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사는 법】 대금 악기를 만드는 우영대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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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사는 법】 대금 악기를 만드는 우영대 원장
  • 최미향 기자
  • 승인 2021.02.22 01: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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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지첩을 만들기 위해 대밭을 휘젓고 있다?
직접 만든 대금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우영대 원장
직접 만든 대금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우영대 원장

제가 사랑하는 조강지첩은 싫은 내색 한번 없이 제 가까이서 저의 손길을 기다려요. 제가 조강지첩이라고 하니 왜 놀라시죠? 그것은 사람이 아니고 바로 대금(大笒)인데.

대금은 우리나라 전통악기 가운데 하나인 목관 악기로 묵은 황죽(黃竹)이나 쌍골죽으로 만듭니다. 저는 요즘 대금을 만들기 위해 대나무밭 100여 곳을 주말마다 찾아다녀요.”

서산시 문화회관 옆에 있는 오행생식원 우영대 원장은 요즘 대금을 만들고 부는 일에 시간을 쏟고 있다. 지난 19일에 만난 우 원장은 여전히 손수 만든 대나무로 대금을 만들어 불고 있었다.

Q 언제부터 악기에 취미를 붙였나?

하모니카는 부춘초 2학년 때부터였다. 동네 삼촌의 권유로 불게 됐는데 당시는 계명이 뭔지 거꾸로 부는지 올바로 부는지도 모르고 그냥 불었다. 어느날 보니까 학교종이 땡땡떙떴다 떴다 비행기같은 동요가 화음으로 나오더라.

국민학교 시절, 주머니에는 하모니카를 넣고, 손에는 소 줄을 잡고 신선한 풀을 먹이기 위해 부춘산으로 올랐다. 소는 혼자서 풀을 뜯고 나는 그 옆에서 양치기 마냥 하모니카를 온종일 불었던 시절, 너무 불어서 목이 다 헐어 용각산을 최소 5각은 먹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음악에 빠져 살았다. 하모니카가 아코디언이 되기도 했던 그때 그 시절이었다.

절믄 시절 하모니카 사랑이 남달랐던 우영대 원장
젊은 시절 하모니카 사랑이 남달랐던 우영대 원장

Q 하모니카는 자신에게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나?

외로움을 달래주는 친구였다.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팔도유람을 하기 위해 하모니카 하나만 달랑 들고 서울 남부화물터미널을 찾아가 무작정 화물차 조수를 하고 싶다고 했다. 월급은 안 줘도 된다고 말하니 곧바로 그 일을 시켜주었다.

밥과 잠자리만 제공해주는 대가로 일을 할수 있었다. 내가 자는 곳은 화물차 짐칸이었다. 제주도만 빼곤 대한민국 모든 곳을 여행할 수 있었던 그 시절.

짐을 실으려고 대기를 하다 보면 운전사는 차 뒤 칸에서 잠을 자고, 조수인 나는 차 지붕 위로 올라가 하모니카를 불며 인생을 즐겼다.

Q 입대하면 공백이 있었을 텐데 그때는 어떻게 했나?

군대에 들어가서도 나의 하모니카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강남경찰서에 자대배치를 받고 심심하던 차 첫 월급 4,500원을 들고 서울 종로에서 하모니카를 하나 샀다. 너무 좋아서 시간만 나면 부대 옥상에 올라가 하모니카를 불었다. 외출이 있어도 갈 곳이 없다 보니 옥상이 나의 여행지였다. 나는 그곳에서 시간만 나면 하모니카를 불었고 당시 경찰서 주위는 대부분 호박밭이라 민원도 없었다.

그러다 젊고 똘똘한 놈이 하모니카를 불고 있으니 귀대하던 사람들이 하나씩 옥상으로 모여들어 또 불어, 또 불어를 외치곤 했던 그때, 어떨 때는 정말 입술이 다 부르트도록 밤새 불었다.

어느날은 높은 분이 나의 하모니카 실력을 인정하여 대회에 내보냈고, 나는 당당히 입선하여 금쪽같은 외박을 선물 받기도 했다.

Q 하모니카를 불다가 어떻게 대금(大笒)의 매력에 빠져들게 됐나?

