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전통무용연구가 남순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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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통무용연구가 남순여 선생
  • 최미향 기자
  • 승인 2020.12.08 23: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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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은 마음의 세계를 몸으로 표현하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 나는 그 속에서 오늘을 산다
전통무용연구가 남순여 선생
전통무용연구가 남순여 선생

프롤로그

춤은 마음의 세계를 몸으로 표현하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춤을 춘다는 것은 단순한 몸짓만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가진 내면의 세계를 몸이란 매개체로 말을 하는 것이다. 보이는 몸짓으로 눈에 보이지 않은 자신의 소리를 한 글자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이다. ‘자기 마음의 세계를 보다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하는 가장 수준 높은 몸의 메시지.

서산시 해미면 대곡리에는 오늘도 연습실에서 춤사위를 펼치고 있는 전통무용연구가 남순여 선생이 살고 있다. 선생은 68세 나이에도 당당히 대학의 문을 두드려 깊은 학문의 세계를 현실로 불러들인 분이다. 배움 속에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다시금 정립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일을 하시는 노장의 투혼 남순여 선생.

서산시대는 남순여춤사랑무용단단장으로서 과거를 건너 현재로 이어져 온 춤을 미래로 넘겨줄 수 있도록 제자들을 지도하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남순여 전통무용연구가를 만났다.

할아버지의 끼를 이어받은 남순여 선생
할아버지의 끼를 이어받은 남순여 선생

Q 선생의 춤사위를 본 적이 있는데 상당히 아름다웠다. 혹시 부모님에게 물려받았는지 궁금하다

부모님 대신 할아버지에게 그 끼를 이어받은 것 같다. 내 고향은 충주시 중원군 산척면. 오랜 역사와 충효의 전동으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나는 산척면에서도 송강리 박달재 오지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 사이에 7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우리 집은 딸은 살림 밑천이라 하여 집안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시조창을 잘하시는 우리 할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기도 없는 시골, 창호지가 붙여진 방안에서 어스름 달빛을 받은 할아버지 춤사위는 어린 내게도 심장이 쿵 떨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당신은 창을 하시며 춤을 추시곤 하셨는데 그때마다 너무 고우신 모습 때문에 넋을 잃고 바라보다 털썩 주저앉아버리곤 했던 나.

할아버지는 세상 시름 모두 잊은 듯 황진이의 한시에 곡을 붙인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렵거는/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랴를 구성지게 불렀다. 그런 할아버지를 닮았는지 나 또한 혼자서 할아버지 흉내를 내며 당신이 추신 춤을 몰래 따라 해 보곤 했던 게 지금도 기억난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모기를 쫓으러 가시면 나도 졸졸 따라 청산리 벽계수야를 흉내 냈다. 마치 데칼코마니 같은 할아버지와 손녀였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세상이 발전하게 되면서 마을마다 경로당이 들어섰고, 그때부터 할아버지 무대는 더는 방안이 아닌 경로당이 되고 말았고 그로써 나만을 위한 할아버지의 공연은 그렇게 막을 내려 버렸다.

무용가의 길을 가고 있는 딸을 보면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실까 싶어 더 마음을 추스리게 된다는 남순여 선생
"무용가의 길을 가고 있는 딸을 보면 우리 부모님은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실까 싶어 더 마음을 추스리게 된다"는 남순여 선생

Q 할아버지가 부모님 대신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그럼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아버지는 굉장히 선한 분이셨고, 우리 어머니는 상당히 부지런하며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농사일로 바쁜 어머니 대신 나는 당시 한약재 취급을 하신 인텔리 할아버지 덕분에 인성교육 하나만큼은 철저하게 받았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시골 분이지만 박식하셨던 할아버지는 6.25 참전으로 행방이 묘연한 우리 아버지를 찾아 가슴에 한가득 엿 뭉치를 들고 길을 나섰다. 할아버지의 소중한 엿 뭉치는 바로 아버지의 목숨줄이었다.

먹지 못해 거지가 되어있다는 제보를 받은 우리 할아버지의 지혜는 지금 생각해도 혀가 내둘러진다. 갑자기 음식을 먹으면 탈 나니까 발견 즉시 제일 먼저 엿을 입에 넣고 서서히 녹여 먹이면 탈 없이 집으로 모셔올 수 있다는 뜻에서 엿을 챙긴 우리 할아버지.

