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들의 행복한 삶, 제도권 안에서는 가능할 것이란 희망을 품고

천수만에서 꿈을 키운 서산시의회 가충순 의원
천수만에서 꿈을 키운 서산시의회 가충순 의원

서산시대 핫 코너 릴레이인터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서산시의원의 근황과 생각들을 직접 묻고 시민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Q 어릴 때의 의원님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천수만 언저리 태안반도와 마주보고 있는 적돌만의 작은 농촌 부석면 갈마리 561번지에서 2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집에서 바다까지 300정도 떨어져 늘 백사장이 놀이터였고 벗이었다.

자연이 선사한 풍요로움이 나를 우량아로 만들었을까! 그 덕택에 크면서 또래들보다 체격이 컸던 나. 당시는 먹고 살기가 퍽퍽한 세상이어서 그런지 튼실한 나를 마을 사람들은 유난히 이뻐하셨다. 부모님 말씀에 의하면 동네 아저씨 한 분은 갑순이가 이쁘고 탐 나서 자식 하나를 더 나았다는 우스갯소리를 다 했단다.

어릴 때부터 친구들이 유난히 많았던 나, 특히 한동네 동갑내기 친구가 무려 50명이 넘었다면 과연 독자들은 믿을 수 있을까? 지금 출산율과 비교하면 정말 아찔아찔하다.

Q 성장 과정에 대해 말해달라

우리 집은 동네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 늘 북적북적했던 것 같다. 특히 우물이 딱 두 군데 있었는데 그중 한 곳이 우리 집 우물이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우물은 예부터 정보를 나누던 곳 아니었나. 우리 집 우물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만보면 지금말로 커뮤니티센터였던 것 같다.

우리 마을은 반 농·어업 형태로 해산물이 상당히 풍부한 곳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겨울에는 굴을 따서 생계를 유지하던 우리 부모님은 사계절 내내 농한기가 없다 보니 내 눈에는 늘 그렇게 힘들게 보였다.

엄마가 바다에 나가면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는 지게와 리어커를 가지고 바다로 나가 아침부터 굴뽁(석화)을 따 놓은 엄마의 생산물을 받아 싣고 오곤 했다. 나보다 4살 위의 형이 있었지만 엄마는 항상 나만 바다로 불러냈다. 순진하게도 그때는 엄마가 나만 좋아하는 줄 알고 내심 힘든 줄도 모르고 우쭐했다.

Q 학창시절 혹시 기억나는 일화는?

국민학교를 졸업하던 날, 6명인 우리 가족은 중국집으로 몰려갔다. 아들이 졸업했으니 이른바 우동으로 파티를 해준 셈이었다. 내 생애 첫 외식날이었던 그날, 그렇게 맛있는 우동은 난생처음 먹어봤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도 평생 그 맛을 간직하기 위해 우동만은 절대 먹지 않는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날, 부끄럽지만 이성이란 오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아마도 이것이 첫사랑이었던 것 같다. 안타까운 것은 현재 그 친구는 하늘나라에 별이 되어 밤하늘을 수놓고 있다. 이른 나이에 먼저 간 친구가 참 안타깝다.

아무튼 성장과정 중 여러 가지 일들이 추억이 되어 내 유년시절을 보석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그 속에는 고등학교 3학년 교련시간에 당시 친구·후배들과의 사교성과 리더십을 인정받아 대대장을 했다는 기억도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Q 부모님의 교육관은?

교육관보다 우리 부모님은 당신들이 배우지 못한 한을 자식들에게 풀기라도 하듯 자나 깨나 공부하란 소리를 늘 입에 달고 서셨다. 그 이유 때문인지 형님과 동생들은 공부를 어지간히 한 듯하다. 그중에서도 학교 갔다 돌아오면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공부만 했던 사람이 바로 손위 형님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지금은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다.

형제들에 비해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걸 상당히 좋아했다. 그러니 공부만이 살길이라 생각한 부모님은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그랬던 내가 아빠가 됐고 바쁜 집사람 대신 학부모회에 들어가 15년 동안 활동하게 됐다. 그 덕인지 아이들이 건강한 인성으로 잘 자라준 듯해서 고맙다.

Q 청년 그리고 나는?

생일이 같은 날이었던 동네 친구와 해병대를 지원했다. 군 생활은 나를 개조하는 좋은 기회였다. 적극적이면서 용기를 낼 때는 과감히 낼 줄 아는 인간형으로 변화됐다. 그리고 제대 후 4년간의 영업직 업무에 종사했던 시간은 나를 성장시키는 아주 좋은 경험이 됐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들과 소통하며 지낸 나날들, 그것은 지금까지 살아오는데 있어 큰 자원이자 원동력이다.

