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무대는 퇴장할 때까지 자신이 주인공이다

서산 해미읍성 토요상설 공연 야단법석 신명날제 서승희 예술 총감독
서산 해미읍성 토요상설 공연 야단법석 신명날제 서승희 예술 총감독

프롤로그

새로운 길도 아니었다. 서울이 아닌 안면도가 문제였다. 연극계에서 잘 나가던 배우가 갑자기 작은 섬마을 어촌 바닷가로 내려가 공연하며 살겠다 하니 그녀를 알던 지인들은 그 촌에 가서 뭘 할거냐? 드디어 니가 미쳤구나!”란 말로 새로운 길에 나선 그녀를 몽상가로 치부했다.

한편 새로운 이방인의 등장으로 조용하던 섬마을 또한 일순간 파란이 일었다. “예술이 다 뭐여” “바다에서 뭔 미친 지랄들이여. 저러다 동네 물 버리는거 아녀?” “혹시 간첩 아녀?”라며 그녀에게 손가락질을 해댔다.

잘 나가던 대학로 연극배우의 삶을 훌훌 접고 문화 소외지역인 안면도를 예술축제의 섬으로 만들었으며, 10년간 집 한 채를 날려가며 안면도 국제공연예술축제를 개최했고, 서산 해미읍성에서 매주 토요상설공연 야단법석 신명날제를 기획·연출했던 주인공이다.

서승희 예술총감독을 겨울치곤 제법 포근한 14일 목요일에 만났다. 서 감독은 젊은 시절 최고의 가치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연극계와 소리짓발전소를 창단하면서의 여러 가지 애환들, 그리고 시골 생활에서 순박하기만 한 시골 사람들의 매우 복잡한 얼굴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낯섦에 대한 거부감이 결코 녹록하지 않았음을 재미있는 웃음으로 풀어주었다.

Q 언제부터 연극에 관심을 가졌나?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난생처음으로 연극을 봤다. 태어나고 어릴 때 자란 고향 포항 시공관에 국립극단 홍당무란 연극공연이 들어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맨 앞자리에 앉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커튼이 내려져 있는 틈 사이 무대 위를 올려다봤다.

커튼이 드리워진 무대 안 곳곳에 알 수 없는 둥근 물체가 있고 그 주위로 무수한 발만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게 됐다. ‘저 안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너무 궁금했고 알 수 없는 흥분에 휩싸였다. 커튼이 열리고 보니 그것은 바로 우물이었다. 내 관심은 온통 과연 저 안에 물이 들어있을까?’에 집중되어 있었고, 번역극이라 노란 가발을 쓴 여자 주인공이 물을 길어 올리는데 진짜 물이 들어있는 것이었다. 내가 있는 현실세계와 무대 위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공연이 끝나고 붉은색 카펫이 깔린 그곳을 걸어 나오면서 내가 커서 저렇게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을 해야겠구나!’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때부터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학교 축제나 행사 때 합창단 지휘, 축제 연출을 하고 출연을 했었다. 학교 축제 때 한복 입고 캉캉 춤을 추는 나를 본 친구 엄마는 세월이 지나고 나의 안부를 들으시더니 나는 승희 가가 그리 풀릴 줄 알았다고 했다더라.

그렇게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1989년에 극단 ‘76’에 입단하게 됐다. 그곳에서 연극 지피족, 춘향, 마네킨작가, 말똥가리, 고도를 기다리며, 미친리어를 했고, 뮤지컬 넌센스에서는 3기 원장 수녀로 출연하며 대학로에서 연극배우로 기반을 탄탄히 다져 갔다.

예술의 전당 세익스피어 기획 공연, ‘미친 리어’ 첫째 딸 거너릴 역
예술의 전당 세익스피어 기획 공연, ‘미친 리어’ 첫째 딸 거너릴 역

Q 연극을 잘하기 위해 많은 선배를 쫓아다녔다는데 특별히 기억나는 분은?

