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쌤의 미술읽기-22

추사 김정희/세한도/1844년/국보180호/수묵화/23×69.2cm/국립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세한도/1844년/국보180호/수묵화/23×69.2cm/국립중앙박물관

요즘 나는 주중에 2시간 걷기를 하고 있다. 운동하려고 걷는 것이 아니라 사색을 하기 위한 걷기운동이다. 특히 걸으면서 눈에 차는 나무를 감상하다 보면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들이 잔잔한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놀라운 현상을 발견한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을 소리가 좋아 몇 번이고 반복해 밟아보기도 한다. 여름 내내 푸르렀던 나뭇잎은 어느새 단풍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져 처절한 거름으로 사위어 가고 있다. 앞으로 가다 보면 잎이 떨어진 앙상한 가지에 빨간 열매가 매달린 나무를 보기도 하고, 가지치기하다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꺾어 보기도 한다.

갑자기 외로움이 엄습해 온다. 문득 내가 가는 방향이 맞는건가? 제대로 가는 건가?’라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하다. 두 아이를 돌보다가, 일에 몰두하다가, 밀린 집안일을 하다가도 문득 고개를 드는 생각들이다. 이런 생각은 원인이 있었다.

최근 들어 바쁘기도 했지만, 마침 그날은 평일이라 어차피 갈 수도 없었다. 주중에 나만 빼고 가족 모여 식사했다는 것이 화근이었다. 괜히 소외된 느낌은 나만의 기우일까! 나를 배려하지 않은 남편에게 화가 나 정말 오랜만에 큰 소리로 다퉜다. 전생에 공덕을 쌓아야 주말 부부가 된다는데, 공덕을 쌓기는커녕 귀양살이를 온 것처럼 쓸쓸하고 외롭게 느껴진 건 최근들어 처음이었다.

그때 눈에 띈 그림이 바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은 명문가에서 태어난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서화가(書畵家)였다. 우리에겐 추사체로 잘 알려진 이름이다.

출생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충남 예산 향서 또는 서울 종로구 통의동의 월성위궁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추사는 평소 가족에게 유난히 살뜰했고, 무엇보다 애정 표현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에 대한 기다림과 사랑은 한글편지에도 절절히 전해진다.

1840년 김정희는 그의 나이 55, 정치적 이유로 제주도로 유배를 가야만 했다. 가족 동반이 금지됨은 물론 유배지 주변에 탱자나무 울타리를 둘러 감옥 같은 생활을 하는 위리안치형을 받게 된다. 조선시대 위리안치는 사형 다음으로 심한 형벌이었다.

그의 아내 예안 이씨는 남편을 위해 옷과 음식을 장만해 내려보냈지만 정작 자신은 그만 병에 걸리고 말았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병마와 함께 겹쳐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김정희가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올 리 없었다. 그러던 중 아내는 그가 유배된 지 2년만인 1842, 향연 55세 나이로 영영 추사 곁을 떠나고 만다. 아내의 답장을 그토록 기다렸건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부고였다니.

예안 이씨가 떠난 뒤, 추사는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는 슬픈 시 한 편을 남겼다. ‘누가 월하노인께 호소하여 내세에는 부부가 서로 바꿔 태어나, 천리 밖에서 나는 죽고 그대는 살아서 나의 이 슬픈 마음을 그대도 알게 했으면

세한도는 아내가 죽은 뒤 2년 후인 1844 그의 나이 59세 때 그린 작품이다. ‘세한설을 전후한 추위를 나타내는 말로 매서운 추위를 말한다. 하지만 제주도의 추위는 내륙보다 덜 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추위란 아마도 추사의 허전한 마음은 아니었을까. 사랑하는 이를 잃은 마음의 온도, 아무도 찾아주는 이 없는 유배지,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더한 추위는 아내의 죽음은 아니었을까.

오랜 유배 생활로 점차 서울의 소식은 끊긴 지 오래였고, 더구나 사랑하는 아내도 떠나버린 추사에게 그나마 위로가 됐던 것은 지인들의 편지와 책이였다. 그중에서도 제자 이상적이 스승 추사를 위해 끊임없이 귀한 책을 보내 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웠겠는다. 이런 이상적에게 그림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그린 작품이 바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1804~1865)’.

그림에는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이라는 단어를 썼다. ‘우선은 이상적의 호로 이상적은 감상하시게나라는 뜻이다. 추사의 말대로라면, 빈 공간 속에 스산한 분위기의 집 한 채와 네 그루의 고목이 서 있다. 여백의 미라 했던가. 바람 한 점 그리지 않았지만 여백 속에서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 세한같은 황량함과 외로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건 그 속에서도 시들지 않은 소나무의 푸른 절개가 있다는 것이다.

그림을 다 그린 후 추사는 장무망상이라는 인장을 찍었다. 이것은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인데 날이 추워진 이후에야 송백이 홀로 시들지 않음을 안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유배 생활에도 자신을 잊지 않은 18살 나이 차의 제자 이상적에게 우정을 표현한 추사도.

이상적은 이 그림을 들고 다니며 청나라 지인들에게 세한도를 보여 주며 자랑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감상평을 받아 보관하기도 하고. 그림 한 점으로 이토록 세대를 넘어 국가를 넘어 교류하다 예술의 경지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유배 당시 추사 김정희 선생은 가장 친한 친구 김유근(1785~1850)을 잃었고,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으며, 제자들마저도 멀어지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더구나 자신마저 늙은 유배 학자가 된 그는 결국 외로움의 최고 정점에서 후세에 길이 남길 작품 세한도로 당대 최고의 예술가가 됐다.

지난 주말, 서운했던 남편에게 나이 들어 등 긁어 줄 사람은 나뿐이야. 까딱하다 밥 못 먹을 수 있어. 꼭 이런 추운 날 깨달아야 하겠어요?”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오늘 나는 다시 말할 테다 업무로 인해 서로 떨어져 있지만 건강 잘 챙기고 늘 따뜻하게 입고, 그리고 시간되면 만나요. 그때는 우리 아이들 손 잡고 맛있는 것도 먹으며 마음껏 웃읍시다라고 말이다. 결국 서로 사랑하며 아껴주는 건 부부밖에 없지 않은가!

강민지 커뮤니티 예술 교육가/국민대 회화전공 미술교육학 석사
강민지 커뮤니티 예술 교육가/국민대 회화전공 미술교육학 석사

 

저작권자 © 서산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