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자원봉사 대통령 표창을 받는 서산시 '늘보람봉사단' 김미화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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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자원봉사 대통령 표창을 받는 서산시 '늘보람봉사단' 김미화 회장
  • 최미향 기자
  • 승인 2020.12.14 23: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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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활동은 내가 살 수 있는 원동력이자 내 생명줄을 이어주는 매개체
자원봉사 대통령 표창을 받는 '늘보람봉사단' 김미화 회장
자원봉사 대통령 표창을 받는 '늘보람봉사단' 김미화 회장

# 프롤로그

그녀 늘보람봉사단 김미화 회장이 봉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광사 법장스님으로 인해 생명나눔실천회에 가입하면서 일정금액 후원은 물론, 관내 백혈병 환우 5명을 일주일에 한번씩 혈소판 치료 차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데리고 다니게 됐다.

부득이하게 내가 갈 수 없을 때는 우리 큰아들이 환우들을 데리고 서울로 다니곤 했다어린 아이들이다보니 아무리 바쁘더라도 엄마를 대신해 꼭 데리고 갔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며 눈길을 떨어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2005년 어느날, 그녀의 큰아들 몸에 청천벽력 같은 급성백혈병이 몰아닥쳤고, 그때부터 투병생활을 하던 아들은 17개월 만인 2007, 자신의 두 아이를 남겨두고 하늘나라로 떠나버렸다.

아들을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큰아들이 남기고 간 두 명의 손주들과 간암 투병을 하는 남편, 형을 잃은 슬픔에 빠져있는 작은 아들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죽을 만큼 힘든 고통 속에서 아픔을 잊기 위해 미친 듯이 봉사활동에 매달렸다는 김미화 회장.

결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내 몸이 닳아 없어지는 그날까지 봉사활동을 하다 내 아들이 있는 하늘나라로 갈거다. 그러니 이 세상에 무슨 욕심이 있고, 무슨 애착이 있겠나. 이렇게 봉사하다 생이 끝나면 훌쩍 우리 아들 만나러 가면 그만인데. 그때는 이렇게 말하려 한다. ‘아들, 엄마 하는 거 봤지? 널 대신해 열심히 봉사하고 왔단다. 이제 우리 고단한 몸 뉘고 지금부터는 행복하게 살자라고.”

서산시대는 지난 5자원봉사의 날에 맞춰 늘보람봉사단 김미화 회장이 대통령 표창을 수상한다는 소식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가 인터뷰를 요청했다.

지난해 서산시 자원봉사자의 날 기념 3000시간 봉사 시간 시상식에서 맹정호 서산시장에게 뱃지를 전달받고 있다.
지난해 서산시 자원봉사자의 날 기념 3000시간 봉사 시간 시상식에서 맹정호 서산시장에게 뱃지를 전달받고 있다.

Q 2020년도 자원봉사 대통령 표창을 받게 됐다. 먼저 축하드린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린다

상 받으려고 봉사를 한게 아닌데 그저 쑥스럽다. 그리고 나보다 더 열심히 하신 분들에게 미안하다. 내게 주는 상은 우리 회원들 개개인에게 돌아가는 상이라 생각한다. 잘 따라준 우리 늘보람봉사단 회원들에게 제일 고맙다. 지원이라곤 단 1도 없는 우리 늘보람봉사단, 가족 같은 회원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오늘의 영광은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지난번 봉사했던 자료를 관계기관에서 제출해 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봉사한 지는 30년이 넘었지만 자료가 있을리 없다. 상 받으려고 한 것도 아닌데 무슨 자료를 남겼겠는가. 그랬는데 이렇게 큰 상을 받게 됐다. 이 상은 앞으로도 힘닿는 데까지 열심히 해달라고 주는 상인 것 같다.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아들로 인해 끈끈하게 맺어진 봉사를 천직으로 생각하고 살아가겠다.

천안 병천면 수해복구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린 김미화 회장
천안 병천면 수해복구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린 김미화 회장

Q ‘아들로 맺어진 봉사라 했는데 무슨 뜻인지 궁금하다

2007년 내 아들이 급성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두 아이를 남겨두고. 지금도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심장 한켠을 옥죄고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고통은 봉사하는 동안에는 잊어버린다는게 이상하다.

우리 아들 얘기를 하려면 과거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이북민들만 실향민이 있는 줄 알았는데 나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실향민에 속한다. 내 고향은 현재 20전투비행단이 들어선 서산시 해미면 언암리. 부대가 들어오면서 우리는 서산시 양대동으로 이사를 나왔고,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이른 나이에 5살 터울의 아들 둘을 낳았다.

여태껏 고생도 밥 먹듯 하면서 참 많이 노력하며 살았다. 노력에 비한다면 빌딩 몇 개 정도의 부를 축적했어야 마땅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삶이 곤고하다보니 종교에 의지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서광사에 계시는 법장스님께서 장기기증 활동을 하는 생명나눔실천회회원으로 들어오라고 했고, 스님의 뜻을 받들어 회비를 내는 동시에 1주일에 한번씩 관내 백혈병 아이들을 인솔하고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혈소판 치료 차 봉사활동을 다녔다.