극단 ‘76’ 직계 선배이자 2018년 영화 공작에서 김정일 역을 멋지게 해낸 기주봉 배우다.

어느날 기주봉 선배에게 정말 연기를 잘하고 싶은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연기를 잘할 수 있는지 알려달라고 했다. 선배는 가만히 턱을 고이고 나를 건너다보더니 니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다 너의 연기 선생님들이야. 니가 만난 사람들을 자세히 들여다봐라. 관찰하면 다 너에게 연기를 가르쳐주는 선생님들이야.” 그 말이 확 들어왔다. 그 순간에 앎이 생겼다. 정말 감사했다. 나에게 큰 가르침을 주신 선배다.

그때 당시 예술의 전당에서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며 미친리어를 기획했고, 나는 리어왕의 첫째 딸 거너릴 역을 맡게 됐다. 지금도 있나 모르겠는데 신촌에 연극이 좋아 병원건물 지하에 소극장을 운영하던 정신과 닥터를 소문 듣고 무작정 찾아갔다.

리어왕 원작에는 나오지 않는 첫째 딸의 성격을 아주 히스테리컬 하게 표현하고 싶은데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도움 말씀 들으러 왔다고 했다. 배우가 캐릭터 연구 때문에 찾아온 경우는 처음이라며 히스테리컬한 증상에 대해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이처럼 고군분투 나의 연극은 그렇게 하나씩 성장해갈 수 있었다. ‘진짜 연기를 하려면 척하면 안 되고 관찰하고 연구하고 진정이 있어야, 그래야 진짜 연기를 하는 것이란 걸 선배들을 통해 알게 됐다.

Q 발성법을 배우려고 인간문화재 김월하 선생을 찾았다는데?

20대 중반 소리 내는 발성법을 배우고 싶어 찾아간 곳이 바로 인간문화재 김월하 선생이었다. “저는 소리 공부 열심히 해서 배우로서의 길을 가고 싶다. 선생님이 내는 소리가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닌 것 같다. 나에게 소리 내는 발성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고, 선생님은 타고난 소리가 있으니 당신 밑에 들어와 전수를 받으라고 하셨다. 하지만 내가 가야할 길이 배우임을 아시곤 니 뜻이 그러면 할 수 없다. 한 수만 터득해라며 뜬금없는 말씀을 하셨다. 순간적으로 한 수? 한 수가 뭐지?’ 20대 중반의 내 나이가 한 수가 뭔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때가 선생님 연세 70대 후반, 하나 흐트러짐 없는 생전 모습이셨다. “나는 조선의 마지막 기생이었고, 40대 후반에 정식으로 소리 공부를 한 사람이라며 당신이 인간문화재를 받기까지의 경험적 삶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면서 너는 니 길을 보고 가니까 그 한 수를 터득하면 세상 모든 수하고 만난다고 하셨다.. 그때 뭔가 깨달음이 내 속에서 일어났다.

그 한 수는 자기 신념일 수도, 용기일 수도 있었다. 그것은 자신 존재 고유의 진정성이랄까.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세상과 소통이 되고, 그럼으로써 결국 사회에 기여가 된다는 것을 선생님은 가르쳐주신 것이다.

춘천 마임 페스티발 제 1회 도깨비 난장 -전위음악 초청 공연 참가
춘천 마임 페스티발 제 1회 도깨비 난장 -전위음악 초청 공연 참가

Q ‘소리짓발전소창단 계기와 예술의 전당대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

이십 대 후반 러시아로 유학을 갔다 오면서 새로운 작업을 가져야겠다고 마음먹고 극단 76’을 나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던 12명과 함께 1996년 우리 소리와 짓을 발전시켜보자고 소리짓발전소를 창단했다. 그것은 기존의 공연 패러다임이 아닌 어떤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고 소리와 몸짓으로 표현의 자유로움과 새로움을 추구하자는 취지였다.