정말 당신은 죽기 일보 직전의 아버지를 겨우 찾아 그날부터 오래도록 옆에 끼고 아무것도 못 하게 하셨다. 이런 아버지 때문에 우리 엄마는 대농을 여자 혼자의 힘으로 거뜬히 끌고 나가시기도 했다.

힘든 와중에도 남을 배려하는게 유일한 낙이셨던 우리 어머니, 멍석 깐 위에 늘 거지 밥상을 차려주며 배불리 먹이시곤 하셨는데 철없게도 고모와 나는 그런 어머니가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우리 집 마루에는 항상 왕겨로 만든 개떡이 놓여 있었다. 배고픈 이웃들에게 나눔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렇듯 우리 어머니는 가만 보면 남이 잘 먹는 것으로 행복을 누리시는 것 같았다.

참고로, 부모님에게도 너무 잘하신 어머니는 훗날 충청북도 도지사와 충주시장으로부터 효부상을 받기도 했다. 이웃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결국 지난 6월 많은 분의 칭송을 받으며 저세상으로 떠나셨다.

어린시절부터 색동옷을 입고 주인공이 되어 무대에 섰던 남순예 선생
어린시절부터 색동옷을 입고 주인공이 되어 무대에 섰던 남순여 선생

Q 무용은 어떤 계기로 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나이 서른이 넘어 우연한 기회에 무용을 접했다. 당시 우리 남편은 회사를 그만두고 성남에서 상가임대업을 시작했다. 당시는 자고 일어나면 땅이고 집이고 천정부지로 올라가던 시절, 덕분에 먹고 살만한 나는 충주 산척에 있던 동생들을 하나씩 하나씩 서울로 데려와 터전을 잡도록 도와줬다.

그러던 어느날 이제는 자리도 안정적으로 잡았겠다 조금 적적하던 차, 부부동반 자리에서 평소 잘 알던 남편 부인이 남 여사는 그냥 놔두면 너무 아까워. 무용하면 잘 어울릴 듯하다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분이 바로 한국무용의 대가 박금술 선생에게 사사받은 이화여대 출신 이경숙 춤동작의 대가셨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이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밀어주어, 그길로 한국무용 박금술 선생의 직속 제자이신 서희주 선생님에게 달려갔다. 더구나 춤동작의 대가님이 내가 낼 레슨비를 손수 내주시며 격려해주시니 오기 또한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국민학교 시절부터 학예발표회에서도 늘 주인공이 되어 색동옷을 입고 무대 중앙에서 무용했고, ·고교 시절에도 교내 연극부에 들러 소위 좀 건들거렸던 적이 있었다(웃음). 행사만 하면 반 친구들은 자그마니 한복이 잘 어울리는지 내게 꼭두각시 춤을 시키곤 했다.

이도 아니라면 소고 때문은 아니었을까. 당시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사리나무에 창호지를 발라 직접 소고를 만들어주시곤 하셨는데 그 소리가 또 관객들의 혼을 뺄 정도로 뛰어났었기 때문에 나를 무대의 주인공으로 발탁했는지도 모르겠다.

공연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남순예 선생
공연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남순여 선생

Q 서울에서 무용단 생활을 하셨는데 어떤 계기로 서산으로 내려오게 됐나?

어느날 남편이 서산에 한서대가 들어온다니 그곳으로 내려가자고 했고, 나는 서울에서 한달이면 20일 정도는 정기공연을 해야 했기에 당장은 내려갈 수가 없었다. 한동안 떨어져 지내는 생활을 하다가 2년 후 서산시 해미면 대곡리로 터전을 옮겼다. 사실 이곳에 내려와서도 계속 서울로 공연을 하러 다니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으로 인해 알게 된 해미읍성보존회회장님께서 서산도 공연할 곳이 많은데 왜 굳이 서울로 다니냐(해미읍성)축제 때 무대에 서줄 것을 제안했고, 나는 즉시 소속되어 있는 무용단을 끌고 해미읍성으로 내려와 무대를 장식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때부터 나는 해미읍성에서 장구춤을 추며 행사에 참여하게 됐다.

