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덕우 원장의 치아건강꾸러미-①

중앙허브치과 유덕우 원장
중앙허브치과 유덕우 원장

저자는 서산에서 출생하고 서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토박이 서산사람입니다. “의대에 진학하여 의사가 되라”는 주의의 권유로 의대를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서산 소재 고등학교에서 의대를 진학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수년에 한번 의대진학이 나올 정도로 교육여건이 열악했습니다. 외지의 명문 중·고등학교로 유학 후 재수나 삼수정도 해야 가는 서·태안 학생들이 간간히 있는 정도였습니다. 저자가 치대 6년, 대학원 3년을 합하여 총 9년 동안 다닐 동안에도 우리 학교에는 서·태안 출신 후배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이것은 어쩌면 의치대 특성상 6년을 공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방대한 수업분량과 시험들, 높은 학비, 여기다 생체를 집어 봐야 하는 것, 적성이 맞지 않은 특성들 등이 원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저자는 현재 치과의사 개업의인데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치대가 따로 있는 줄 모르고 그저 의대의 한 과 인줄로만 알았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주변에 치의사에 관계된 분이 없어서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분야는 그 당시 어린 저에게 듣고 보지 못한 분야에 속했던 것입니다.

고3이었습니다. 담임선생님께서 “좀 힘들지만 내 동생이 의사”라며 저자의 한쪽 다리가 불편한 걸 보고 “6년만 고생하면 개업을 할 수 있는 치대에 가보라”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저자는 치대에 합격을 했고 죽어라 공부만 했습니다.

참고로 저자의 적성은 문과성향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는 치의학은 딱딱한 이과 학문으로 시험과 실습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용도 만만찮았고, 더구나 심한 경쟁력으로 하루하루가 고달프고 지루하기까지 했습니다.

당시는 대학 도서관에서 제일 늦게, 또 가장 오래 머무는 학생은 바로 치대생이었습니다. 그 다음이 의대생인 걸로 저는 기억합니다. 타 과 학생은 이미 방학이었지만 치대생은 그해 마지막 전날인 12월 30일까지도 재미없는 시험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힘들었지만 몰입했던 공부를 6년 동안 하고 의사국과고시에 합격했습니다. 그해 합격률이 겨우 65%에 불과했는데 그 속에 포함됐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했던지 모릅니다. 그리고 다시 저의 학업은 계속됐습니다.

보철과 전문의 과정에 지원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젊은 마음에 불편한 다리를 가진 내게는 약간 맹랑한 결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보철과에서도 치대 학창시절과 마찬가지로 역시 연애 할 시간도 없이 팍팍한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새벽에 출퇴근하기 일쑤였으니 오죽했겠습니까. 가만 보면 저는 의대생활 3년을 더 보태 자그마치 9년을 공부만 했던 셈입니다. 저자의 20대는 그렇게 치열하게 지나가 버렸습니다.

어느날, 보철과 교수님께서 “보철과에 남아라”고 권유하셨지만 저는 교수님과의 성향적 차이와 함께 공부만 주주장창 하다 보니 아픈 다리에 더 힘이 없어짐을 느끼며 결국 공부를 마쳤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왕 힘들게 버틴 거 그때 좀 더 생각해 볼 걸’ 하는 후회가 살짝 들기도 합니다.

글이 좀 장황했습니다. 이렇게 저를 소개하는 것은 앞으로 여덟 꼭지의 글로 여러분들과 함께 ‘유덕우의 치아행복꾸러미’를 연재하게 되었으니 먼저 저를 소개해야 될 것 같아서였습니다.

현재 저자는 치과를 개업한 의사로서 많은 환자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저자의 치아는 다행히도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만 내방하시는 환자분들은 치아로 고통을 받고 있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치아는 예로부터 오복(五福)의 근원이라고 했습니다. 치아에 문제가 생기면 삶의 질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앞으로 많은 분들에게 치과질환 발생 시 참고할 수 있도록 서산시대를 빌어 치의학의 임상과목을 일반적인 치과 상식을 더 해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부디 이 글이 치아로 고통 받는 많은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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