리는 가족들과 함께 회식을 했던 것 같다. 우리 팀원들을 잠시 밖으로 불러낸 조규남 감독님께서 서산에 새로 들어설 현대파워텍으로 가게 됐는데 선수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을 물으셨다. 큰 충격이었지만 우리는 그동안의 우정과 의리가 있었기에 그리 깊이 고민하지 않고 따라 간다고 답해 버렸다. 얼떨결에 현대파워텍으로의 선택이 이뤄진 것이다.

물설고 낯선 땅 서산, 벽돌 한 장 없는 평지에 바람과 함께 나부끼는 먼지를 보고나서야 현실감을 느낄 수 있었던 우리 팀원들. 하지만 우리가 누구냐. 불모지에서 꽃을 피운 족구팀이 아니던가. ‘생즉사 사즉생의 심정으로 다시 현대파워텍 족구팀(현 현대트랜시스 족구팀)을 모집하며 제2의 전승기에 불을 지폈다. 그 결과 서산시 대회, 충남도민 5연패, 메이저 대회 100회 이상 등의 새로운 기록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Q 그렇게 잘 나가던 족구팀이 최근 최대 위기를 겪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참으로 안타깝다. 현재 암울함 그 자체다. 선수 수급이 쉽지 않아 겨우 주전선수 4명만으로 최강부 팀을 운영해 오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공격수가 무릎 수술을 하게 됐다. 당장 선수 수급에 문제가 생겼고, 대회 출전은 고사하고 향후 주 공격수의 복귀 또한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26년간 이어온 명문 팀으로써의 유지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최대의 위기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싶다. 회사 규정상 유망한 족구 선수가 신입사원 입사 조건에 맞아야 하고, 회사의 대표적인 동호회라고 인정은 되지만 정책상 특정 동호회에만 선수 수급을 해줘야 하는 것도 문제가 있고.

이리저리 마음이 아프다. 족구팀을 창설한 사람으로서 마음의 부담감도 크다.

곽춘선 씨는 방송 해설자, 족구 심판, 족구 강사 족구 기술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있다.
곽춘선 선수는 방송 해설자, 족구 심판, 족구 강사 족구 기술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있다.

Q 준비된 족구 1세대의 명예로운 퇴진과 함께 제2~3세대로 이어지는 족구팀의 출범이 있었다. 현재 은퇴하고 방송뿐만 아니라 후학들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데?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 1990년도부터 준비된 족구 1세대는 나를 포함한 오병관, 최종헌 선수다. 우리는 순차적으로 후배들을 위해 명예로운 은퇴를 선언했다. 이로인해 뒤를 이어 전국 최고의 최강부 2기 족구팀이 선배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롭게 도약하게 됐고, 지금은 최강부 3기 족구팀이 출범되어 전국을 휩쓸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나는 현재 MBC ESPN 방송 슈퍼리그 족구대회 및 KBS2 ‘우리동네 예체능 족구편’ ‘지역 케이블족구방송 등 해설자, 족구심판자격취득 및 족구경기지도사 자격취득 강사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방송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족구협회 기술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그동안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미래의 우리 사회에 족구가 성공적인 스포츠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제 민족 구기인 족구가 전국체전 및 실업팀 창단을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에 각 학교마다 적은 예산으로도 운영할 수 있는 족구팀 창단이 생겨날 것으로 예상하고, 나아가 족구 실업팀이 현대트랜시스 및 서산시에도 창단된다면 지역의 브랜드가치도 상당하리라 본다.

내 남은 인생은 족구의 저변확대는 물론, 후학들을 지도·배출하여 멋진 선수와 해설가로 키워내는 게 꿈이다.


26년간 족구 인생 곽춘선 씨
26년간 족구 인생 곽춘선 선수 모습

인터뷰를 마치며 곽춘선 선수는 “26년간을 지켜온 최고의 족구팀이 위태로운 갈림길에 서 있어 마음이 무겁다. 특히 지난날의 역경을 이겨온 만큼 이번에도 잘 이겨내리라 생각하며 조만간 좋은 소식이 올수 있도록 기다릴 것이라고 말했다.

부디 곽 선수의 걱정이 기우이기를 빌며 현대트랜시스(구 현대파워텍) 선수 일동에게 파이팅을 외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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