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두 가지 암을 극복하고 돌아온 캡스톤입시학원 강대혁 대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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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두 가지 암을 극복하고 돌아온 캡스톤입시학원 강대혁 대표원장
  • 최미향 기자
  • 승인 2021.02.24 0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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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 속에서도 진로에 대한 학생들의 고민이 나를 다시 교단 앞에 세웠다!
두번의 암을 극복하고 돌아온 캡스톤입시학원 강대혁 대표원장
두 가지 암을 극복하고 돌아온 캡스톤입시학원 강대혁 대표원장

꽃샘추위가 온몸을 움츠리게 했던 2월 중순, 대치동에서도 무지 잘 나가던 강대혁 대표원장을 만나기 위해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서산시 예천동에 있는 캡스톤입시학원 문을 열었다. 고소한 녹차 내음이 코끝을 휘감았고, 잠시 후 가방을 어깨에 메고 나타난 그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인사를 했다.

우리는 한참 동안 독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고, 언제나 그의 등에는 두 권의 책이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저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에 관한 책을 주로 많이 읽으며 사유(思惟)하기를 좋아하고, 여흥을 남기기 위해 서평을 쓰는 작업을 합니다. , 그리고 제가 저를 사랑하기 위해 하는 것도 있어요. 책 몇 권과 카메라를 들고 여행하는 거예요. 그곳에서 만나는 풀과 나무, 물과 모든 생명들이 너무 좋거든요. 자연을 접하다 보면 그냥 털썩 주저앉아 셔터를 누르기도 하고 오랫동안 바라보기도 합니다.”

강대혁 대표원장은 28살 시절 강남 정일학원 재수종합반에서 생물 단과강의를 시작으로 그해 목동에서 개인학원을 운영, 1997년 당시 과학고등학교 학생들의 집단 자퇴와 맞물려 자퇴 학생들을 수용하면서 자리를 잡았다.

이후 활발한 활동을 하던 그에게 2006년 위암은 상상할 수 없는 시련이었고, 설상가상으로 10년 후에 또다시 간암 선고까지 내려지면서 결국 간 이식을 받은 강 대표원장은 모든 것을 접고 서산으로 내려와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간암 판정을 받은 내게 간 이식을 해준 사랑하는 아내
간암 판정을 받은 남편 강대혁 원장에게 간 이식을 해준 사랑하는 부인

Q 큰일을 두 번씩이나 치렀는데 정말 고생이 많았다. 서산으로 내려오게 된 이유는 뭔가?

입시컨설팅을 오랫동안 하면서 피로도가 높았고 휴식에 대한 갈망이 컸었습니다. 그러던 차 간암 판정을 받았고, 많은 결심을 하게 됐죠. 다행히 조직검사 결과 93%가 아내와 일치한다는 소견이 나왔습니다. 아내에게 이식을 받아 수술을 진행하게 됐어요.

그동안 참 먼 길을 돌아왔나 봅니다. 심신이 많이 지쳐있었거든요. 이참에 오랫동안 꿈꾸던 삶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마침 서산에 가지고 있던 땅에다 지인들과 집을 짓게 됐어요. 전원생활을 하며 책도 읽고 출판사와 계약했던 책도 쓸 요량이었죠. 우리 가족은 그렇게 툰드라의 네네츠 유목민처럼 바리바리 짐을 싸 들고 서산으로 내려왔습니다.

의도치 않게 서산에서 대학 컨설팅을 해주게 됐어요. 지방에 있는 우수한 학생들이 진학에 실패하는 사례들을 보면서 조금만 신경 쓰고 노력하면 원하는 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데.’라는 안타까움이 있었던 거 같아요. 우수한 학생들의 진학 보탬에 도움이 되면 좋잖아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또다시 학원을 개원하게 됐네요.

뭣보다 제가 컨설팅해 준 많은 학생이 대학진학에 성공하다 보니 힘도 나고 또 24년 전, 처음 강남 학원가에서 뜨거운 가슴으로 강의할 때도 생각나고, 암튼 여러 가지 생각이 중복으로 떠올랐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그 시절이 아주 기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비록 건강은 무너졌었지만요. 그러고 보면 역시 누에는 뽕잎을 먹어야 되나 봅니다(웃음).

열정 하나로 무장했던 젊은 시절의 강 원장
열정 하나로 무장했던 젊은 시절의 강 원장

Q 이왕 말이 나온 김에 고려대학교 생물학과에 다니다가 학원 강의를 시작하게 됐다. 당시 상황을 얘기해달라.

