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김병민 한림대 나노융합스쿨 겸임교수
김병민 한림대 나노융합스쿨 겸임교수

대한민국은 커피 공화국이란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커피를 즐겨 마신다. 나조차도 하루의 시작에 커피가 있고 매일 평균 서너 잔을 마신다. 커피 애호가들의 고민은 공통적이다. 유명한 음료 매장의 커피는 어지간한 밥값에 달해 자주 이용하기 부담스럽다.

인스턴트 커피는 커피 본연의 맛을 느끼기에 다소 부족한 감이 있다. 게다가 바쁜 현대인의 삶에서 원두를 직접 갈아 마시는 일도 번거롭다. 그렇다고 고가의 에스프레소 기계를 집에 들여놓는다는 것은 더욱 망설여진다.

기업은 이런 틈새를 잘 알고 있다. 캡슐커피의 등장은 소비자의 이런 고민의 지대에서 탄생했고 욕구를 빠르게 채웠다. 캡슐커피는 매장 커피의 1/4 가격에도 미치지 않는다. 매장에 가지 않아도 에스프레소는 물론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고 무엇보다 편하고 품격있게 커피를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왠지 이런 방식의 소비가 친환경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최근 캡슐커피를 판매하는 기업의 광고에서 농부의 행복한 미소를 보았다. 열대 우림 커피 농장과 협력해 친환경적으로 재배하며 공정 무역 거래로 공급한다고 한다.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한 이미지가 소비자에게 각인됐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고 해야 하나. Nothing better!

열대 우림이 사라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독자가 있을 것이다. 지난 2019년 아마존 우림에서 산불이 산발적으로 발생했다. 화재는 일 년 넘게 진행됐고 결과적으로 일본 규슈 지역의 넓이와 맞먹는 자연을 잿더미로 바꿨다. 그리고 동토지대인 아이슬란드가 댐건설로 빙하가 사라지며 몸살을 겪고 있다. 이런 일들이 커피랑 어떤 관련이 있을까.

각 가정 단위로 실행하는 재활용 분류 중에서 유일하게 다뤄지는 금속이 있다. 한 번이라도 분리수거에 참여했다면 쉽게 알 수 있는 물질이다. 하지만 아무도 이것을 질문의 형태로 옮기지 않았다. 왜 이 금속이 유일한 재활용품일까.

알루미늄은 지각에 풍부하다. 산소와 규소에 이어, 지구 지각에 세 번째로 많다. 알루미늄을 재활용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알루미늄을 재활용할 경우 보크사이트에서 알루미늄을 추출해 생산할 때 필요한 에너지의 5%만 필요하기 때문이다. 순수한 알루미늄으로 추출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간다. 전 세계 전기 소비량의 3%가 알루미늄 생산이 차지한다.

그런데 재활용 분리수거장에서 커피 캡슐과 관련해 어떤 행동도 취해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특정 기업의 작은 커피 캡슐은 알루미늄이다. 버려지는 소모성 제품의 양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한 해 버려지는 커피 캡슐 쓰레기만 최소 8천t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재활용되지 않으면 결국 광석으로부터 제련해 금속을 얻어 공급한다. 결국 기업은 세계 굴지의 알루미늄 생산업체와 협력한다.

알루미늄의 원료 광석을 채굴하려면 땅이 필요하다. 매장량이 많은 호주·기니·브라질·인도네시아의 거대한 열대림을 없애야 한다. 필요한 전기는 댐을 건설해 수력발전으로 얻는다. 알루미늄 1톤을 생산할 때 평균 8톤의 이산화탄소가 대기로 뿜어진다. 세계 배출량의 2%에 달하는 양이다. 인류의 발길이 닿지 않는 숲과 동토 지대가 파괴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물질은 결핍의 대상이었다.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인류는 두 차례에 걸친 지옥 같은 전쟁으로부터 탈출한 인류는 소비경제 복구 과정에서도 알루미늄산업을 놓지 않았다. 앞선 세대가 귀하게 여긴 물건을 모두 알루미늄으로 바꾸고 한 번만 쓰고 버릴 수 있게 변형시켰다. 인류의 품격 있는 삶을 잠시 채우고 눈앞에서 바로 사라져버리게 한 것이다.

과거의 시간을 끌어다 한꺼번에 소모하는 플라스틱의 철학이 알루미늄으로 옮겨졌다. 플라스틱도 문제이지만 알루미늄은 여전히 포장재산업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인류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까지 집어삼키고 있다.

이런 일은 1차원적 시선에서는 대부분 숨겨져 잘 보이지 않는다. 입체적으로 보면 캡슐커피는 커피 중 가장 비싼 커피일지 모른다. 우리가 이 모든 풍요를 누리기 위해 지불한 비용의 영수증에는 보이지 않지만 과거의 시간을 끌어다 쓰고 미래를 복구할 대출금 숫자도 들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진정 얻고자 하는 물질 외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물질이 우리가 지속 가능하다는 문구로 그렇게 애쓰며 지키려 하는 대상을 파괴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지속 가능함을 위한 행위 선언은 우리 자신부터 해야 한다. 하지만 실행이 잘 안 된다. 경제학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가정이 있다. 사람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나 아주 멀리 있는 사람들을 위해 뭔가 자발적으로 희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류는 이미 자본과 경제 논리 위에 놓인 영악한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아직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정말 안전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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