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인터뷰】 축구선수가 꿈이었던 안원기 서산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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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인터뷰】 축구선수가 꿈이었던 안원기 서산시의원
  • 최미향 기자
  • 승인 2021.01.0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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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사회 경험을 정치에 녹여내고 싶어 의원이 됐다
축구선수가 꿈이었던 서산시의회 안원기 의원
축구선수가 꿈이었던 서산시의회 안원기 의원

서산시대 핫 코너 릴레이인터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서산시의원의 근황과 생각들을 직접 묻고 시민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Q 성장 과정에 대해 말해달라

벌써 60년 가까이 지난 과거의 일이다. 서산시 석남동(현 덕지천동)은 내가 태어나고 국민학교 입학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어느날 가정 형편이 넉넉지 못했던 탓에 아버지의 공사현장 근처로 이사를 했다. 그곳이 바로 외갓집 근처인 서산군 운산면이었다.

학교 문턱도 밟아본 적 없는 부모님께서는 오롯이 노동으로 가정을 꾸려 가시며 자식 다섯을 거둬나가셨다. 옴팡 집에서 다닥다닥 칼잠을 자야 했던 그 시절, 먹고 살아야 했기에 부모님은 낮일도 모자라 밤 깊도록 손가마니 두세 닢은 짜고서야 비로소 잠자리를 트셨다.

그때는 겨울도 왜 그리 추웠던지 잠자는 머리맡으로 얼음바람이 지나곤 했다.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다. 인생 최고의 고수이자 가장 높은 스승인 우리 부모님이 계셨기에 말이다.

Q 학창시절 기억에 남는 일은?

학창시절을 말하면 주로 공부에 얽힌 얘기를 할텐데 나는 공교롭게도 운동과 노동을 얘기해야 할 것 같다.

겹벚꽃으로 유명한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에 있는 운신국민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나는 기계체조 선수였다. 시쳇말로 인기 짱이었다. 운동회 때마다 단골로 공중회전, 측전에 이은 백핸드 스프링, 뜀틀 그리고 볼 붙인 링 사이를 바람과 같이 날아서 통과하는 시범을 선보였다. 그럴 때면 학교 운동장은 열광의 도가니로 바뀌곤 했다.

해미중학교 시절에는 축구선수로 활동했다. 국가대표선수 여럿을 배출한, 알아주는 축구 명문교였으니 희망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실력과 뒷받침 그리고 코치 선생님의 추천이 절대적이었던 축구계에서 가난하고 숫기 없는 내가 살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나는 운동을 중단하는 선택을 했다.

그후 운 좋게도 서산농고 3년 장학생으로 부모님의 학비 걱정을 덜어 드렸다. 5리를 걸어야 북적이는 완행버스를 타던 고교시절, 농부인지 학생인지 헛갈릴 정도로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삽자루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Q 부모님의 교육관 그리고 나의 자녀에 대해 교육관은?

당시 상황으로 봤을 때는 당신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교육은 어쩌면 낭비로 생각했을 수도 있는데, 가난했던 우리 부모님은 다섯 남매를 고등교육까지 마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 주셨다. 지금 와서 보면 아무리 힘들어도 배움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신 게 아닌가 생각된다.

나 또한 우리 부모님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배워야 한다는 일념하에서 한글도 모르는 아이에게 피아노, 태권도 등 두세 곳의 학원을 노크하기도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적성에 맞는 학과를 졸업했고, 그리고 현재 선택한 직업에도 만족해하는 눈치다. 대견한 생각이 들면서 반듯하게 자라준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

Q 청년 시절의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부모님의 성화로 쟁쟁한 경쟁률을 뚫고 전투경찰에 입대했다. 숱한 구타와 얼차려를 당하면서 결국 나는 경찰공무원이 되기를 포기했다. 솔직히 맞아 죽을 거 같았기 때문이었는데 전후 사정을 모르시는 부모님은 대단히 실망하는 눈치였다.

전역 후 서울 생활을 잠시 하다 고향으로 내려와 예식장을 운영했다. 사진과 비디오 촬영을 하기 위해 서·태안 등 안 가본 동네가 없을 정도로 열심히 뛰었다.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각종 단체에서 경험과 인맥도 쌓았다. 서산시청에서 비서실장으로 근무하며 행정경험과 실무경험 등 다양하고 값진 경험도 했던 시절이었다.

