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만 아프고 힘들까요?”...바람 한번 지나가면 지금 있는 자리가 세상 가장 편안한 쉼터

장애인들과 함께 걸어가는 서림케어드림(구 서림복지원)’ 임태성 원장
장애인들과 함께 걸어가는 서림케어드림(구 서림복지원)’ 임태성 원장

#프롤로그

문득 마음껏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삶의 언저리가 때아닌 아픔으로 다가올 때는 서럽게 울고 하늘 한번 쳐다보면, 또 서서히 괜찮아질 때가 있었다. “왜 나만 아프고 힘들까요?”라고 묻다가도 어느날 바람 한번 슬쩍 지나가면 또 그 자리가 세상 가장 편안한 자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아플 때는, 힘들 때는 현실을 피하지 말고 내 안에 머루를 수 있는, 머물다 갈 수 있는 자리 하나쯤은 만들어 주자. 장담컨대 영원히 머물지는 않는다. 이게 세상이고 이게 삶이다.

22일 만난 서산시 서림케어드림(구 서림복지원) 임태성 원장의 마음도 그랬다. 그에게 있어 큰딸의 지적장애 2급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발버둥 치며 현실을 부정했지만, 수녀님의 한마디 말씀에 그만 무릎을 꿇고 참회의 기도를 했던 임태성 원장.

“97세 할아버지에게 말동무를 해주는 것도, 심부름하며 살갑게 챙겨주는 사람도 바로 우리 큰아이다. 또 내 눈을 맞추며, 내가 살아가는 길에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것도 바로 이 아이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고 우렁차다.

오산동에 있는 1만 평을 기증하여 서림복지원(현 서림케어드림)을 짓는다는 아버지 말씀에 왜 굳이 복지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시절, 하지만 내 자식이 막상 장애인이 되고 보니 이렇게 진행한 것도 다 운명이었구나!’란 생각을 했다.”

직원들이 받는 급여 명세서 뒷면에 <이 급여는 우리 서림케어드림장애인들이 지급합니다. 만약 생활 장애인들이 우리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소중한 일터를 잃게 됩니다.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하여 생활장애인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성심을 다합시다>란 글귀를 써넣은 장애인 생활공동체 서림케어드림(구 서림복지원) 임태성 원장을 찾아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공군20전투배행단에서는 해마다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위해 '부대 방문행사'에 초대해 주었다.
공군20전투배행단에서는 해마다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방문행사'를 열어 아이들을 초대해 주었다

Q 어릴 적 부모님과 떨어져 서울살이를 했는데 당시 기억나는 이야기를 해달라

8남매 중 누나만 5명인 집에서 태어났고 일찌감치 서울로 유학해야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누나가 5명이니 여자들 틈에 껴서 소변도 앉아서 누겠다는 부모님의 염려 때문이었다. 물론 단순히 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래서 (서울)올라갔다는 얘기를 듣고 나중에는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우리 집은 1957년부터 부춘동에 터를 잡고 대대로 살아왔다. 그 덕에 나는 부춘국민학교에 다녔고, 자랑 같지만 4학년 때까지 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5학년, 누나가 있는 서울로 전학을 했다. 하지만 올라간 그해 친 시험에서 나는 겨우 반에서 30등을 했고, 안타깝게도 이 등수는 6학년 때 올라갈 때까지 그대로 이어져 가족들을 실망시켰다.

성적이 도대체 뭐라고 내 나이 136학년 때 못나게도 나는 처음으로 자살이란 단어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엄마도 없이 대학교 4학년 누님과 살았던 서울 생활, 부모님에 대한 보고픔과 성적에 대한 좌절, 그리고 빨리 찾아온 사춘기로 말수를 잃어가기도 했다.

그러던 차, 내 삶의 터닝포인트가 찾아올 줄이야. 서산시 운산면 출신 담임 선생님을 운 좋게 만난 나는 선생님이 운영하는 그룹과외반에 들어가는 기회를 얻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해 반에서 드디어 9, 그리고 다시 5등을 하는 반전을 일으켰다.

당시는 교사라도 얼마든지 개인과외를 할 수 있던 때였다. 선생님은 고향 제자라고 그래도 나를 챙겨 반석(?) 위에 올려주는 고마움을 베푸셨다. 선생님 덕분에 개미가 벽을 타고 올라가듯 한 땀씩 등수를 치고 올라간 나.

그렇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엄마를 그리워하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시험이 끝나고 긴장이 풀리면 엄마가 그렇게 보고싶어 몸살을 앓아야 했다. 서러워 눈물을 바가지로 흘렸던 시간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그립기만 하다.

