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코로나 위기를 기회로 바꾼 남자 김세랑 수제 기타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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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코로나 위기를 기회로 바꾼 남자 김세랑 수제 기타제작자
  • 최미향 기자
  • 승인 2021.03.16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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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고의 루씨어를 넘어 세계에서 인정받는 기타제작자가 되고 싶다
김세랑 수제 기타제작자
김세랑 수제 기타제작자(서산시 ‘번화로 소극장’ 운영)

코로나는 결코 삶은 만만치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의 운명 또한 180도로 바꿔놓았다. 절망의 늪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속에서도 처연히 다시 일어나 위기를 기회로 바꾼 사람들이 있다.

“마스크를 벗은들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온전히 돌아가기는 힘들 것 같다. 이후의 세상은 분명히 달라져 있을 것이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처럼”이라며 환하게 웃는 김세랑 수제 기타제작자.

“얼마 전 누군가 버린 오래된 피아노를 3층 작업장으로 올려놓고 분해하여 기타를 만들고 있다”며 결 고운 긴 나무막대를 들어 보이는 ‘서산시 번화1로 19’에 위치한 ‘김세랑 수제 기타제작자’를 고운 햇살 가득한 이른 봄에 만났다.

Q 예술의 전당에서 세계 최대 건축가 안토니오 가오디 전시나 불멸의 가수 김광석 전을 총괄 기획하던 분이 어떤 이유로 서산으로 내려와 소극장을 운영하게 됐나?

서울에서 전시기획 쪽 일을 하다가 어느날 문득 ‘나만의 것을 기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자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짐을 싸서 서산으로 내려와 소극장 운영에 도전장을 냈다.

서산 원도심 번화로에 위치해 있어 ‘번화로 소극장’이라 이름 붙였다. 초반엔 수입이 많지 않았지만, 서산시 최초 민간인 소극장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지역 청년들과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 기업가 9기와 충남 콘텐츠 코리아 서북권 센터로 선정됐고, 그해 10월 서산시 예비사회적기업 인증도 받았다.

소극장은 바삐 돌아갔다. 여러 공연을 유치하고, 문화행사를 기획하고, 새로운 사업에 도전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코로나가 찾아왔고 모든 행사는 취소되었다. 대관 문의는 제로였다. 궁여지책으로 소극장을 통째로 빌려주고 영화를 보여주는 ‘나 혼자 본다’ 같은 기획도 했었지만 거세지는 코로나 확산세 속에 그것도 쉽지 않았다.

김세랑 씨가 운영하고 있는 '번화로 소극장'
김세랑 씨가 운영하고 있는 '번화로 소극장'

Q 소상공인들 얘기를 들어보면 2020년 신천지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고 들었다. 극장은 안 봐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때의 심정이 어땠나.

어마어마한 여파 앞에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힘들어 정말 많이 울었다. 아침이 되면 퉁퉁 부은 얼굴을 보이기 싫어 다시 웃었다. 최선을 다해 버티고 버티다 다시 일어나야 했다. 나는 가장이니까.

발버둥 치면 칠수록 술을 마셔야 했고 담배를 피워야 했다. 어느날 문득 현실의 벽에 부딪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나를 보게 됐다. 그곳에는 지쳐있는 한 가장이 초췌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엇으로 해야 할지 몰랐다. 다만 본능적으로 단순히 일용직이라도 해서 한 푼 두 푼 모아오는 건 방법이 아니라고만 어렴풋이 느꼈다.

그리고 나는 자꾸 늘어가는 술을 끊고 담배를 끊었다. 금단증세로 항상 식은땀이 나고 몸에선 악취가 났다. 그리고 또 울었다. 극에 달한 스트레스와 불안 증세가 심해져 악몽을 꾸고 가위에 눌렸다. 심신이 온전치 않아 병원에 가서 우울증약도 처방받아 수면제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울었다. 베개가 푹 젖을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내 평생 이리 처절히 많이 울어본 적이 없다. 그렇게 울고 또 울고 울어내니 게워졌다.

김세랑 씨가 가장 아끼는 기타, ‘깊을 심’자 ‘맑을 청’자를 써서 ‘심청’
김세랑 씨가 가장 아끼는 기타, ‘깊을 심’자 ‘맑을 청’자를 써서 ‘심청’

Q 듣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모습이 그려져 정말 마음이 아프다. 많이 울고 또 울고 게워내면서 새롭게 채워진 것은 무엇이었나?

