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시자 외조부의 뜻을 이어받아 박첨지를 멋지게 성장시키고 싶어

이태수 서산 박첨지놀이전수관 보존회장
이태수 서산 박첨지놀이전수관 보존회장

아주 어릴 적부터 엄마 등에 업혀서 박첨지놀이를 봤어요. 동네 어르신들은 일이 끝난 저녁이 되면 풍물을 치며 냇가로 모였는데 날이 어두워지면 횃불을 켰어요. 그 불빛이 얼마나 밝았는지 극 중 구렁이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기겁했던 기억이 있어요.”

서산시 음암면 탑곡리에서 태어나 현재 이 마을에서 이장 일을 맡으며 박첨지놀이전수관 보존회 이태수 회장은 “1대 주연산 창시자님이 저의 외할아버지셨어요. 그러니 우리 엄마 뱃속에서부터 저는 박첨지와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마을에서 연극을 할 때면 엄마는 저를 업고 연극을 하는 곳으로 갔었대요. 어린애들은 인형극을 엄청나게 좋아하잖아요. 따뜻한 엄마 등에 업혀 깔깔 웃다가도 무서운 장면이 나오면 엄마 품에 안겨 얼굴을 묻고 고개도 들지 못할 만큼 소심한 아이였대요라며 미소를 지었다.

대도시에서야 인형극 하나를 보려면 실내로 들어가야만 볼 수 있지만, 탑곡리에서는 자연 풍경을 조명 삼아 동심을 키울 수 있었다는 이태수 회장.

26일 봄기운 머금은 버들강아지가 활짝 피어오른 날, 서산시 음암면 탑곡고양동1113-9에 있는 박첨지놀이전수관을 찾아 이 회장으로부터 그간의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Q 외할아버지가 박첨지놀이 창시자였고 성장하면서 많은 공연을 접했을 텐데 그렇다면 학창시절은 어떤 학생이었나?

대부분 집이 그렇겠지만 위에 형제들을 보면서 꿈을 키우는 경우가 많지 않나. 나 또한 그랬다. 52녀 중 막내가 바로 나였다. 위로 둘째 형님께서 최연소 유도 국가대표 선수 생활을 했었다. 나이 차이도 많은 데다 워낙 탁월한 개인기를 가지고 있어 일본 유명한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올 정도로 형님은 유명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조총련들의 활동이 굉장히 심할 때라 부모님은 그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납치될 수도 있다. 절대 안 된다고 했고, 유도 명문 대학에서도 자신의 학교로 형님을 데려가기 위해 강제납치를 시도할 만큼 우리 형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부모님은 이런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운동하겠다는 나를 말리며 막내만큼은 선수 생활을 시키지 않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유도를 하겠다며 유도로 유명한 고등학교로 입학하는 나를 끝끝내 말리지는 못하셨다. 내가 선택한 길이었기에 지옥훈련이었지만 어려워도 충분히 감내하며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인생이 어디 뜻대로 되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사정상 유도 전문대학교를 포기하고 안경원 점원으로 취직을 했다. 몸에 맞지 않는 넥타이를 마치 내 목에 죄는 기분을 아는가. 내가 바로 그랬다. 결국 1년 만에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낙향했다.

"박첨지놀이는 마음속의 고향"이었다고 말한 이태수 회장
"박첨지놀이는 마음속의 고향"이었다고 말한 이태수 회장

Q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온 이유와 박첨지놀이에 다시 관심을 끌게 된 계기가 있다면?

지병으로 고생하신 어머니께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갑자기 아버지가 혼자 시골에 남게 됐는데, 도저히 당신 혼자서 식사를 해 드신다는 것이 용납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탑곡리 내 고향으로 내려왔다.

딸을 먼저 보낸 박첨지놀이 창시자 고() 주연산 명인인 외할아버지의 슬픔을 어루만져줄 시간도 없이 나는 집안을 챙겨야 했고, 외할아버지는 또 자신의 아픔을 인형극에 녹여내고 있었다.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서도 박첨지놀이만은 꿋꿋이 지키며 88세가 될 때까지 풍물의 꽃인 꽹과리를 치셨고, 93세까지 탑곡리의 역사이자 마을 공동체 문화인 박첨지놀이를 지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신 분이 바로 외조부였다. 그런데도 나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서서히 애상 받치는 일들이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박첨지 놀이는 마을 단위 민속인형극이다 보니 순전히 마을 주민들이 단합되어야만 전승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배를 곪아가며 하기에는 당시 행사에 몸담으신 어르신들의 부담 또한 만만치 않았다.

행사를 하기 위해 부르러 가면 야 이 사람아, 그거 하면 돈이 나오나 쌀이 나오나라며 돌아앉으셨고, “내가 돈을 벌어야지. 먹고사는 게 먼저 아니야?”라며 외면하기 일쑤였다. 심지어는 철석같이 행사에 참여하신다던 분이 축제 당일에 갑지기 일이 생겨 불참하기도 했다.