사실 내 성격은 한번 물었다 하면 뿌리를 빼는 성격(웃음)인지라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처음 무용을 배울 때도 두 아이를 키우느라 어쩔 수 없이 빠지면 그 틈을 메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그 결과 불혹의 나이에 서울시 중랑구에 있는 서울시립청소년수련관 무용단에 입단하게 됐고, 덕분에 여기저기 공연 또한 참 많이도 불려 다니곤 했다.

당시 기억나는 사람이라면 탤런트 나현희 씨와 영화배우 순돌이의 이건주 씨, 왕십리 소원아트홀의 대표님께서도 우리 공연을 자주 찾아 불러주시곤 하셨다.

조상의 혼이 서려있는 춤을 가르치다보면 '아~ 내가 살아있구나!'란 생각이 든다는 남순여 선생
조상의 혼이 서려있는 춤을 가르치다보면 '아~ 내가 살아있구나!'란 생각이 든다는 남순여 선생

Q 내포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무용을 가르치고 있다

내 춤을 보시곤 한분 두분 춤을 배우고 싶다며 연락을 취해 왔다. 특히 내가 서산시 해미면에 살아서 그런지 해미면행정복지센터로 나를 보내 달라고 요청을 하는 분들이 생겨났다고 했다.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본격적으로 후학들을 가르치게 됐고, 그분들이 제1해마벚꽃축제에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발휘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 후부터는 1년에 몇 번씩 수업하는 곳의 학생들을 무대에 세워 프로그램발표회를 했는데 그때마다 감사하게도 상당히 좋아하시는 모습을 봤다. 물론 칭찬을 하실 땐 좀 더 잘하라고 해주는 줄 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춘다는 말이 있듯 그럴 때마다 신이 나서 더 열심히 임하게 됐다.

학생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작품에 임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대회 출전 시마다 영광스러운 상도 받게 됐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디딤돌이 되어 지금은 서산시, 해미면, 태안군, 예산군, 당진시 등에서 제자들에게 우리의 혼을 지키는 전통춤 수업을 하고 있다.

프로그램에 맞게 '기획하는 즐거움'도 누리는 남순여 선생
프로그램에 맞게 '기획하는 즐거움'도 누리는 남순여 선생

Q 무용을 하면서 보람된 점과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장구같은 동적인 춤을 참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 호흡으로 하는 춤이 참 좋아졌다. 예를 든다면 승무나 살풀이춤, 입춤 같은 정적인 종류의 춤은 추면서도 마음이 안정되는 게 그렇게 흡족할 수가 없다. 이런 춤을 추다 보면 내 속에서 호흡이 나와 손가락 끝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끌어 나오는 듯 사위어 가는 듯 그러다가 다시 되살아나는 춤사위, 생각할수록 호흡으로 하는 춤을 선택한 것이 최고의 보람이란 생각이 든다.

호흡으로 하는 춤은 건강에도 좋을 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를 다스리는데도 최고의 효과를 준다. 이 춤을 배울 때는 진도가 나가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막상 제 괘도에 오르면 참을 수 없는 깃털이 되어 자신을 사뿐히 내려 앉히게 된다. 계속하다 보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일체가 되어 춤세가 저절로 나온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조금만 더 일찍 ()입문했더라도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랬다면 지금은 내가 서 있는 자리가 한 단계 정도는 올라가 있지 않을까?

내 나이 예순여덟이 넘었을 때인 몇 해 전, 전문적으로 춤에 관한 공부를 하고 싶어 명지대 무용학과에 입학을 했다. 물론 지금은 실기시험에도 합격했다. 늦게나마 학생으로서 배움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데 시작하길 참 잘했단 생각이 든다.

'얅은사 하얀고깔은 고이접어 나빌레라' 승무를 추고 난 후
춤을 춘다는 것은 '마음의 세계를 몸으로 표현하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내 나이 벌써 70살이다. 후배양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부족하지만 지금부터는 전통춤을 널리 알리고 전파하는 그런 주춧돌 같은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 열심히 하다 보니 좋은 일도 생기는 것 같다. 올여름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에서 트리플지도자상을 받았다.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은 며칠 전 통보받은 ‘2020 한국문화예술인대상에 선정됐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민족의 혼을 잘 갈고 닦아 후대에 길이길이 전해주라는 뜻인 듯하여 다시금 마음이 추슬러진다.

95세 돌아가실 그날까지 청산리 벽계수창을 하시며 돌아가신 할아버지처럼 나 또한 죽을 때까지 전통춤과 함께 여생을 마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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