두 아들을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 아파하는 환우들을 보면 결코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더 빠지지 않고 다녔는지도 모르겠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내가 시간이 없을 때는 당시 중장비를 하던 큰아들이 자기 일을 포기하면서까지 아이들을 인솔하고 서울로 다녔다. 아들과 함께 하는 봉사는 내게 또 다른 의미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큰아들 몸에서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와 내 아들이 봉사하고 있는 아이들과 같은 병일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회원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할때가 가장 마음이 편하다는 김미화 회장
회원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할때가 가장 마음이 편하다는 김미화 회장

Q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믿을 수가 없다.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나 또한 믿어지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 잔인하지 않나. 큰아이가 급성백혈병으로 17개월 만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날이 엊그제 같은데 그 아이가 간지 벌써 13년이다.

2005년 어느날 덩치가 컸던 우리 큰아들이 포크레인 작업을 마치고 오자마자 감기 기운처럼 몸이 좋지 않다고 했다. 더구나 새벽부터 일터로 나가면서도 평소와는 다르게 깜빡깜빡 조는 날도 많았고, 특히 입안이 헤지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다.

어린 손주들을 내게 맡기고 부부가 큰 병원으로 가게 됐다. 그리고 들려온 소리는 급성백혈병, 믿을 수 없는 병명이 수화기를 타고 흘러들었다. 1주일에 한번씩 아들과 함께 백혈병 환우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들락날락했던 우리가 아니었던가! 그 병에 대해 모르는 바도 아니고 꿈인지 생시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가 믿어지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는 말이 바로 이를 때 쓰는 말인것 같다. 그 당시만 해도 백혈병이라고 하면 사는 사람이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내 새끼가 백혈병에 걸리다니.

그래도 엄마인 나로서는 내 아들이 죽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20077, 미리부터 더위가 몰려들었다. 1150분 그렇게 내 아들은 그토록 사랑하던 부인과 두 남매를 남겨두고 우리 곁을 떠났다. 마디숨을 쉬면서도 삶의 희망을 놓지 않으려 했던 내 아들, 야속한 생명줄은 그렇게 내 아들을 거둬가고 말았다.

그때는 이미 내 남편에게 몰아닥친 간암도 극을 달리고 있던 때였다.

'힘든 과정은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견뎌가고 있는 중'이라는 김 회장
'힘든 과정은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견뎌가고 있는 중'이라는 김 회장

Q 남편 또한 간암이라니. 그 힘든 과정을 어떻게 견뎌냈나?

사람 목숨이 참 모질다는 생각을 했다. 견뎌낸 것이 아니라 지금도 견뎌가고 있는 중이다. 큰아들을 보내고 나니 무엇 하나 두려울게 없었다. 아들을 보내고 하루하루 눈물로 지내던 어느날 남편의 입에서 간이식 얘기가 흘러 나왔다. 남편에게 그랬다. “20년 살았으면 많이 살았다. 내 아들, 겨우 서른이 넘을 즈음에 간 생때같은 내 아들도 있는데 예순 가까운 남편의 죽음은 하나 두렵지 않았다. 더구나 가난한 집에 1억 원 가량이 드는 이식비용도 문제였다.

보다못해 아빠 간이식 해드려야겠다는 작은 아들에게 형 떠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는데 무슨 소리냐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윽박질렀다. 하지만 아버지의 부어오른 복수와 통증을 본 막내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그렇게 해서 남편은 이식을 위한 정밀진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간암 외에도 또다시 발견된 남편의 갑상선암. 그렇게 해서 우리는 염치없게도 아들의 간을 이식받는 수술을 했고, 그로부터 1년 후 다시 갑상선암 수술, 그 후에도 얼굴에 알 수 없는 검은 점이 생겨 병원에 가니 피부암까지, 큰아들이 가고 나서도 남편은 무려 3가지 암 수술을 감당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사람들이 나보고 대단하다. 그러고 어떻게 살았냐?”고 한다. 가만 보면 육십 평생 살면서 마치 100년을 산듯한 기분으로, 이러고 살고 있다. 그러니 내게 봉사활동이 없었다면 그 틈을 무엇으로 메우고 살아냈을까. 봉사활동은 살 수 있는 원동력이자 내 생명줄을 이어주는 매개체였다.

젊은 시절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차일피일 미루던 무릎연골수술을 하게 된 김미화 회장
젊은 시절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차일피일 미루던 무릎연골수술을 하게 된 김미화 회장

Q 며칠 전 다리 수술을 했다고 들었는데?

91년도 부녀회장직을 수행하면서 98년도까지 무려 교통사고만 5번을 당했다. 참 모질게도 살았다. 그런데 마지막 교통사고가 나를 이지경까지 만들어놨다. 내가 타던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충돌했는데 그 당시 나는 붕 떠서 땅으로 떨어지는 대형사고가 일어났다. 사람들이 너무 심하면 아작났다는 말을 하지 않나. 그 말이 딱 내게 들어맞는 단어인 것 같다. 그때 온몸이 아작나 버렸다.

