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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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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통제는 의사의 처방 없이도 약국에서 쉽게 구입이 가능하다. 아스피린을 비롯해 몇몇 대표적 약은 가정 상비약으로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중 해열과 진통, 소염효과로 잘 알려진 이부프로펜은 노골적으로 약물 화학명을 약 이름으로 사용한 경우이다. 약물질인 이부프로펜 Ibuprofen은 유기화합물의 화학명이다. 그런데 화학적으로 이부프로펜에는 L-이부프로펜과 D-이부프로펜이라는 두 성분이 같은 양으로 절반씩 들어 있다. 그런데 해열과 진통 효과를 내는 물질은 D-이부프로펜뿐이다. 그렇다면 다른 하나는 무엇일까.

두 물질의 화학적 구성 원소는 같다. 원소의 종류와 개수는 같다. 심지어 원자간 결합 방식마저 같다. 얼핏 보면 마치 일란성 쌍둥이처럼 비슷하다. 우리가 거울로 자신의 닮은 모습을 보지만 실제로는 좌우가 바뀐 모습이다. 이 두 분자가 그렇다. 이들은 서로 겹쳐지지 않는다. 왼손 장갑에 오른손이 들어가지 않는 것과 같다. 이를 화학에서는 거울상 이성질체 혹은 카이랄성Chirality 분자라고 부른다. ‘카이랄은 손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 됐는데, 마치 우리의 양손이 좌우가 바뀌어 서로 겹쳐지지 않는 의미에서 따온 말이다. 여기서 LD는 라틴어인 레보 Levo와 덱스트로 Dextro의 약자로 왼쪽과 오른쪽의 의미이다.

그런데 이게 왜 중요할까.. L-이부프로펜의 경우 속이 쓰리거나 간에 부담을 주는 부작용을 유발한다. 인류가 인공적으로 만든 대부분 유기화합물은 이런 거울상 이성질체가 둘 다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약제도 예외는 없다. 이부프로펜의 경우 오른쪽 거울상 이성질체가 약효가 있다. 그래서 불필요한 이성질체를 걸러내고 약효가 있는 D-이부프로펜만 추출해 약을 만들기도 한다. 덱시부프로펜 Dexibuprofen은 이부프로펜보다 절반의 양으로 같은 효과를 낼 수 있고 부작용도 없게 된다.

신기한 것은 인공적인 물질이 아닌 자연이 만든 물질은 하나의 카이랄성 물질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반대의 거울 이성질체를 만들지 않는다. 결국 약효가 있는 이성질체의 다른 쪽 물질은 약효가 없거나 독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다. 신비하고 감동적이지만 인류는 아직도 자연이 왜 한쪽만 만드는 지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이 사실을 몰랐던 인류는 현대의학 역사상 최악의 사건을 만든다. 1959년 독일의 제약회사인 그뤼넨탈은 진정제의 한 종류인 탈리도마이드를 만든다. 동물시험에서 부작용이 전혀 나오지 않아 기적의 약물로 불렸고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에 급속도로 퍼졌다. 그뤼넨탈은 거대한 미국의 제약시장 문을 두드렸고 미국 FDA에 승인 신청을 했다.

당시 심사관은 미국 약리학자인 프랜시스 올덤 켈시 Frances Kathleen Oldham Kelsey 였다. 그녀는 제약사의 실험자료가 미비했고 만약 임산부가 복용할 경우 태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검토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승인 신청을 기각한다. 당시 가장 유명한 약을 거절한 그녀는 제약사의 손해배상 청구는 물론 각종 협박과 비난을 견뎌내야 했다.

그녀가 1년여를 끌면서 6번의 승인을 거절하는 동안 이 약의 실체는 드러난다. 단 한 알만 먹어도 기형아가 태어나는 약이었다. 결국 독일에서만 한 해 동안 약 12,000명의 기형아를 출산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이 진정제는 당시 임산부의 입덧에 탁월한 효능이 알려지며 임산부의 입소문으로 급속도로 퍼졌던 거다. 문제는 탈리도마이드 분자구조에 있었다.

한쪽 카이랄 분자는 입덧 완화 효과가 있었지만, 다른 쪽 분자는 혈관 생성을 억제했던 것이다. 결국 태아의 인체 말단 조직인 팔다리가 자라지 않았다. 수만 명의 기형아 출산에도 당시 미국에서 단 17명의 기형아 출산으로 그친 건 과학적 원칙을 따른 그녀의 행동 때문이었다.

미국 보건복지부는 거대 제약사 두 곳이 개발한 코로나19 백신을 조만간 승인할 예정이다. 일반적으로 신약 개발은 오래 걸리는 게 상식이다. 물론 백신은 치료제와 다르지만, 신약의 승인까지 오랜 시간을 소모했던 이유가 부작용에 대한 충분한 검증과 시험을 거쳐야 해서라면 지금 거대 제약사의 발 빠른 횡보는 우려스러운 게 사실이다.

자연이 한쪽 카이랄 물질만 만드는 자체가 신비롭고 감동하기 전에 미지의 영역에 발을 딛는 것처럼 두렵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든다. 대유행이 잠잠해지려면 집단면역을 위해 충분한 인구가 백신을 접종해야 한다. 그리고 백신을 몇 차례 맞아야 그 효과가 있을지도 아직 모른다. 우리에겐 아직 어떤 경험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공선의 시선에서 본다면 수혜의 대상은 공정해야 한다.

선진국에서 시작되는 백신 접종이 또 다른 사회적 차별을 만들 수 있다는 거다. 혜택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국가에서는 풍토병이 될 수도 있다. 백신의 등장은 분명 희망이지만 그 이면에 감춰진 모습과 사회적 정의와 함께 입체적으로 들여다봐야 할 지점이 아닌가 싶다. 누구나 인류를 구원할 기적의 약을 바라겠지만, 자연이 아닌 인류가 만든 세상과 약에는 기적이란 없어 보인다.

김병민 한림대 나노융합스쿨 겸임교수
김병민 한림대 나노융합스쿨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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