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요? 90살 부모님이 서로 손을 꼭 잡고 주무시는데 자식이 어떻게 함부로 떼어놓나요!

90살 부모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유병일 서산시귀농·귀촌 회장
90살 부모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유병일 서산시귀농·귀촌 회장

# 프롤로그

하얀 소의 해인 신축년(辛丑年) 새해 아침이 밝았다. 온 국민이 맘고생 한 지난 1, 많은 것들을 흘려보냈고, 많은 것들이 정지된 시간이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서산시 해미면 한적한 시골 마을에 소문난 효자 이야기는 지난해를 이어 새해를 건너면서도 여전히 따뜻한 감동을 주고 있다.

90살 동갑인 부모님 중 아버지는 현재 치매를 앓고, 어머니는 각종 고질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우리 아버지는 젊은 시절 억눌린 것이 많아서 약간 폭력성 치매를 앓고 있죠. 그럴때면 장소가 어디든 무조건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빌면 또 금방 누그러져요라며 이런 모습을 보시고 어머니가 가슴 아파하시는데 아파할 거 하나 없습니다. 이렇게라도 두 분 모두 제 곁에 계시는게 어디예요. 저는요. 제 손으로 두 분을 보살펴 드리는게 살아 있는 기쁨입니다라고 말하는 화가이자 서산시귀농·귀촌협회 유병일 회장.

주위에서 요양원 얘기를 자주 하는데요. 아마도 치매로 대소변처리까지 제 손으로 해야 될까봐 저를 걱정해주신다고 그러시나 본데 절대 안 되죠. 요즘도 가끔 실수할 때가 있는데 그거 못할 거 없잖아요? 자식이 그 정도도 못 하면 어디 자식이라고 할 수 있나요? 그리고 두 분이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요양원을 보내요. 주무실 때는 꼭 손을 맞잡고 주무시는데.”라며 소리 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본지는 한때 CEO로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녔고, 지금은 귀농하여 체리 농사를 짓는 동시에 그림을 그리는 서산시귀농·귀촌협회 유병일 회장을 만났다.

러시아 출장당시 유병일 작가가 그린 무용수
러시아 출장당시 유병일 작가가 그린 무용수

Q 당시 전문 경영인 CEO로 잘 나가던 분이 무슨 연유로 고향에 정착하게 됐나?

러시아에 출장 근무 당시 각막이 벗겨지는 사고를 당했다. 뭔가를 관찰하기 위해 골똘히 바라보는데 물체가 자꾸 흐릿해지길래 안구건조증으로 고생하면서도 순간 잊고 손으로 세게 눈을 비볐던 것이 원인이 됐다.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지만, 러시아에서는 치료가 쉽지 않을것 같은 느낌에 우리나라로 돌아와 3개월 통근 치료로 실명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회사를 경영하던 내게 비상이 걸렸다. 모든 결재가 전자문서로 오갔기 때문에 컴퓨터 보는 시간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눈의 피로도가 극에 달해 눈알이 팽창되는 현상이 오게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실명의 위기에서는 벗어났다지만 눈의 상태가 정상적인 괘도에 오르지는 못한 시점이었다.

그렇지않아도 시골에 부모님 두 분만 계시는데 큰아들이라고 늘 떨어져 있었으니 그것도 죄송한 일이라 차라리 이참에 사표를 쓰고 부모님과 같이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내려와 체리 농사를 짓게 됐다. 벌써 횟수로 따지면 8년째다.

동네분들을 치료해주는 일을 했던 아버지와 조선시대에서나 봄직한 어머니의 단란한 한때
동네분들을 치료해주는 일을 했던 아버지와 조선시대에서나 봄직한 어머니의 단란한 한때

Q 소문에 의하면 아버님이 동네 분들을 치료해주곤 하셨다던데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나?

우리 아버지는 유교사상이 굉장히 짙은 분이셨다. 늘 사서삼경 속 논어 맹자 중용 등의 한 대목을 말끝마다 넣어서 하시곤 했다. 아주 엄하셨고 가장의 역할과 책임감이 누구보다 강한 분이셨다.

당신이 살아오신 길 주위를 돌아보면 그 속에는 늘 아프고 힘든 사람들이 계셨다. 우리 아버진 군대 계실 때 의무병으로 근무해서 제대를 하고 시골로 내려와서도 여전히 그 일을 이어나갔다. 당시에는 의사가 부족하다 보니 종기 나고 아프면 모두 우리 집으로 와 째고 꿰매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면에서도 예방주사 약을 우리 집으로 가져다줄 정도였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을 거치지 않은 분들이 없을 정도였고, 때로는 고민까지 털어놓는 상담사 역할도 아버지가 하셨다. 요즘 말로 사람들에게 멘토같은 역할을 하신 분이다. 그러다 보니 당신의 삶은 하나 흐트러지면 안 된다는 어떤 강박관념 비슷한 게 도사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럴 것 같다. 남들 아프면 고쳐주고 나름 존경받는 인물이니 정작 당신의 힘들고 아픈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으셨을 것 같다. 그러니 그 마음이 곪아 결국 치매가 오지 않았나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Q 서산으로 내려올 때 아버님이 치매라는 걸 알았나?