장난기가 많았던 고등학교 시절, 아마도 임 원장의 장난기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역으로 표현했던 '웃음'은 아니었을까!
장난기가 많았던 고등학교 시절, 아마도 임 원장의 장난기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역으로 표현했던 '웃음'은 아니었을까!

Q 경신고등학교 시절, 유난히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면?

내 속에 있는 장난기가 서서히 목을 타고 올라오던 절정의 때가 바로 그때였다. 가만 보면 장난기는 누나들 틈에 있지만 여자처럼 자라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어느날,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 갓 대학을 졸업한 생물 선생님께 갑자기 윙크를 해버렸다.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윙크를 받은 여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손톱을 펴라고 하시더니 30cm 자로 눈물을 흘리면서 내리치기 시작했다. 한 대, 두 대…….

니가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러냐며 무지막지하게 때리더니 그것도 모자라 당시 총각 선생님이었던 체육 선생님께 일러바치셨다. 그것이 사건이 되어 체육 선생님에게 불려가 나는 또 평생 맞을 매를 다 맞아 보았다.

평소 장난기는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모범생이었던 반 학생이 매를, 그것도 흠씬 맞았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교무실에 퍼져 나갔다. 이 사실을 접한 해병대 출신 우리 담임 선생님은 바로 체육 선생님을 쫓아가 따지기도 했다. 선생님들끼리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 일로 근신을 해야 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고등학교 3학년 내내 조신한 생활을 해야 했다.

피할수 없는 것들에 대한 아픔도 있었지만 추억도 많았던 대학시절
피할수 없는 것들에 대한 아픔도 있었지만 추억도 많았던 대학시절

Q 연세대학교 연세역도부 동아리를 창설했다고 들었는데 그때 일과, 언더그라운드 가수들과의 관계도 함께 듣고 싶다.

아 그 유명한 연세역도부를 다 알고 계시는구나~ 지금도 기억나는 추억의 한 페이지다. 연세대학교 생화학과에 다니면서 1980연세역도부를 직접 창설했다. ‘힘을 키움으로써 정도를 걷는다는 의미의 역도부는 실제로 역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헬스를 통하여 각자의 목적과 체형에 따라 몸매 관리 등 다양한 활동을 추구하는 동아리였다.

동아리를 만들었으니 제1회 선발대회를 해야지 않겠나. 행사를 하기 위해 팸플릿을 만들고 앙드레김이라는 초대형 스폰스를 직접 발로 찾아서 매칭을 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앙드레김 이름을 딴 특별상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언더그라운드 출신인 들국화 전인권 씨와 신촌블루스 등 여러 가수와의 만남은 의외의 곳에서 이뤄졌다. 우리 만남은 상갓집이었다. 학생들이 돈이 있을 리 없지 않나. 술을 먹다가도 술값이 떨어지면 연대 세브란스 영안실로 찾아가 상주인 척 심부름을 해주고 술을 얻어 마셨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햇살 가득한 학교 로비에 앉아 꾸벅꾸벅 졸면서도 공부를 했다. 그때는 참 낭만이 있어 좋았다.

비단 우리만 그랬겠는가! 가난을 달고 사는 언더그라운드 출신 가수들 대한민국 록의 대부 전인권 씨와 신촌블루스 등도 우리와 다를 바 없었다. 상갓집에 가면 늘 보이던 긴 머리의 남자들, 그들도 우리처럼 술을 얻어마시는 모습이었다. 오죽했으면 나중에는 눈인사를 나눌 정도였을까. 아마도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내 대학시절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방황도 참 많이 했지만, 그에 비례하여 또 추억도 많이 간직한 시절을 보낸 것 같다.

당시 방송국에서 근무했던 아내와 함께
긴 세월 부모님을 모시며 세 아이를 키워낸 아내에게 가장 미안하다고 했던 임태성 원장

Q 어떤 연유로 서산으로 내려와 당시 서림복지원(현 서림케어드림)을 운영하게 됐는지?

졸업하면서 럭키금성(LG)에 취직하고 연수에 참여하던 찰나, 교수님이 나를 불렀다. “아버님을 도와야지 어디서 뭘 하려고 하냐며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것을 주문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길로 아버님이 운영하는 공주시 유구에 위치한 양조장으로 내려갔고, 다시 서산 정부양곡도정공장, 마지막으로 안착한 곳이 지금의 서산시 음암면 석동로 169, 사회복지법인 서림복지원(현 서림케어드림)’이었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서림케어드림을 하게 된 것은 신의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큰아이가 6살 때였다. 다른 집 아이들보다 발달이 현저히 늦어지는 걸 느꼈지만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나중에 가서야 지적장애 2급이란 사실을 알았다. 토네이도가 덮친 것 같았다. 방황을 하기 시작했다. 왜 하필 나여야 하는지, 가톨릭 신자였음에도 십자가를 부숴버리며 몸부림쳤다. ‘다 필요 없다며 성당으로 가던 발걸음조차도 끊어버렸다.