Q 나의 사랑 나의 결혼

923(자영업)개업 준비를 하며 공무원인 아내를 만나 2년간 연애하고 결국 결혼을 했다. 빚으로 시작한 자영업자 남편으로 인해 이사만도 무려 7번을 했던 우리 집. 남편이라고 맨날 봉사활동에만 치중하다 보니 생활비는 고사하고 은행이자 갚는 것도 빠듯할 정도였다. 그러니 57년 인생을 살면서 미워하는 딱 한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바로 내가 아닐까 싶다. 또 살면서 제일 미안하게 생각하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내 아내이기도 하다.

라이온스 회원들과 함께 밥차봉사를 하면서
라이온스 회원들과 함께 밥차봉사를 하면서

Q 시의원이 되기까지

1992년 고향 서산에 내려오면서 여러 단체와 인연을 맺고 봉사활동을 하게 됐다. 그때만 해도 정치를 생각해 본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러다 삶의 터닝포인트가 된 것이 바로 일본여행이었다. 당시 관광가이드가 앞으로 한국은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실버산업이 일본을 따라갈 것이다. 그러니 실버산업에 투자하라는 소리를 했다.

그 소리가 왜 그렇게 크게 들렸던지. 그것이 계기가 되어 2010년 한서대학교 노인복지학과에 편입을 했고, 2년간 학업에 매진했다. 그 후 어르신들의 행복한 삶을 고민하다 보니 나더러 정치에 꿈이 있는 것 아니냐?”라는 질문을 던졌고, 혼자는 하기 힘든 일도 제도권 안에서는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정치에 나섰다.

재밌는 것은 선거 때였다. 당시 서산시내에서만 봉사활동을 하다 보니 아는 사람이라곤 대부분 시내권 안에 계시는 분들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지역구를 서산시 부석·인지·팔봉으로 바꿔 나가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2017년부터 인사를 다녔다. 2018325일 지역구가 또다시 변경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갑자기 서산시 부석·해미·고북면으로.

사실 서산시 부석면이 고향이지만 사회활동이나 봉사활동을 그곳에서 한 것이 아닌 데다, 선거가 70일 정도 남은 상황에서 지역구 변동은 참으로 혼란스러웠다.

Q 의원이 되고 나서 힘들었던 점은?

처음 해 보는 의원이니 서툰게 많았다. 특히 의원들끼리 견해가 달라 벌어졌던 문제들은 내상(內傷)을 받을 만큼 힘들었다. 서로들 견해차가 커 본회의장 표결까지 갔던 일, 또 그것이 패했을 때의 쓰라림. 가만 보면 사람으로 힘들지만 사람으로 치유받는다는 말이 사실인 듯싶다. 당시 주민들의 격려로 빠른 치유를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Q 서산시가 나가야 할 방향

서산시를 동서남북으로 놓고 봤을 때 동쪽은 가야산, 서쪽은 팔봉산, 북쪽은 황금산, 남쪽은 도비산이 있다. 좀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 보면, 동쪽은 삼화목장과 개심사, 보원사지와 해미읍성을 중심으로 서산관광의 메카로 일컫는다.

서쪽은 가로림만 해양정원을 통해 생물다양성과 해양생태계를 자원화한 관광지로, 남쪽으로는 간월도 관광지 웰빙특구와 도비산 개발을 통해 서산의 균형발전을 이끌어가야 한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지곡의 자동차와 대산석유화학단지를 중심으로 산업벨트를 형성해야 한다.

개인적 생각으로는 외연 확장을 통한 개발보다 중소도시답게 내부 압축을 통해 구도심권 공동화 현상을 막고 적절하게 균형을 맞추는 도시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Q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지역구 현안은?

웰빙특구지정 및 간월도 관광지 지정 후 10년이 지났다. 빠른 개발이 필요하다. 또한 유교권 문화개발의 일환인 도비산과 유방택 기념관을 중심으로 하는 밤하늘 산책원개발은 서산의 균형추를 맞추는 일이다. 아울러 반양초등학교 라키비움의 건립은 해미읍성과 연계를 통한 관광의 축으로 활용되도록 빠른 개발이 필요하다.

Q 시민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달라

코로나19의 출현으로 국가의 체계가 흔들리고 일상의 생활이 무너진 지금, 우리 시민은 사회적 거리두기와 개인위생을 철저히 지켜 코로나19를 하루빨리 극복하는데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시민을 위한, 시민에 관한, 시민에 의한 서산시를 만드는데 우리 모두가 함께하자는 말씀을 드린다. 날이 많이 추워졌다. 아무쪼록 건강 잘 챙겨 행복한 12월 마무리 잘하시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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