그때는 많은 학생들이 학교 다니면서 과외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도 그랬어요. 대학교 3학년 때였는데 지인분이 학원 와서 알바 하라고 해서 갔다가 강의를 하게 됐어요. 학생 신분이었으니 돈도 없고,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컸습니다. 그때가 28살이었어요.

사실상 1년 동안 조교 비슷하게 들어가서 애들 보충도 해주고 그러다 교무선생님께 바로 발탁됐어요. 당시 가장 유명한 학원이 정일이었고, 정일에 있던 분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한다는 선생님들이었습니다.

그 틈에 끼어 있다 보니 저도 여러 군데 스카우트를 받으며 강의를 다녔습니다. 실상 재수종합반에서는 급여 자체가 단과 수업보다는 낮게 책정이 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많은 분들 또한 바깥에 나가서 다른 수업을 많이 하는 실정이거든요. 소속은 하나로 정해놓고 자유롭게 강의를 하면서 실제적으로는 돈을 더 많이 버는 셈이죠.

저는 생물만 가르쳤어요. 그 당시에는 공통과학이라고 해서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이 반드시 다 포함되는 입시체제였습니다. 생물이 반드시 들어가야 했죠. 그때를 돌아보면 정말 열정이 많았습니다. 재미도 있었고요. 물론 지금도 그 열정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2의 삶을 살다보니 이제는 돈보다 미래의 인재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멋진 이 일이 참 좋거든요.

Q 강의만 했던 분인데 개인학원을 운영하면서 혹시 경영에는 어려움이 없었는지 그때의 얘기들을 해달라.

아시다시피 저는 강의만 주로 담당했기 때문에 경영 부분이 미숙하잖아요. 그래서 경영원장님을 따로 스카우트했습니다. 저는 당시 정일학원 소속으로 낮에는 재수종합반에서 강의를 하면서 야간에는 목동에서 재학생을 대상으로 학원을 운영했어요. 보습학원이었죠.

그때를 얘기하자면 당시 사회적 현실이 꼭 들어가야 합니다. 정부에서 비교내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과학고등학교 학생들이 대규모 반발이 일어났어요. 1998년 서울과학고, 한성과학고 학생들이 대부분 자퇴를 하면서 강남대성학원으로 몰려간 겁니다. 그 사건이 바탕이 되어 지금의 강남 대성학원을 만들게 된 거죠. 그리고 제가 운영하는 목동의 학원에서 한 20명 정도 그 학생들을 강의했습니다. 그때도 대치동에서는 여전히 강의를 이어갔고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제가 운영하는 학원에서는 생물 강의가 많지 않으니까 목동에서 3~4일 강의하고, 대치동에서 와서 또 3~4일 강의, 이렇게 왔다 갔다 한 거예요. 그러면서 학원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운명은 이때부터 바뀝니다. 그리고 2006,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요.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위절제술을 했지만, 병이 악화하여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죠. ~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득합니다. 모든 것이 낯설었어요. 지금까지 뭘 쫓고 살았나 싶었어요. 그때부터 생활을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운영하던 학원도 매각했습니다. 제가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데 학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청솔학원에도 휴직계를 냈습니다.

참 우습죠. 그동안 얼마나 저를 돌보지 않았던지 모든 걸 정리하고 3개월 쉬었더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건강이 좋아진 거예요. 그런 거 보면 학원계가 스트레스 하나는 무진 많은가 봐요. 1년을 쉬다가 병원에 갔더니 전이된 암이 사라졌다는 놀라운 소견을 들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다시 학원계로 복귀를 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늘 머릿속을 맴돌았거든요. 무엇보다 이 일이 천직이라고 생각했고요.

복직을 하고 강의를 하다가 2009년도에 권태기가 엄습하길래 과감히 재수종합반을 그만뒀습니다. 10년간이나 입시강의를 하다 보니 책은 물론이고 문제까지 다 외우다시피 하니까 그게 지겹더라고요. 그리고는 가장 재미있는 수업으로 돌아섰습니다. 그것이 바로 과학고, 영재고 학생들 수업이었어요. 특목고 학생들은 워낙 방대한 양, 거기다 대학과정까지 모든 내용을 다 소화해야 하니까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굉장히 짜릿하거든요.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강 원장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강 원장

Q 암에 걸릴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왜 또 힘든 길로 들어섰나?