미 대사관 근무 시절이었다. 두 시간씩 돌아가며 근무를 할 때였는데 무심코 TV에서 대금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당시 무료하던 차 문득 나도 한번 만들어서 불어봐야겠단 생각을 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현장에 있던 PVC 파이프였다.

잘 다듬고 시멘트에 비벼서 구멍 6개를 뚫었다. 그런데 아무리 불어도 당최 소리가 나지 않았다. 맨날 불어댔다. 정말 머리가 터질 정도로. 백일 정도 붙었을까 그때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 보니 그때까지도 모든 구멍을 다 막고 불어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손가락을 다 풀어보니 미련 맞게도 소리가 나오던 것을. 한오백년 곡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던 PVC 파이프 대금.

기억에 남는 추억은 교보문고로 근무를 나갔을 때였다. 대기시간에 사복을 입은 상태에서 버스 기사에게 선글라스 하나를 빌렸다. 꾀죄죄한 청바지에 시커먼 도시락을 앞에 두고 내가 만든 파이프 대금으로 한오백년을 멋들어지게 불었다. 그때 신기하게도 지나는 사람들이 돈을 넣고 음악을 감상하는 게 아닌가. 당시 2만 원 정도가 들어와 그 돈으로 회식을 했던 기억이 난다.

대나무 100여 곳을 다니면서 만든 대금 3개는 자신의 조강재첩이라는 우영대 원장
대나무 100여 곳을 다니면서 만든 대금 3개는 자신의 조강재첩이라는 우영대 원장

Q 20대부터 불었던 대금이었다면 굉장한 실력일 텐데 왜 새삼스레 또 대금 사랑에 빠졌나?

제대하고 나서 대금에 대해 잊어버리고 살았기 때문에 절대 그렇지 않다. 어느날 앞으로 욕심내고 살아봐야 한 20, 마누라도 안 놀아 줄 테고 그때 누구랑 놀까?’를 생각해 봤다. 그리고는 대금을 기억해 냈다.

나이 환갑을 먹고 나서야 일을 저질렀다. ‘다시 한번 대금을 배워보자. 이번에는 PVC 파이프가 아닌 내가 제대로 한번 만들어서 불어보자. 그러려면 또 삑사리 날것은 뻔하고 그럼 어떡한다!’고 생각하다 제대로 사야겠다 해서 거금을 들여 대금을 하나 샀다. 집사람이 대막대기가 왜 그리 비싸냐!”고 난리가 났다.

사실 내 생각에는 대금과 친해지려면 내가 직접 만든 대금으로 불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본을 놓고 그대로 만들어서 불기 위해 맘에 드는 대금을 산 것이다. 구입하고 난 뒤부터는 재료를 찾기 위해서 일요일마다 대나무밭 100여 가운데를 돌면서 대금 만들 재료를 찾아 다녔다.

그래서 만든 대금이 3개다. 열심히 불다보니 제법 소리가 제대로 난다. 아마도 100개만 실수하면 하나 정도는 완벽한 제품이 탄생하지 않을까. 그만하면 제2의 삶을 준비하는데 차질이 없을 것 같다.


우영대 원장은 타고난 음악적 재주가 있는 것 같다. 그가 다루는 악기는 하모니카, 소금, 중금, 대금, 태평소, 팬플룻, 단소 등이다. 몇 해 전에는 소금 악기를 불면서 마라톤을 뛰었더니 방송국에서 나와 열띤 취재를 하기도 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머리가 좋은 사람이야 뇌세포에 기억만 시키면 되지만, 나는 계속 연습을 해야 몸뚱어리 세포에 기억을 시키지. 그러려면 만들어서 하나하나 소리를 들어가면서 내 악기로 만드는 게 제일이야.

가만 보면 우리 집사람은 조강지처지만 내가 만든 대금은 조강지첩이지. 워낙 체구가 커 얘는 입 맞추는 데만 최소 3년이 걸려. 안 그러면 내가 원하는 소리가 안 나와. 늘 손대가면서 내 거로 만들어야지라며 다시 돌아앉아 직접 만든 긴 대금으로 악기를 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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