어느날 신생단체로써는 대단한 배짱으로 공연을 하기 위해 예술의전당에 대관 신청을 하러 갔다. 하지만 대관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전당 측에서 무슨 장르의 공연을 하려고 하냐고 물었고 나는 “‘소리짓이라고 말했다. 연극, 콘서트, 뮤지컬, 춤도 아니고 소리·이라고 하니 관계자들이 놀라 소리짓이요?”라고 의아해했다. 일단 대관에 관한 인터뷰를 하자는 요청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신생단체에게는 예술의 전당이 원칙적으로 대관을 해주지 않는다. 인터뷰하던 날도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가 없다. 자료를 보여 달라고 하는 관계자분들께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자료 없다. 지금부터 자료는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했고, 더구나 질문이 끝나자마자 지금부터는 제가 질문을 좀 하고 싶다며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우리 작품에는 세트가 없다. 그러니 무대 메카니즘을 알려달라는 내 말에 관계자들은 무대에 관해 설명해 주었고 나는 너무 신이 나서 그거 사용하고 싶어요라며 마치 이미 대관 받은 사람처럼 굴었다. “너무 좋네요. 무대 바닥이 움직이면 전체를 아래로 내릴 수도 있어요? 그거 쓸게요. 그럼 올라갈 수도 있어요? 구름다리로 하나 쓸게요. 그래요? 그러면 그걸 왜 몰랐지?” 속사포처럼 들뜬 내 질문에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대관을 승인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소위 갈지마오의 최고봉이 내가 아닌가 싶다.

결국 예술의전당은 넌버벌 퍼포먼스란 단어 자체가 생소하던 그 시절에 신생팀의 설득과 어필로 서류에 사인하고 우리는 천제라는 공연을 올릴 수 있었다.

대학로 거리 축제 초청 공연
태안주민들과 극단서산 단원들과 함께

Q 언론의 힘을 제대로 누렸다고 했는데 어느 정도였나?

언론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처음 알았다. 중앙일보에 박스 기사가 났다. 그리고 정말로 전화가 와도 어쩜 그렇게 올 수 있는지 마치 하늘로 붕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심지어는 방송에서 재연 배우들이 내 얘기를 드라마로 연기했고, 패널들은 프로그램에 나와 우리를 따라 하기도 했다. 더 신기한 건 지하철을 타도 나를 알아본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굉장히 신기해서 햐 이거 재밌네라며 무척 즐겼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방송에 다수로 출연하게 되면서 작가·PD랑 컨셉을 잡고 기획 얘기할 때와 방송으로 송출시킬 때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방송이 이런 거였어? 그렇다면 여기까지다재미없어져 버렸다. 문득 내가 소비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즈음 어느날 외계인 만나는 꿈을 구면서 ‘UFO 그날이후란 작품을 만들어 시리즈로 발표했다. 이 작품은 거리, 지하철, 홍대클럽, 극장, 지방을 돌아다니며 순회공연을 쉼 없이 했다. ‘이러다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연했다.

Q 안면도로 내려오게 된 계기와 이곳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힘들때쯤, 우연히 인사동 카페에서 자신의 닉네임이 적힌 명함을 팔던 비구니 스님을 만났고, “힘들면 안면도 아름다운 섬에서 쉬었다 가라고 했다. 만 원주고 산 명함을 받아들고 나의 안면도행이 시작되었다. 초행길은 낯설고 멀기만 했다. 장장 8시간 걸려 도착한 안면도는 난생 처음 느껴보는 공기 질감 이었다. 바다 냄새가 내 숨통을 트이게 했다. 스님 또한 너무도 따뜻하게 맞아주셨기에 첫인상이 상당히 좋았다.

