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석란도대련'...단단한 돌을 뚫고 나온 듯 활력이 느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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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석란도대련'...단단한 돌을 뚫고 나온 듯 활력이 느껴져
  • 서산시대
  • 승인 2021.01.19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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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쌤의 미술읽기 28
석란도 대련/이하응(1820~1898)/비단에 수묵/각 123.0×32.2cm/국립중앙박물관
석란도 대련/이하응(1820~1898)/비단에 수묵/각 123.0×32.2cm/국립중앙박물관

눈이 오고 난 뒤의 인왕산은 정말 아름다웠다.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석파정서울미술관을 통해 들어온 이곳에는 잠시 쉬어가도 좋을 멋진 바위와 나무, 흐르는 물이 있었다. 이런 곳을 두고 우리 선조들은 명당자리라고 말하지 않을까. 최첨단 21세기를 달려가고 있는 대한민국이지만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마치 19세기 말 조선 후기로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들었다.

석파정! 나는 전생에 선비였던가? 마치 예전에 와봤던 것처럼 이곳을 익숙하게 거닐었다. 좋은 곳을 보면 가지고 싶은 마음은 모두가 같은 마음이다. 휴대폰으로 연신 셔터를 눌렀지만 눈에 보이는 만큼 담을 수 없으니 정말 아쉽다.

석파정은 조선 후기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안동 김씨 김흥근(1796~1870)의 별서였던 곳으로 삼계동 정사라 불렀다. 지금도 너럭바위에 삼계동이라 새겨진 글씨로 당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삼계동은 부암동의 옛 지명으로 세 갈래 내()가 합쳐져 삼계동이라 불렀다. 이것은 소치 허련이 집필한 <소치실록>과 양희영의 <유복한기>등 일부 문헌에서도 드러난다.

한편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이곳을 보고 한눈에 반해 훗날 고종의 권세를 앞세워 당대 최고의 세도가 별장을 소유하게 되는데, 이 기록은 황현희의 역사서 <매천야록>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곳을 소유하게 된 흥선대원군은 삼계동 대신 바위 언덕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자신의 아호 석파를 따 석파정(石坡亭)’이라 바꾸었다.

1863128, 오랜 병석에 누워있던 철종이 승하하게 되고 세자가 없던 터라 흥선대원군의 12살밖에 되지 않는 둘째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고종의 아버지인 이하응 은 대원군이 된다. 원래 전주 이씨 왕족 남연군의 넷째 아들인 이하응은 세도가의 정치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당시 상갓집 개또는 궁도령이라 불릴 정도로 안동 김씨의 수모를 당했다. 한마디로 왕실에서 존재감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은 한 치 앞을 모르는 법! 운명을 바꾼다는 명당자리, 평소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았던 이하응이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한 것이 정말 운명을 바꾼 것일까? 이제 그는 왕의 아버지가 되었고, 어린 아들을 대신해 권력을 쥐었다.

하루아침에 세도가의 권세를 뛰어넘게 된 석파 이하응(1821~1898)은 인왕산처럼 자신도 왕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그 마음을 빗대어 자신의 호를 지은 걸까? 삼계동 정사에서 석파정으로 바뀐 것은 조선 후기 극적인 권력 이동과 사람의 운명을 여실히 보여주기도 했다.

석파정(石坡亭)은 한국전쟁 뒤 콜롬바고아원으로 운영되다 지금은 개인 소유가 된 뒤 석파정서울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석파정을 보고 내려오면서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들을 감상했다. 그림들을 보면서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이 있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된 석파정(石坡亭). 역사적 장소인 이곳이 오늘날 미술관이 된 것은 우연일까?

시간적 예술을 담고 있는 그림, 그 시대 최고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장소인 미술관은 이제 세도가, 대원군, 왕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들려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시대적 흐름탓은 아닐까.

인왕산의 추운 바람을 뒤로하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기 위해 삼청동 개화기 느낌의 카페로 향했다. 1900년 대한 제국 시절 흥선대원군의 아들 고종도 커피를 자주 마셨다고 한다. 당시에는 커피를 가배차라 부르거나 양탕국으로 불렀다. 왕이 커피의 쓴맛을 처음 느꼈을 때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나는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휴대폰을 켜서 석파 이하응의 그림을 검색해 보았다. 조금 전 다녀온 석파정을 보고 나니 예술가로서 흥선대원군의 그림이 너무 궁금해졌다. 추사의 제자이기도 한 그는 묵란을 자주 그렸다고 전해진다.

1898년 용산방 공덕리계 염동 아소당에서 77세로 생을 마감하게 된 흥선대원군. 그가 73세에 그린 그림은 괴석과 함께 두 폭으로 나누어 위아래 모두 좌우 대칭을 이루듯 난이 그려져 있으며, 꽃 또한 풍성하다. 노년기의 필체지만 활력이 있다.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단단한 돌을 뚫고 나온 것 같은 난. 그것은 파란만장한 자신의 삶을 난초에 투영한 것은 아닐까? 석파정을 보고 내려와 커피를 기다리며 그림을 감상하는 나는 그림을 그리는 대원군의 모습, 커피를 마시는 고종, 지금 이 자리 2021년의 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21세기를 넘나드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림은 시대를 넘어 함께 할 수 있다네, 가배 차 한잔 나누며 이야기 나누지 않을런가?’ 나는 마치 고종과 대원군을 만나 예술을 논하는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강민지 커뮤니티 예술 교육가/국민대 회화전공 미술교육학 석사
강민지 커뮤니티 예술 교육가/국민대 회화전공 미술교육학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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