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죽은 이들을 위한 ‘염(殮) 봉사자' 류인협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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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죽은 이들을 위한 ‘염(殮) 봉사자' 류인협 선생
  • 최미향 기자
  • 승인 2021.01.12 2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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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 호야나무는 소중한 나무인데 구유로 쓰면 안 된다”

철사줄로 천주교 신자를 목매어 죽인 처절한 아픔 간직하고 있는 호야나무
죽은 이들을 위한 ‘염(殮) 봉사자 류인협 선생
죽은 이들을 위한 ‘염(殮) 봉사자k 류인협 선생

#프롤로그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 그러나 죽어 땅에만 묻히고 살아남은 사람 가슴에 묻히지 못하면 진짜로 죽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전통 장례 문화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낸 연극으로, 2006년 초연 이후 전국에서 3천 회 이상 공연한 스테디셀러 작품에 나온 구절이다.

해미면 류인협 선생(, 80)은 해미순교성지에 위치한 해미성당에서 (, 죽은 사람의 몸을 씻긴 뒤에 수의를 입히고 염포로 묶는 일)’ 봉사로 평생을 보냈다.

인간이 가장 마지막 길에 만나는 ’, 이것은 어쩌면 망자에 대한 가장 숭고한 예의가 아닐까.

해미본당 김찬용 신부는 해미본당의 초창기 설립자로서 지금의 해미본당은 물론 해미순교성지가 성역화되는데 앞장섰던 산 증인이며 큰 공로자라고 류인협 씨를 소개했다.

이에 류인협 선생을 만나 그의 특이했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 편집자 주

# 천주교 집안끼리 혼배를 했던 우리 부모님

돌아보니 벌써 80년 전 일이다. 우리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두 딸을 두고 나물 뜯으러 갔다가 독사에 물려 그만 아내를 잃고 말았다. 두 딸을 데리고 혼자 사는 아들이 가여웠던 할머니는 중신아비를 통해 운산면 용장리에 사는 어머니를 소개받게 됐다. 두 집 모두 천주교 집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당시 어머니 또한 서들이라는 곳으로 출가를 했다가 1년도 안 돼 청상과부가 된 상태였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외할머니는 딸의 재가를 위해 3년째 바느질을 가르치고 있던 때였다.

내일이면 혼인하는 날, 먼 거리에 있던 어머니를 중신아비는 하루 일찍 데려와 신랑 집 문간방에 재웠다. 그런데 문제는 이튿날 터져버렸다. 굉장히 엄하신 프랑스 신부님이 어째서 혼인성사도 안 한 신부를 집에서 재웠단 말이요라며 불호령을 내린 것이다.

깜짝 놀란 아버지는 신부님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우리 집에 들어올 때 저 사람 뒤통수 밖에 못 봤어요.” “뭐라고! 지붕 추녀만 보아도 안 되는데 뒤통수까지 보았다고!” 신부님은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돌아서려 했다. 이때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덕망높은 신자 한분이 무릎을 꿇고 신부님 이렇게 된 것은 제 잘못이 크니 용서하시고 혼배를 허락해 주시지요라고 간청하는 바람에 프랑스 신부님이 겨우 마음을 돌리시고 혼배를 허락해주셨다.

그때 신부님이 끝까지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내가 삼대독자 외아들로 태어나 갖은 귀여움을 받고 자라지는 못했을 것이다.

# 5살 때 처음 상여를 구경하며 죽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시작했다

내 나이 겨우 다섯 살, 누나와 처음으로 사람이 죽어서 타고 가는 상여를 구경했다. 누나는 어린 내게 사람이 늙고 병들어 죽으면 저렇게 떠메고 가서 땅속에 파묻는 것이라고 했다. 어린 마음에 엉엉 울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언젠가는 저와 같이 땅속에 묻히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할머니 할아버지도 없는데 내가 어찌 살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도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린 마음에 가당치도 않은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사람은 왜 늙고 죽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 교리 문답에서 죽음이란 영혼과 육신이 갈라지는 것이라는 말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답은 아니었다.