고백건대 내려올 당시만 해도 나는 충청도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고, 내려와 보니 안면도란 곳은 같은 한국말을 쓰는 딴 나라였다. 주민들 또한 나의 첫인상에 상당히 놀라했다. 예술의 전당 공연때 삭발한 빡빡이 머리를 했고, 예전 연극 의상인 보살들이 입는 회색빛 바지 안에 옷을 잔뜩 껴입은 어떤 여자가 아들의 손을 잡고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도대체 정체가 뭐여?" "스님이 애기 하나 낳아서 야밤 도주했다더라"아니여 신 받은 무당이랴” “혹시 간첩아녀라며 나를 관찰했다. 당시만 해도 섬에 오는 외지인은 주로 사고로 야반도주를 해왔거나, 불온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라 생각했던 섬 주민들은 반공방첩 교육도 철저히 받은 투철한 상태였다.

자연 속에서 예술 활동하려고 서울 생활 정리하고 왔다며 무릎 꿇고 콧등에 침 발라가며 3시간을 옆집 할아버지와의 검증시간을 보냈고, 그분의 괜찬여 이상 없어. 여도 사람사는 곳인디 살면 다 살게 되는겨라고 받아주셨고 동네 사람들이 맘을 열자 마을 주민이 될 수 있었다.

대학로 축제 당시
대학로 축제 당시

Q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도 개인적인 활동도 병행해 갔는데?

안면도로 들어온 그해 1회 안면도축제를 개최했다. 또 안면도에서 문화적인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안면중·고등학교를 찾아가 학교장과 교사들을 설득하여 연극반을 만들었다. 자신의 꿈과 이름을 잃고 사는 주부들에게 아줌마들의 힐링캠프를 열어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예술적 경험을 제공하고, 자신의 이름을 찾아주고자 연극 시집가는 날태안별주부전을 함께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2002년에 제14회 이집트 카이로 실험예술제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고, 일본과 태국 숑크란 페스티발에 초청되어 공연했다. 참 활발하게 전방위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찿아 가며 여러 활동을 동시에 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안면도 바람아래에서 영감을 받아 음반 2집 발매를 했다. 전방위적으로 활동하는 나를 보며 그 촌에 가서 어떻게 예술 활동을 할꺼냐?”며 걱정했던 지인들은 놀라워했다. ‘~저렇게도 할 수 있구나!’라며...

해미읍성 토요상설 야단법석 신명날제 공연
해미읍성 토요상설 야단법석 신명날제 공연

#에필로그

50대가 되면서 어느덧 내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말했더니 친구들은 너의 그 정신은 절대 나이를 안 먹는 것 같다며 웃었단다. 혼자 키운 아들이 바른 청년으로 잘 성장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고, 이제 자신은 오롯이 현재에 집중하고 성장하며 나아갈 꿈을 꾼다는 서승희 총감독.

내 인생 지금이 가장 행복하고 쓰일 수 있음에 감사하다. 어디서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역할을 하며 사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그녀.

한때 8회 안면도 국제 공연예술축제를 개최하면서 자신이 가진 집과 땅을 처분해야 했고, 2017년부터 옥파 문화제 개최 및 서산 해미읍성에서 매주 토요상설공연을 기획·연출 등 현재까지 총감독 역할을 맡아 운영하고 있지만, 여전히 문화예술을 보면 가슴이 먼저 뛴단다.

서 감독에게 올 한 해 계획을 묻자 “4년간 해미읍성 토요상설공연을 하며 해미읍성과 축제에 대한 영감을 스케치하고 기록을 해왔다. 서산 문화재단 이사직을 지원하게 된 배경이다. 올해부터 서산 문화재단 사업으로 이관된 ‘2021년 축성 600주년 해미읍성 축제위상을 더 높일 수 있는 콘텐츠 기획·개발 단계에서부터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축성 600주년 해미읍성 축제 실행에 참여하여 새롭고 유익하게 업그레이드하는데 실질적인 역할을 하며 잘 쓰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올 한해도 서 감독의 삶은 여전히 최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종횡무진 뜨거운 활약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녀는 이 말 한마디를 남기고 어둠 속으로 총총히 사라져 갔다. “내 나이 50, 내 인생 지금부터 시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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