Q 나의 사랑 나의 결혼

한 살 아래의 아내와는 1983년쯤 전투경찰로 검문소에 근무할 때 처음 만났다. 사람에게 있어서 인연은 억만 겹의 시간으로 가로막아도 무색하리만큼 참 질긴 거 같다. 어느 날부터 연락이 끊기고 보이질 않았다. 우리 둘의 만남은 거기까지가 끝인 줄 알았다. 전역 후 궁금한 생각이 들어 수소문 끝에 그녀를 만났고, 우리는 그렇게 다시 사랑에 빠졌다.

우리의 만남을 반대했던 처가, 하지만 대전의 어느 중식당에서 탕수육과 캡틴큐를 앞에 놓고 결혼을 허락받았던 그 시간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우리는 요즘 보기 힘든 약혼식 후 가정을 꾸려 두 아이를 낳아 키웠다. 이런 질문은 늘 마음을 설레게 한다.

Q 시의원이 되고자 했던 이유는?

1998년 여야 합의로 지구당을 폐지하면서 당의 사무국장직에서 퇴직하게 됐다. 이미 몇 차례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의 실무를 경험했던 터였다. 선거철만 되면 여기저기서 부름이 계속되었고 그래서 선거판을 떠날 수가 없었다.

또 먼저 정치를 경험하신 선배들의 젊어서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하고, 충분히 사회 경험을 쌓은 뒤에 정치해라. 그래도 늦지 않다는 충고를 해주셨다.

공직을 거쳐 50대 중반의 나이에 처음으로 정치에 도전했다. 정치인에게 있어서 다양한 사회 경험은 곧 재산이다. 나는 내가 가진 재산을 의정활동에 녹이고 싶었다. 그런 후보가 당선되었을 때만이 시민에게 손해가 적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앞으로도 나는 많은 사회 경험과 특유의 부지런함, 그리고 소신을 지켜 시민들에게 나아갈 것이다. 의정활동 3년 차를 맞으면서 다시 한번 마음 다잡는다.

Q. 시의원이 되고 나서 힘들었던 일

선출직 공직에 출마하는 후보는 누구를 막론하고 당선을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유권자를 설득한다. 온갖 기발한 아이디어가 동원되는가 하면 현학적인 용어와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자신을 포장하기 마련이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제8대 서산시의회가 온 시민의 축하와 관심을 받으며 화려하게 출발했다.

동시에 시민들께서는 시의원에게 주문한다. “의원 본연의 역할에 직시하며 주민의 삶과 연결된 의정활동을 충실히 해주기 바란다며 말이다.

모름지기 시의회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최전선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만들어나가는 곳이다. 시의회를 구성하는 시의원들은 그들을 뽑아 준 주민들을 왕처럼 떠받들어 그들의 민원을 머슴처럼 들어주고 해결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소신으로 지역을 위해 뛰는 의원들을 주민들이 기억할 것이다.

밥값은 해야 하지 않겠나. 더 이상의 부끄러운 모습은 시민 앞에 죄짓는 일이요, 낭비임을 기억해야겠다.

Q. 서산시가 나가야 할 방향, 중점사항은?

서산시의 무한한 성장 동력을 늦추거나 멈추게 해서는 안 된다. 미래 100년을 내다보고 서산시의 여건 및 특성에 부합하는 전략산업과제를 수립해야 한다. 이로써 국가 정책을 선점하고 정부 정책 기조와 연계하여 서산시의 경제를 한 단계 더 도약시켜야 한다. 지속 가능한 성장을 견인할 수 있도록 국비 지원을 끌어내야 한다.

또한, 성장역량 강화를 위한 인프라 구축을 통해 산업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 및 기술역량 등 기업의 지속 성장 지원시스템을 구축하여 선순환하는 지역경제 생태계 조성이 절실한 과제다.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2021년 신축년 흰 소의 해가 밝았습니다. 코로나19가 우리의 일상을 점령한 지도 어느새 1년이 되어갑니다. 이젠 건강과 안전을 중요 가치로 세우고 긍정의 힘으로 지혜와 슬기를 발휘할 때입니다.

저는 시의원의 역할을 직시하며 초심, 겸손, 민생 의정에 더욱 매진하겠습니다. 매일 매일 건강하시고 행복한 하루하루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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