겨우 다섯 살 때부터 죽음에 대한 문제를 풀어 보려고 했으니 엉뚱한 일이기도 했다. 이제 와 생각해 봐도 특이한 아이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나이 팔십 먹도록 해답을 찾지 못했으니 결국 나는 내 뜻대로 세상에 오지 않았으니 세상에 보낸 분의 뜻대로 살다가 그분의 뜻에 따라가야 된다는 스스로의 답만 얻었을 뿐이었다.

# 아버지 따라 15살 때 죽은 사람을 염하는 일을 도왔다

내 나이 15, 아버지는 류기업(바오로) 회장님과 함께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을 염하는 연령회라는 봉사 일을 하고 계셨다. 이 일은 지금 말로 장례지도사였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데모도를 하곤 했다. 어린 나이에 함께 한다는 것은 보통 무서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류기업(바오로) 회장님은 1954년 가을, 서산시 해미면 조산리 류기업 씨의 안방에서 공소 탄생 미사를 드렸고, 조산리 공소의 첫 회장님이 되신 분이다. 조산리 공소는 해미천주교회 발생지가 된 곳이기도 하다. 그 당시 천주교 신자 가족이 겨우 우리 집 포함하여 3가정, 예비자 4명이 전부였다.

아버지와 류 회장님은 그때부터 신자들의 마지막 떠나는 길을 함께 배웅해 주곤 했다. 그러다 류 회장님이 서울로 떠나고 난 후,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다니며 본격적으로 그 일을 이어 나갔다.

지금까지 모두 합치면 내 손으로 봉사했던 분만 무려 300여 명이다. 이 속에는 신자뿐만 아니라 비신자도 포함되어 있다. 사실 천주교 신자만 하다 보면 이웃에 초상났는데 성당 다니지 않는다고 안 해줄 수도 없다. 만약 안 해주면 더러운 놈이라고 천주교가 욕먹지 않겠나. 욕먹지 않으려고 한달음에 달려가 시신을 수습해 주곤 했다.

때로는 본업인 보일러 수리공을 하면서 염 봉사를 해야하니 너무 힘들어 왜 우리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이런 일을 배우게 했을까?’ 원망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 모든 것도 세상에 보낸 그분의 뜻으로 겸허히 받아들였다.

서울 절두산 순교성지에 기증된 구유
서울 절두산 순교성지에 기증된 구유

# 찢겨진 호야나무 가지로 만든 구유...서울 절두산 순교성지에 기증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와 했던 일들이 참 많다. 1962년 아버지는 나를 데리곤 해미읍성 안 호야나무(회화나무) 아래로 가셨다. 그곳에는 태풍으로 호야나무 가지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찢어진 채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족히 4m 50cm 정도의 높이였으며 정남향으로 뻗어 있던 가지였다.

손수레가 없어 아버지와 나는 호야나무 아래에 앉아 찢겨진 나무를 소여물 그릇으로 사용하기 위해 속을 파냈다. 구유를 만들고 보니 어찌나 가볍든지 손쉽게 옮길 수 있었다.

절두산 순교성지 주임신부가 보내준 기증증서
절두산 순교성지 주임신부가 보내준 기증증서

어느 날 수녀님이 이 사실을 알고 호야나무는 소중한 나무인데 소 밥그릇으로 쓰면 안 된다며 전시를 목적으로 가지고 가셨다. 해미읍성 호야나무는 천주교 박해 시 철사줄로 신자들을 목매어 죽인 처절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나무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구유가 서울 절두산 순교성지 수장고 안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천주교 신자들에게 보여주지 않고 그냥 수장고 안에 보관되어 있다는 말에 순간 부아가 났다. 나는 그 길로 서울로 올라가 보관만 할 거면 돌려달라. 해미성지에 전시해 놓겠다고 요구했고, 그쪽에서는 여기 들어온 물건은 절대 나간 역사가 없다. 딴 방법으로 요구하라는 답변만 할 뿐이었다. 결국 나는 추녀 밑에라도 좋다. 항상 전시해달라고 말하고 내려왔다.