병원에서 당시 무릎연골 수술하라고 했지만 너무 젊은 나이라 망설였다. 그 와중에 또 벌어먹고 산다고 화장품 외판원 일을 하러 다녔고, 봉사활동도 하면서 많이도 (다리)굴려 먹었다. 늘 다리통증을 달고 살았지만 봉사활동을 하다 보면 이상하게 고통스럽지 않았다. 또 해야 할 일들은 어찌나 많던지 수술할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또 없이도 살았고.

그러다 이번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연골수술을 하게 됐다. 시집오고 원체 없는 사람 만나다 보니 한 푼이라도 서로서로 도와가며 살아야겠다는 마음도 있어서 쉬 병원을 드나들 수 없었다. 거기다 아들 잘못되고 남편 아프고…….

가만 생각하면 내 인생만 이렇게 막막한 것 같다. 왜 그렇게 모질게 사는지 맘대로 죽지도 않았다. 너무 아파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싶을 때도 있었다. ‘왜 이러고 살지? 깨끗하게 죽었으면 이 고통은 없을거 아냐싶어 우울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 김미화에게는 한때 남들처럼 꿈도 있었는데...

사실 내꿈은 없는 사람들과 점심 한끼라도 같이 먹고 한집에서 오순도순 사는 것이었다. 근데 워낙 가지고 있는 게 없으니 이 또한 물 건너갔다(웃음). 재력만 되면 땅 사서 건물 하나 지어 외롭고 쓸쓸한, 갈데없는 사람들과 한솥밥 먹으며 살아야겠다 싶었는데. 참 서글프다. 이제 내 몸 하나 건사 못하니 그것도 소용없는 먼 꿈이 되어버렸다. 몸뚱이가 버걱버걱 허니 다시 예전처럼 봉사활동이나 제대로 할지 모르겠다.

만약 그럼에도 거뜬히 일어날 수만 있다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봉사에 열정을 쏟고 싶다.

수술을 통해 봉사활동을 해야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내게 봉사는 육신의 고통을 참기 위한 처방전이다.
수술을 통해 봉사활동을 해야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내게 봉사는 육신의 고통을 참기 위한 처방전이다.

Q 봉사를 하다 보면 보람도 있지만 속상할 때도 있을 듯한데?

도와달라는 소리를 들으면 내 몸 아픈 것은 잊고 벌떡 일어나서 나갈 채비를 한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다. 오죽하면 이런 내게 도와달라는 부탁을 할까 싶어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욕심 많다는 소리를 뒤에서 한다. 이런게 마음이 불편하고 속상하다.

사실 아들을 잃고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봉사활동이었다. 며칠전 병실에서 휠체어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데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걸을 수 있을까? 걷는다면 지금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보살피며 살겠다고 스스로 약속했다.

먼저 떠난 아들을 가슴에 품고 봉사활동을 하다 보니 누가 어떤 말을 하든 그다지 괘념치 않고 해나갈 수 있었지만 그래도 속상한 건 속상한 거다. 이런 나를 보며 남편이 그려, 자네는 (봉사)그럭하고 살아야 살아내지. (봉사활동)다녀 다녀라며 응원해줬다.

이번 수술을 통해 봉사활동을 해야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내게 봉사는 육신의 고통을 참기 위한 처방전이다.

늘보람봉사단 회원들을 생각하면 늘 고맙고 행복하다는 김미화 회장
코로나19로 힘들어하는 의료진을 위해 물품을 전달한 늘보람봉사단

# 에필로그

삼남매 낳아서 잘살고 있는 작은아들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참 열심히도 살았다. 그런데도 어쩌면 그리 안 되는지. 항상 자식에게 미안하다. 가난은 부디 물려주고 싶지 않았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하는 늘보람봉사단 김미화 회장.

그녀는 아버지에게 생명을 준 작은아들에게 무엇보다 미안하고 고맙다고 몇 번이나 울먹였다. 특히 제가 노력해서 살면 돼요. 안되는 거 걱정하지 마시고 편안하고 건강하게 사시면 그것으로 족해요. 저는 아직 젊잖아요라고 말해줬던 작은아들을 보면 가슴이 찢어진다고 했다.

착한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힘든 이들에게 먼저 손길을 내민다는 김미화 회장. “내 몸이 닳아 없어지는 그날까지 봉사활동을 하다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때, 그때는 우리 아들을 만나러 떠날 것이라는 그녀의 눈길 사이로 따뜻한 겨울 꽃향기가 피어올랐다.

“내 몸이 닳아 없어지는 그날까지 봉사활동을 하다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때, 그때는 우리 아들을 만나러 떠날 것”이라는 늘보람봉사단 김미화 회장
“내 몸이 닳아 없어지는 그날까지 봉사활동을 하다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때, 그때는 우리 아들을 만나러 떠날 것”이라는 늘보람봉사단 김미화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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