제가 위에서도 말씀드렸잖아요. 천직이라고(웃음). 사실 특목고 강의 자체가 워낙 난해하고 넓으면서도 깊어서 그런 학생들을 가르칠만한 선생님들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과학고등학교나 영재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진입장벽은 상당히 높아요.

학원가의 실정은 이래요. 대부분 과학고등학교나 영재학교를 거쳐 대학교를 졸업한 애들이 새로운 강사로 들어옵니다. 일반적인 선생님들은 잘 못 가르치죠. 워낙 잘하는 애들이고 또 대학과정까지 가르쳐야 해서 일반적인 학원 선생님들은 쉽게 접근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냥 접근했다가 몇 개월 만에 아웃되는 선생님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이쪽 계통 선생님들 중 10년 넘게 하시는 분들은 생물에 있어서는 단 세 분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분들하고 20년째 계속 라이벌로(웃음)……. 사실은 좋은 선배님들로 이어오고 있죠.

대치동에서 오랫동안 강의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각 영역에서 자리를 잡고 계신 선생님들이고, 특히 자신들 만의 독특한 티칭스킬(teaching skill)을 가지고 있으신 분들입니다. 그곳은 금방금방 떴다 지고 하는 분들이 아주 많거든요. 그러니까 오랫동안 자리를 보전하신 선생님들의 특징은 독특한 학습법이나, 학생들과의 충분한 교감 등을 가지고 있는 분들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천직이라는 강 원장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천직이라는 강 원장

Q 시한부 선고를 받은지 2년만인 2008, 대치동 대치올림피아드학원에 원장으로 복귀하던데?

맞습니다. 그 학원은 2008년도 당시 자본금 1,000억 정도 되는 학원이었고, 학원건물만 8, 제가 책임진 대치, 목동의 영재센터만 해도 대략 300, 200평의 대형학원이었습니다. 학원계로 봐서도 대기업이었죠. 저는 대기업의 CEO로 간 셈입니다. 대표이사님도 원래는 강사로 시작을 했던 분이었는데 학원을 크게 키워 전문적으로 경영하면서 동시에 교육콘텐츠를 만드는 교육기업가였습니다. 기업평가만도 600억 정도 되는 학원에서 제 이름을 걸고, 그것도 제가 아는 선생님들을 스카우트하면서 학생들을 한 반, 두 반씩 늘려가는 재미도 상당히 매력적이었습니다.

지금에서야 말씀드리지만 솔직히 위험부담은 좀 높았어요. 하지만 대치동에서 제가 가지고 있는 인적 인프라나 지명 등으로 봐서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죠. 그것도 틈새를 노리면서 전략적,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해나갔습니다. 가장 먼저 과학고, 영재고를 졸업한 학생들의 학부모들을 실장으로 영입했어요. 그리고 그분들의 자제분들부터 차근차근 강의하다 보니 어느순간 잘하는 학원으로 입소문이 나있더라고요.

부담이 적었던 것은 자본이 항상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타킷 마케팅으로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었어요. 영재학교 준비하는 학생들, 영재고, 과학고를 대상으로 지속적인 마케팅을 해나갔습니다. 또 강의를 잘하는 학원으로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서 이쪽에서 1, 2위 한다고 하는, 정말로 잘 가르치는 강사 선생님들을 많이 영입했어요. 입소문은 더디지만 그만큼 강력한 건 없었죠. 대치동은 학원들이 잘 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입소문이라고 했잖아요.

무엇보다 강사진 자체가 워낙 좋았습니다. 그렇게 입소문으로 인해 저는 2년 만에 대치동에서 완전하게 자리를 잡았던, 그야말로 핫한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그때는 다른 강의는 거의 하지 않고 오직 대치올림피아드에만 있었습니다. 결국 2년이 되면서 자그마치 400명의 학생들이 다니는 대규모 학원으로 발전시켜 놨어요. 이 숫자를 말하는데 왜 지금 또 다시 가슴이 뜨거워지죠(웃음).

강 원장의 가방 속에는 늘 두 권 이상의 책이 들어있어야 불안하지 않단다.
강 원장의 가방 속에는 늘 두 권 이상의 책이 들어있어야 불안하지 않단다.

Q 그럼 이쯤에서 뜨거운 가슴도 잠재울 겸 취미에 대해서 여쭙겠다.

