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김병민 한림대 나노융합스쿨 겸임교수/‘주기율표를 읽는 시간’ & ‘신비한 원소 사전’ 저자
김병민 한림대 나노융합스쿨 겸임교수/‘주기율표를 읽는 시간’ & ‘신비한 원소 사전’ 저자

질문이 상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 성장과 효율이 중요하기 때문에 질문이 거추장스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질문의 존재에도 상대가 어려운 답은 커녕 대꾸조차 하지 않는 경우다. 이때는 마치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청소년을 키우는 부모의 심정이 되기도 한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도통 어떤 대꾸도 하지 않는 자녀의 모습이다.

독일어로 바겐부르크 멘탈Wagenburg mental이라는 용어가 있다. 4륜 수레로 만든 성이라는 의미다. 이 수레는 일종의 이동식 요새로 주로 전쟁의 전술로 사용됐다. 실제로 15세기에 헝가리·폴란드·왈라키아를 주력으로 연합군이 오스만 군대와 격돌할 당시 바겐부르크를 사용해 오스만 군대의 공세를 막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받아 들이지 않으며 밖에서 들리는 소리마저 무시하고 외부와 단절한 정신적 행위를 이 용어에 비유한다.

최근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1심 재판이 진행됐다. 재판부는 이 사건에 연관된 가습기 살균제의 성분과 폐질환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는 결론을 냈다. 그 이유로 가습기 살균제를 유통·판매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기업인들을 무죄로 판결했다. 피해자만 있고 누구도 책임이 없는 사건이다.

1994년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 CMIT과 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 MIT물질이 포함된 가습기 살균제가 세상에 나왔을 당시에도 유해물질 관리법은 있었다. 그런데 이 법에는 1991년 이전부터 이미 사용돼 온 화학물질은 유해성 심사에서 면제될 수 있다는 28조 조항이 있었다. 결국 두 물질은 정부의 규제 조항의 빈틈을 타고 세상에 나왔다. 아무리 기존에 사용된 화학물질이라 해도 가습기라는 새로운 용도로 변경된 경우에는 독성 발현을 의심하고 안정성에 제동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1996년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 PHMG가 등장한다. PHMG은 그 전에 없던 새로운 화학물질이었다. 당시 제조사는 신규화학물질의 유해성 심사를 관련기관에 신청했다. 하지만 독성시험자료가 첨부되지 않은체 관련기관에 통과됐다. 화학물질 신고서 등에 관한 고시 제 9조에 시험서 제출 생략에 관한 항목에 해당된 것이다.

PHMG는 고분자 물질이다. 생략 조건에 고분자 물질은 시험성적서 제출을 생략할 수 있다고 명시가 된 것이다. 대신 특성 실험 자료만 제출하면 됐다. PHMG를 통과했지만 소급조사를 할 수도 있었고 이후 등장한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 PGH의 심사에는 분명 걸러졌어야 했다. 양이온성 고분자 물질은 물에서 독성을 발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규정 8조에는 양이온성 고분자 물질은 추가 시험자료를 요청할 수 있다는 선택 조항이 붙었다. 2003년 결국 PHG도 선택조항을 이유로 흡입독성 자료가 제출되지 않고 세상에 나왔다.

참사를 막을 기회는 분명히 몇 차례나 있었다. 만약 한 사람의 실수라면 이해가 가지만, 18년 동안 걸러낼 수 있었던 몇 차례 기회에서 왜 어느 누구하나 가장 간단한 이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까. ‘이 물질은 안전한가’.

1957년 독일의 제약회사인 그뤼넨탈이 만든 진정제이자 수면제인 콘테르간Contergan이 독일에서만 최대 1만 명의 기형아를 만든 사건이 있다. ‘탈리도마이드라는 약물질의 정보를 전혀 알지 못한 독일 정부는 콘테르간을 의심하는 목소리에도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심지어 참사 원인이 탈리도마이드라는 것이 밝혀진 이후에도 별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연방보건청은 책임을 회피했고 제약회사 또한 적절하게 이를 통제하지 않아 화를 키웠다. 이 태도가 바로 바겐부르크 멘탈이다.

이 모습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밝혀진 초기에 정부가 보인 태도와 지금의 모습들이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펜데믹에 놓여 있다. 상처 소독에만 사용하던 알코올이 일상에 들어왔다. 매일 장소를 옮길 때마다 손을 닦고 주변 공간을 닦아댄다. 소독제는 일상 필수품이 됐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내 몸으로 소독제가 분무된다. 마치 공항에 설치된 금속탐지기처럼 출입구에 설치된 게이트 양쪽으로 안개처럼 뿌려지는 살균제를 통과해야만 그 너머에 있는 일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늘어가고 있다.

분무형 소독제로 사용되는 물질은 알코올이 아니다. 이런 소독제중 가장 많은 성분이 차아염소산이나 염화벤잘코늄이라는 4가 암모늄 계열 물질이다. 둘다 흡입독성이 존재할 수 있는 물질로 알려져 있다.

, 이거 가습기 살균제와 같은 시나리오 아닌가’, ‘이렇게 뿌려도 안전한 걸까당연히 이 질문을 꺼내야 한다. 우리의 기억에 흐릿해져가는 사건 조각을 다시 꺼내 조립하고 지금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과 맞춰봐야 하는 퍼즐인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 확인하지 못했다면 지금은 확인해야 한다. 이것이 과거의 경험으로 얻은 교훈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바겐부르크에서 나와 대답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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