가장 오래된 기억이었다. 기억 저편에서 행복한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제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힘들어도 버틸 수 있는지, 간절히 해보고 싶은 게 무엇인지 내 삶을 처음부터 생각해 봤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부터 꺼내 보았다. 만화를 참 좋아했다. 아침 신문에 만화 상영 시간표가 있었다. 어릴 땐 그 상영 시간표만 봐도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어린 시절 만화를 좋아하는 것만큼 좋아하던 것이 ‘기타’였다.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에 들어갔지만 사실 과 생활은 등한시했고, 오로지 통기타 동아리 ‘정음’에 내 20대 모든 열정과 삶을 바쳤다.

공연을 하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또 기타를 치고 너무 좋았다. 기타가 손에 익고 나름 자신이 있을 때부터 기타는 언제나 함께였다. 내가 기타를 칠 줄 안다는 사실이 늘 감사하고 자부심이 넘쳤다.

내 첫 기타에는 깊고 맑은 소리를 내라는 뜻에서 ‘깊을 심’자 ‘맑을 청’자를 써서 ‘심청’이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심청이와는 그야말로 어딜 가나 함께였다. 잘 때도 늘 바로 옆에, 군 생활도 함께했다. 그렇게 힘들 때 기타 생각이 많이 났다. 창고 한구석에 먼지만 자욱이 쌓인 ‘심청’이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Q 정말 의외다. 한서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를 다닌 것도, 기타동아리 ‘정음’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심청’이를 만나 사랑에 빠진 것도.

나의 아내는 내가 기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안다. 사실 통기타 동아리 동기로 만났다. 대학 시절에는 각자 연애 생활을 하고 아내가 졸업하고 나서야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그 당시 그녀와 함께 기타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게 정말 좋았다.

같이 낙원상가도 많이 가고 무엇보다 그녀도 기타를 꽤나 잘 치기에 서로 쿵짝이 잘 맞았던 것 같다. 결혼할 때 혼수로 딴 거 안 하고 좋은 기타 한 대씩을 했을 정도였다. 물론 코로나가 닥쳐 그때 들고 온 그 친구도 중고시장에 내놓게 됐지만 말이다.

어느날 아내가 연애 시절 내가 심심치 않게 “기타 제작을 해보고 싶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는지 “서울에 기타 제작 학과가 생겼으니 기분전환이라도 할 겸 다녀보는 게 어떻냐?”고 제안해 주었다. 선뜻 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형편에 학비도 만만치 않고 무엇보다 할 자신이 없었다. 결국 아내의 등쌀에 등록하게 됐고 ‘어쩌면 이 순간이야말로 내 운명을 바꿔놓은 순간’이 아닐까 생각해서 정말 열심히 도전했고, 이제는 내 인생의 최고의 선택을 하게 해준 내 사랑하는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김세랑 씨의 인생을 바꿔놓은 영원한 멘토 문찬호 교수님(우측)
김세랑 씨의 인생을 바꿔놓은 영원한 멘토 문찬호 교수님(우측)

Q 아내의 남편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대단하시다. 그 뒷받침이 제작자님을 살려낸 것 같다. 기타 제작 수업을 받으면서 기억나는 일은?

단연 문 교수님과의 만남이다. 학교에서 진정한 나의 스승님 이시자 인생의 롤 모델이고, 멘토이고, 지금도 큰 가르침을 주시는 문찬호 교수님을 뵙게 되었다. 교수님은 미국 갤럽스쿨 마스터 과정을 동양인 최초로 졸업하신 대한민국 최고의 루씨어이시다.

문 교수님과 함께한 첫 수업이 아직도 생생하다. 요약하자면 “기타 제작은 쉬운 길이 아니니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칼을 뽑고 정면승부를 하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아니 첫 수업에 천천히 단계를 거쳐 가라는 말이 아닌, “오늘부터라도 기타제작자의 길을 제대로 걸어보라”니! 충격이었고 용기가 났다. ‘그래 그럼 나도 오늘부터 걷겠다’ 생각하니 모든 고민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단순해졌다.

나는 그날부터 루씨어였다. 기타제작자가 된 것이다. 마치 게임에서 처음부터 직업을 선택해서 플레이하듯이 말이다. 그다음은 간단했다. 수련을 하고, 레벨업을 하고, 새로운 미션을 깨고, 당연히 직업에 맞는 장비도 구해야 할 것이다.