~ 좀 릴렉스 할 필요가 있지요(웃음). 제 취미는 식상하게도 독서입니다. 과학책을 많이 읽고 철학과 문학을 좋아하지요. 이것은 어쩌면 시인이셨던 선친의 영향으로 많은 책을 읽고 나름의 배움을 즐겼지 않았나 싶습니다.

학생들을 지도하다 보면 책 읽는 것도 주로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는 책 위주로 읽게 되더라고요. 아이들과 함께 토론하면서 또 책 속에 나온 생각들도 같이 공유하기 위함도 있고요.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양하게 변화시키곤 합니다. 거기다 내용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의 영역을 확장하다 보면 삶의 지평이 더 많이, 더 크게 변화되기도 하는데 얼마나 기분 좋은지 몰라요.

Q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정말 보람이 있다고 생각될 때는 언제인지?

선생님은 아마 대부분 그럴 거예요.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들이 찾아왔을 때 보람 있죠. 하버드대학교, MIT 이런 좋은 대학으로 유학 갔다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대뜸 전화해서 밥 사주세요” “술 사주세요하면서 찾아오면 진짜 이거 뭐 너무 즐겁죠. 제가 감성적인 면이 있죠?(웃음).

특히 기억에 남는 학생들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제자인데 강의 2번째 해에 만난 학생이에요. 과외로 만났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일진이고, 공부를 너무 못하는 학생이었죠. 태도도 상당히 불량했고요.

수업에 자주 빠졌어요. 한번은 혼을 냈습니다. 그랬더니 글쎄 너무 불량하게 반응해서 제가 막 쥐어 팼습니다. ‘과외 안 하면 말지라는 생각으로요. 그런데 자기가 싸움을 잘한다고 맞짱을 뜨자는게 아니겠어요. 나 참, 얼마나 황당하던지. 해서 진짜 맞짱을 떴습니다. 학교 운동장에서 대판 싸웠는데 결국 제가 이겼어요. 남자들은 왜 한번 싸우고 나면 친해지잖아요.

그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그 제자와 부모님까지도 친해졌어요. 벌써 20년째 관계를 지속하고 있네요. 그 녀석이 고맙게도 형같이 저를 잘 따라요. 어제 그녀석이 나이 40인데 결혼을 해서 저도 결혼식장에 다녀왔습니다. 강사를 하면서 가장 즐거운 게 바로 이런 거 아닐까요.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서산에서 또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진학지도를 20년 이상하면서 갖게 된 노하우와 인력풀을 최대한 이용하여 학생들의 진학에 맞춤 강의와 수능에 대한 부족분을 메울 수 있도록 말이지요. 또 지역 학생들의 명문대 진학을 도울 수 있으면서 더불어 지역 발전에 이바지하는 학원으로 자리매김하는 기회를 캡스톤입시학원에서 만들 예정입니다.

현재는 20여 명의 선생님들 중에 서울에서 서산으로 거처를 옮기신 선생님들만 10여 분이 될 정도로 지역발전에도 기여하고 있지요(웃음). 저는 이들 틈에서 조력자 역할을 하는 거죠. 좋은 선생님들이 마음껏 강의하시고 우수한 학생들은 또 자신의 꿈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일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이런 거죠. 공교육의 미진한 부분을 사교육의 강점으로 보완하는 것, 하여 저는 서산이 교육의 메카로 발돋움하는데 일조하는 그런 명품학원을 만드는게 제 목표입니다.

대치동의 교육시스템을 서산이라는 지역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그런 학원이 되도록 노력할 예정입니다.

에필로그

녹차를 앞에 두고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그날, 강대혁 대표원장은 아팠던 사람치고는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건강해 보였다. 그는 앞에 놓인 물 한 모금을 마시며 이렇게 말했다.

제게는 두 가지 꿈이 있어요. 뭔 줄 아세요? 저는 과학과 철학이 함께 발전하는 사회를 꿈꾸고 있어요. 그래서 출판하려는 것도 바로 그런 식의 책들이고요. 또 하나는 우리 지역에 독서모임 하나를 만들어서 과학·문학·철학·인문학을 함께 토론하고 사유하며 사는 거예요. 아주 소박한 꿈인데 진짜 멋지지 않아요?”

인터뷰가 끝나자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 강대혁 원장은 상담이 있어 동문동에 있는 고등관으로 간다며 간단히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의 앞날이 늘 여여하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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