이대로는 도저히 정착할 수 있는 기반마저 위태로울 것 같아 고민 끝에 1995년 박첨지놀이 예능 보유자이신 2대 고() 김동익 명인 밑으로 내가 직접 들어가게 됐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현재 이렇게 몸 바쳐 충성하고 있다(웃음).

Q 무형문화재가 되기 전이면 다소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었을 텐데?

벌써 26년 전 일이다. 젊디젊은 삼십 대가 인생을 바치는데 왜 번뇌가 없었을까. 하지만 우리 마을의 전통을 이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어떤 의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돈 보고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마을 놀이였고 특히 외할아버지의 혼이 깃든 것이었기에 뭔가 끌리듯 들어왔던 것 같다.

가난과 나라 잃은 슬픔을 풍물과 인형극에 담아 잊으려고 했을 것이고, 그 속에서 대대로 이어져 온 마을의 전통을 후대에 전해주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것이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연을 위한 소품을 만들기 위해 마을 사람들과 둘러앉아 바가지와 수수깡으로 인형과 상여를 만들었다. 밤새 만든 것으로 한바탕 신명나게 공연을 하면 상엿집 궤짝에 인형과 소품들을 담아서 불태웠다 한다.

어린 우리는 모퉁이를 끼고 놀다가도 풍물 소리가 들리면 신발이 벗어지는 것도 잊고 쫓아가 턱을 괴고 신명나게 봤던 기억들이 있다.

이제 우리는 첨단을 달리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역동적이고 흥미진진한 액션과 퍼포먼스 일색인 공연이 무대를 사로잡고 있는 가운데 전통적인 모습의 막대 인형이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란 절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박첨지놀이는 단순함과 질박함에 매료된 세계적인 인형극 대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은 귀하신 몸이다.

특히 고려시대부터 양반사회의 모순을 풍자하면서 주로 서민층에서 즐겨 놀았던 민속극이 현재 서산시 음암면 탑곡4리의 주민들이 원형 그대로 명맥을 잇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온 몸을 던져 마땅히 지켜야 할 이유가 많은 문화재다.

공연할때마다 가슴이 떨린다는 이태수 회장
공연할때마다 가슴이 떨린다는 이태수 회장

Q 박첨지놀이전수관도 지었고 매년 30회 이상의 공연도 했다. 어려움은 없었나?

왜 없었겠나. 이렇게 될 때까지는 정말 무수한 일들이 많았다. 이 자리에서 다 얘기하기에는 무리다. 전수관을 짓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젊은 놈이 의식주도 해결되지 않는 것에 매달리냐! 직장이나 잠든 지 오죽 못났으면 저거 잡고 있나며 혀를 차는 분들이 있더라. 심지어는 회원들조차 무형문화재는 지정됐어도 전수관 지어주는 것은 꿈같은 얘기라고 했다.

그렇지 않다는 걸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박첨지놀이보존회장을 맡으며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10여 년을 싸우면서 전수관을 지었다. 첫 삽을 뜨던 날, 내 속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울컥울컥 나왔다. 긴 시간 박첨지놀이를 보전하기 위해 돌아가신 분들이 하늘에서라도 이 모습을 내려다본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생각하니 뿌듯하기도 했다.

여기다 30회 공연은 지역적인 한계가 있다 보니 벽에 부딪히곤 했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 3년 전에는 공모사업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는 신나는 예술여행에 선정되어 전국 10개 도시에서 박첨지놀이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렇더라도 결국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 54가구밖에 되지 않는 마을에서 정회원은 9, 준회원은 4명 고작 13명이 회원 전부다. 그중에서 80대를 넘긴 분이 3. 남아 있는 분들의 연세도 만만치 않으니 향후 나아갈 박첨지놀이가 순조로운 항해가 될지 불안하긴 하다.

특히 농촌인구의 고령화와 인구 감소를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버거운 미래가 예상되지만 그래도 올 한해 예정된 공연과 해야 할 일들이 많다 보니 무시로 바쁜 걸음이 예상된다.


서산시 음암면 탑곡4리는 인형극의 본고장이다. 멋지게 지켜내고 보전하기 위해 올 한해 많은 작업이 진행될 예정이다. 박첨지놀이전수관을 증축해 체험장을 만들 예정이고, 야외공연장 건립은 물론 아름다운 마을 조성이 기다리고 있다는 이태수 회장.

돌아서 나오는데 벽에 걸린 인형들이 세계전통 민속인형축제를 탑곡4리에서 개최할 때 그때 다시 보자는 듯 기분 좋은 웃음을 지어 보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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