 

# 염을 하다 보면 현대인들의 효에 대한 성찰도 할 수 있다

염을 하다 보면 보고 싶은 자식을 보지 못하고 죽을 때는 유감이 들어 표정이 그다지 예쁘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러니 가족들이 계시다면 부디 임종을 잘 보살펴 드려야 한다.

몇 해 전 노인의 임종을 도와드리려고 간 적이 있다. 그 집 아들은 나를 보더니 볼일이 있다며 나가버렸다. 하는 수 없이 혼자 병실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분이 예수님이 회장님을 보내주셨네라며 아주 편안해하셨다. 나는 임종경을 열심히 읽어드리고 기도를 해드렸다. 그분은 감사를 연발하며 아주 기쁜 마음으로 일주일을 더 사시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만약 돌아가실 분이 천주교인이시라면 유감에 들지 않도록 예수마리아 요셉을 불러 주어야 할 것이며, 임종경을 보아준다면 더욱 편안히 선종할 것이다.

효에 관한 얘기를 좀 덧붙이고 싶다. ‘란 심청이가 아버지 심 봉사를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가는 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살아 있는 동안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 서양에서는 자식이 분가하면 부모가 사는 곳에서 500m 내에 터를 잡는다고 한다. 왜일까? 그것은 가까운 곳에 살아야 자주 부모님 댁을 가볼 수 있고,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간다 해도 그쯤 돼야 식지 않는 거리라는 것이다.

인간의 수명은 유한하다. 누가 먼저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계는 하나인 것처럼 부득이 멀리 떨어져 생을 마감하는 자리에 함께하지 못할 때도 항상 마음과 행동으로 효를 실천하길 당부한다.

다친 후 두 다리가 되어주기도 하는 노인 전동차
다친 후 두 다리가 되어주기도 하는 노인 전동차

# ‘네 몸같이 내 이웃을 사랑하라

나는 일제 암흑기에 태어나서 해방과 정부 수립의 격동기를 거쳐 6·25전쟁이란 전란과 가난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새마을운동과 함께 잘살아 보자는 국가경제개발 약진의 시대 젊음을 불태우며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

지난 201910월 문재인 대통령이 전국경제투어 11번째 일정으로 서산시 해미읍성을 방문했다. 그날을 결코 잊지 못한다. 행사하기 며칠 전, 나는 해미읍성 돌 틈에 난 잡초를 뽑기 위해 7m 가량 높은 사다리 위에 올랐고, 풀을 뽑다 그만 사다리가 넘어지는 바람에 바닥으로 떨어져 큰 중상을 입고 말았다. 특히 엉덩이 부분은 돌담을 비추는 화경에 부딪쳤다. 사람의 목숨이 참 질긴 것 같다. 그 사건으로 나는 18일 동안 무의식 속에 살다가 4개월 10일 만에 겨우 퇴원을 했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높은 곳이었는데도 머리가 먼저 부딪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입에 거품이 배어 나왔다고 했다. 정황으로 봐선 그 정도면 죽을 목숨인데 하늘의 그분이 봤을 때 나에겐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네 몸같이 내 이웃을 사랑하라...

# 에필로그

해미읍성 호야나무에 하얀 눈이 소복하게 내렸다. 찢겨진 호야나무로 아버지와 함께 만들었다는 구유가 신비롭게 느껴졌다.

세상에 보낸 분의 뜻대로 많은 이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평안하도록 보살피시는 류인협 선생. 그분의 손길이라면 죽어서도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산 자가 망자의 등을 토닥토닥 다독여주는 인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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