현재 문 교수님은 경남 사천에 계신다. 서산에서 4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사천으로 내려가 제자로 받아달라고 부탁드렸다. 감사하게도 교수님은 나를 받아주셨고 나는 그날부터 제자가 되어 도제교육을 시작할 수 있었다.

매주 수·목 1박 2일 코스로 목요일 아침 6시부터 수업이 시작됐다. 홀로 작은 모텔방에서 묵으며 그렇게 넉 달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스승님께선 몇십 년간 당신께서 쌓아오신 노하우가 한 개도 아깝지 않으신 것처럼 나에게 정말 많은 것을 전수해 주셨다.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찾아뵙고 사사를 한다.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정말 스승님의 깊이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문 교수님처럼 되는 것이 내 마지막 목표가 됐다.

공방 오픈 날, 아내와 아들 건이 셋이서 간단하게 개업식을 하며 주변 상가에 떡을 돌렸다.
공방 오픈 날, 아내와 아들 건이 셋이서 간단하게 개업식을 하며 주변 상가에 떡을 돌렸다.

Q 살아가면서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꿈과 희망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장비를 사들이는 것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도제 교육이 마무리될 즈음에 맞춰 발 빠르게 나의 기타 공방 세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마치 운명처럼 코로나 소상공인 대출이 나왔기 때문이다. 우습게도 나는 서류 작성하기 참 편했다. 작년과 비교해 매출 감소 비율이 –100%였기 때문이다.

나온 대출금으로 소극장에 재투자하거나 생활비로 쓰면서 조금 더 버틸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타 공방에 한번 과감히 투자해보기로 했다. 나보다 아내가 오히려 더 흔쾌히 공방을 차려보라 독려해 주었다. 그렇게 나만의 공방을 차렸다.

하나하나 손이 안 간 곳이 없다. 페인트칠도 직접 하고, 수공구도 직접 세팅하고, 기계들도 허접한 것 말고 제일 좋은 것들로 구매했다. 한 번만, 내 평생에 망할 때 망하더라도 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해보자고 다짐했다.

공방 오픈 날, 아내와 아들 건이 셋이서 간단하게 개업식도 하고 주변 상인분들께 떡도 돌리고 기계마다 막걸리도 돌렸다. 그리고 잠시 공방에 홀로 남아 뿌듯함과 안도감, 부담감이 교차되어 또 눈물이 났다. 이번의 눈물은 결코 아픔의 눈물이 아닌 알 수 없는 떨림과 희망의 눈물이었다.

나는 특별히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내가 쓸 메인 작업대 앞에 잠시 무릎을 꿇고 누군가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두려움을 극복할 힘이 아닌 두려움을 곁에 둘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이렇게 나는 기타제작자로서 첫발을 딛게 된 것이다. 나는 운이 참 좋다. 나를 지지해 주는 영혼의 단짝 아내를 잘 만났고, 물심양면으로 모든 지원과 응원을 아끼지 않는 부모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신 참 스승님이 내 곁에 계시다.

세계에서 인정받는 기타제작자가 되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밝히는 김세랑 수제 기타제작자
세계에서 인정받는 기타제작자가 되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밝히는 김세랑 수제 기타제작자

Q 힘든 길을 잘 견디며 걸어오셨다. 정말 수고하셨다는 말씀을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삶은 만만치 않다. 그래도 걸어가야지 방법이 없다. 이제 드디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내 앞에 똑바로 두고 정면으로 응시한 것 같다. 좋은 운에 노력을 더하여 대한민국 최고의 루씨어를 넘어 세계에서 인정받는 기타제작자가 되고 싶다.

아울러 서산에 최고의 기타메이커스페이스를 만들고 싶다. 훗날 누군가 나처럼 위기의 순간이 닥쳐왔을 때 기타 제작을 통해 안식을 얻을 수 있게 말이다.

아들 건이와 함께 모든 실들을 총 동원하여 기도를 올렸다는 김세랑 수제 기타제작자
아들 건이와 함께 모든 실들을 총 동원하여 기도를 올렸다는 김세랑 수제 기타제작자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기자의 발걸음 사이로 김세랑 씨의 흥얼거리는 작은 노랫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그때 문득 켈트족의 기도문이 생각났다.

<바람은 언제나 당신의 등 뒤에서 불고 당신의 얼굴에는 항상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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