그러던 어느날 수녀님께서 나를 찾아와 에밀리안 아빠시죠? 성당에는 왜 안 나오세요?”라며 오만하다고 말씀하셨다. “따님 일로 괴로워하시는 거 너무 잘 알지만, 그것은 당신이 알게 모르게 지은 죗값을 딸이 받는 것입니다. 진짜 화를 내야 하는 것은 에밀리안인데 왜 당신이 화를 내고 있습니까?” 그때서야 머리에 불이 번뜩 들며 정신이 돌아왔다.

그때 바로 세례를 받았고 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등록하여 다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돈 버는 사업은 이제 그만하자. 내 인생은 이 정도면 됐다. 잘된 친구들 부럽기는 하지만 내 길은 장애인들과 함께 가는 길이어야 한다라며 무릎을 꿇었다. “당신이 미안해야지 왜 애매한 하느님을 미워하냐는 수녀님의 말씀이 뇌리를 꽂혔던 그 날, 나는 장애인들의 눈물을 가슴으로 받아낼 수 있는 진실한 임태성이가 됐다.

"여기 있는 아이들은 모두 내 자식"이라고 말하는 임태성 원장. 작년 장애인의 날에 맹정호 서산시장이 방문하여 즐거운 한때를 가졌다.
"여기 있는 아이들은 모두 내 자식"이라고 말하는 임태성 원장. 작년 장애인의 날에 맹정호 서산시장이 방문하여 즐거운 한때를 가졌다.

Q 내게 서림케어드림은 어떤 곳인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우리 큰딸이 있는 이곳 서림케어드림, 여기 있는 아이들은 모두 내 자식이다. 저마다의 애틋한 사연을 담고 이곳에 온 장애인 200여 명 내 자식들과 장애인일 수 있는 비장애인 직원 120여 명이 엄숙한 사명을 갖추고 살아가는 소중한 집이다.

코로나가 심해지는 요즘은 항상 불안하고 조마조마하지만 그럴수록 긴장 상태를 늦추지 않으려 정신 바짝 차리고 있다. 수시로 교육을 받으며 마음을 다잡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때로 사람들이 묻는다. “원장님, 아이들을 보듬다 보면 가끔, 아주 가끔 좋은 부모와 나쁜 부모가 눈에 보이십니까?” 참 몸둘바를 모를 질문이지만 그럼에도 눈에 보인다는 것이 내 대답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어느 부모는 애들끼리 놀다 다쳐 병원에 갔다 치자. 의사 선생님께서 심각하게 다쳤다. 정밀촬영을 해보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고 하고 검사를 해봤는데 별거 아니네요라고 하면, 거짓말처럼 여기서 딱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안도의 숨을 내쉬는 부모가 있는데 이런 분들은 착한 부모다. 하지만 반대로 대단히 실망한 부모는 나쁜 부모 아니겠는가. 하지만 어떤 부모였던 간에 내게 온 이 아이들은 모두 내 자식이란 것에는 토를 달지 못한다.

지금도 나는 이런 마음이다. 직원들이 무단 지각을 하더라도 이건 용서가 된다. 다만 아이들한테만은 이유 불문 잘하라는 거다. 그래서 봉급명세서 뒤에는 이 글귀를 넣었다.

이 급여는 우리 서림케어드림 장애인들이 지급합니다. 만약 생활 장애인들이 우리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소중한 일터를 잃게 됩니다.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하여 생활장애인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성심을 다합시다.”

현관을 열면 천정에 이런 글귀가 붙여져 있다. '모든 인간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현관을 열면 천정에 이런 글귀가 붙여져 있다. '모든 인간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 에필로그

임태성 원장은 직원들에게 설립자에게 고마워하지 마라. 당신들의 봉급은 우리 아이들이 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정신 똑바로 차리자. 우리 복지원 안에서 이뤄지는 인권침해는 그것이 누구든 간에 추호도 용서하지 않는다며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기본적 권리에 대한 중요성을 늘 강조한다는 임태성 원장.

인터뷰 말미에 장애 노인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노인요양원을 세우고 싶다. 요즘은 예전과 달리 장애를 앓더라도 60세를 넘기는 사례가 많다. 생애주기별 프로그램으로 질을 높이고 보다 행복한 여생을 보낼수 있도록 요양원을 열고 싶은 것이 장기적 소망이라고 말했다.

인터뷰하는 동안 간간이 우리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던 청년의 미소가 순수하고 따뜻하다. 오늘은 포근한 바람이 종종 불었고, 햇살은 모든 곳에 내려져 밝게 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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