그때는 몰랐고 살면서 애매하게 치매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가벼운 상태였었다. 그러더니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평소 워낙 완고하셨고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으신 분이라 자식으로서 아픈 후의 아버지 모습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요즘은 본래의 아버지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을 꼽자면 하루 통틀어 겨우 30분 정도나 될까? 이마저도 점점 줄어드는 듯해서 안타깝다.

평소에도 우리 아버지는 식구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참 잘하신다. 하지만 내 가족에게는 굉장히 엄하신 아버지셨다. 그래서일까 당신의 치매는 그동안 참았던 것들이 가족들에게 폭력성으로 폭발하는 형태다. 그럴 때마다 내게는 한가지 비책이 있다. 자식인 내가 무릎만 딱 꿇고 싹싹 빌면서 잘못했습니다를 반복하면 다 풀어진다. 그곳이 길거리 한복판이든 진흙탕이건 나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그런데 어떤 때는 니가 왜 잘못했냐? 잘못한 게 뭐 있냐?”라고 호통을 치신다. 그러면 나는 아버지를 여기까지 오시게 한 것도 잘못한 일이지요. 다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고정하셔요.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면 불같은 분노가 사그라진다.

80호짜리 ‘소’ 그림을 아버지 팔순잔치에 맞춰 완성하고 선물로 바친 유병일 회장
80호짜리 ‘소’ 그림을 아버지 팔순잔치에 맞춰 완성하고 선물로 바친 유병일 회장

Q 아버님이 그림을 상당히 좋아한다는데 그건 어떤 그림인가?

아버지 팔순 때였다. 그때만 해도 내가 직장생활을 하던 때였는데 아버지께 의미 있는 선물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어떤 선물을 할까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그림이었다. 지금 내가 자는 아래채 방이 예전에는 외양간이었다. 우리 5남매를 키우기 위해 소를 키워 팔아 뒷바라지하셨고 또 재산을 불려 나갔던 것이 바로 소였다.

아래채 방에 소가 한 마리 있으면 정말 좋아하시겠지?’ 생각하니 소와 생을 같이했던 아버지 모습이 떠올려져 마음이 분주했다. 소를 그리기 위해 시간만 되면 목장으로 달려가 그림을 그렸다.

드디어 80호짜리 그림을 팔순잔치에 맞춰 완성했고, 작품을 보신 아버지는 한동안 미소만 짓곤 눈을 떼지 못하셨다. “! 이게 소가? 그동안 어디 나갔다가 이제야 왔어라며 곱게 곱게 몇 번이나 액자를 쓰다듬었다.

그 후로도 아버지가 없어 찾아보면 어느새 아래채 내 방에 들어가 우두커니 서서 소 그림을 바라보시곤 하셨다. 아마도 자식들 키우면서 힘들었던 일, 행복했던 순간들을 추억하시는 모양이었다. 가만 계시다가도 가서 우리 소 좀 봐야지라며 소 그림을 보고 오시는 아버지.

지금도 치매로 온전한 정신이 아니면서도 내가 그린 소 사진만은 기억하시고 우두커니 보시다 나오셔선 온종일 소 얘기만 하신다. 어쩌면 내 생애 가장 잘한 것이 팔순 축하 기념으로 소 그림을 그려서 아버지께 바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걷는 것도 불편하신데 최근에는 대상포진으로 병원에 입원까지 하신 어머님
걷는 것도 불편하신데 최근에는 대상포진으로 병원에 입원까지 하신 어머님

Q 어머님도 편찮으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언제부터 편찮으셨는지?

20년 됐다. 노인 양반들 가지고 있는 신경통, 관절염, 속 쓰림 등 소소한 병치레를 우리 어머니도 여태껏 달고 사신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시골에 일이 많다 보니 아파도 허리 펼 날 없이 일하다 그만 (허리)90도로 굽어져 버렸다. 요즘은 지팡이 없이는 걷기가 불편하다.

이런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니는 날이 한해가 다르게 부쩍 많아졌다. 한동안은 걷지 못해서 업고 다니기도 했다. 그것도 모자라 얼마 전에는 대상포진까지 덮쳐 병원에 한동안 입원도 하셨다. 연로하신 분이 그 힘든 병마까지 싸워야 했으니 기력이 많이 약해져 있어 걱정이다.

부모님의 병환이 하루 속히 쾌차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유병일 작가가 그린 해미읍성 안 소나무
부모님의 병환이 하루 속히 쾌차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유병일 작가가 그린 해미읍성 안 소나무

Q 아버지가 치매시라 밤낮 어려움이 많을 것 같다

어려운 것보다 늘 부족한 잠 때문에 어렵다. 내가 자는 곳은 부모님이 주무시는 방 입구 주방이다. 잘 주무시다가도 언제 또 일어나셔서 이곳저곳을 막 돌아다니실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비상대기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웃음).

아버지는 잠시도 방심할 수 없다. 이런 날이 길어지다 보니 이제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왜 일어나는지,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지 알 정도다. 얼마 전에는 갑자기 아버지가 길을 잃어버린 적도 있었다. 잠시 한눈판 사이에 밤에 나가셨는데 글쎄 해미 동암리까지 걸어가 계셨다. 원래는 퇴행성 관절염이라 걷는 것도 불편하실 텐데 치매상태에서는 통증조차 모르시는 것 같다. 집에서 나가는 길이 두 갈래뿐이라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 일로 인해 더욱더 아버지에게는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그리고 이건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내가 부모님 침실 입구 주방에서 자는 이유는, 만에 하나라도 치매인 아버지가 어머니를 해할까 불안해서 더 그렇다.

사실 두 분은 참 다정하시다. 서로서로 얼마나 챙기고 찾는지 모른다. 오죽했으면 어머니가 병원에 계실 때 아버지는 늘 언제 오냐고 어머니를 찾기 위해 벌떡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시곤 하셨다. 하지만 그런데도 폭력성 치매를 앓고 계시는 아버지는 늘 불안할 수밖에 없다.

주무실때도 항상 손을 꼭 잡고 주무시는 부모님을 보면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주무실때도 항상 손을 꼭 잡고 주무시는 부모님을 보면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Q 24시간 부모님을 모시는 걸 보고 주위에서 요양원에 모시라는 얘기는 안 하시나?

그 얘길 많이 한다. 그런데 두 분이 계시기 때문에 한 분을 요양원에 모시면 두 양반 모두 그때부터 스트레스를 받아서 오래 사시지 못한다. 서로 의지하는게 매우 크다. 엄청나게 사랑하신다. 주무실 때도 두 손을 꼭 잡고 주무신다.

처음에는 잘 때 나란히 주무시는데 나중에는 이불은 잘 덮고 주무시는가 싶어 들어가 보면 아버지하고 어머니가 손을 맞잡고 주무신다. 그런 걸 보면서 어떻게 함부로 떼어놓나. 그건 절대 안 된다. 그럼 안되고말고라고 다시한번 다짐한다.

사실, 지금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모두 대소변을 못 가린다고 하더라도 그거 못할 거 아니지 않나. 우리 아버지는 가끔 정신이 없으실 때면 생각 없이 생리적 현상을 자제하지 못하시고 방이건 어디건 자제가 안될 때가 있다. 그러면 그걸 자식이 치워야지 누가 치우겠나. 우리 집에 요양보호사가 오시지만 나는 절대 그분에게 처리하라고 하고 싶진 않다. 내가 하지. 우리 아버진데…….

사실 이렇게라도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봐야 10, 그렇지 않으면 5년이다. 그 기간도 못 한다면 나중에 가서 내가 얼마나 가슴칠 것인지 불을 보듯 뻔하다. ‘아이구 나를 힘들게 했어도 그때가 좋았는데.’ 하며 후회해 봤자 이미 때는 늦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부모님이 막 모질게 해도 그게 그렇게 원망스럽지가 않다.

에필로그

주말이면 부모님을 돌본다며 형제들이 교대로 내려온다는 유병일 회장은 다들 위치에 맞게 효도를 하고 있는 동생들이다. 특히 바쁜데도 내려와서 , 오빠 잠 좀 자라고 말해주는 형제들이 너무 고맙다는 유병일 회장.

명심보감에 보면 이런 글귀가 있다.

어린 자식의 오줌과 똥 같은 더러운 것은 그대 마음에 거리낌이 없고, 늙은 어버이의 눈물과 침이 떨어지면 도리어 미워하고 싫어하는가. 여섯 자나 되는 몸이 어디서 왔던가. 아버지의 정기와 어머니의 피로 그대의 몸이 이루어졌네. 그대에게 권하노니 늙어가는 어버이를 공경하여 모시라. 젊었을 때 그대를 위하여 힘줄과 뼈가 닳도록 애쓰셨느니라

 

 

 

저작권자 © 서산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