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씩씩하고 강한 대한민국 아줌마가 되기까지 풀스토리

장애아를 데리고 당당히 갈 수 있는 ‘장애인전용카페’를 만들어주면 좋겠다

성봉학교 김영운 학부모회장
성봉학교 김영운 학부모회장

일반적으로 인터뷰 기사는 인터뷰 기자와 인터뷰이의 대화 형식을 띤다. 하지만 김영운 회장의 인터뷰 글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써 내려갔다. 다소 파격적인 형식이지만 인터뷰이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기 위해 택했다.

#프롤로그

내 아들은 14살 뇌병변 지적장애 1급 조한성이다. 흡입성 폐렴으로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후천성 장애아가 되었다. 한없이 무너지는 가슴으로 아이를 끌어안고 서산으로 내려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어제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 아이를 위해, 이 아이가 좀 더 밝은 세상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엄마가 넋을 놓고 있으면 안되지. 지금부터 다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지적장애 1급 한성이 엄마였고,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씩씩하고 강하다는 대한민국 아줌마기 때문이다.

# 후천성 장애를 가진 오빠를 데리고 서산으로 시집을 왔다

장애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헬스 트레이너로 누구보다 열심히 운동하던 26살 오빠가 결혼식 3개월을 남겨둔 어느날 저녁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로인해 우리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고, 오빠는 결국 하반신 마비라는 청천벽력같은 피해를 보았다.

당시 친정에서 가장 역할을 했던 나는 그런 오빠를 데리고 서산으로 시집을 왔다. 절망을 딛고 다시 재기할 수 있도록 오빠의 수족이 돼야 했기에, 행여 자신을 놓아버릴까 봐 그림자처럼 숨죽이며 지켜봐야 했기에 그런 결단을 내렸다.

이런 내 마음을 알고 기꺼이 남편은 오빠를 받아주었고, 그때부터 우리의 동거는 시작되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힘들어하는 오빠가 방향을 잃지 않도록 길잡이가 되어야 했다. 긴 시간을 문밖에서 서성여야 했던 나날들. 그 시간이 이어지면서 나는 세 번의 계류성유산을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오빠의 손과 발이 되었던 나는 아픔을 내색할 만큼 비어있는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성봉학교 학부모들로 구성된 자원봉사자
성봉학교 학부모들로 구성된 자원봉사자

# 7개월 만에 태어난 이란성쌍둥이, 언니만 남겨두고 하늘나라로 떠난 동생

그리고 어느날 선물처럼 쌍둥이를 임신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힘든 와중에 생긴 만큼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었지만 점점 배가 불러오면서 더는 오빠의 수족이 되어줄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오빠와의 이별준비를 위해 오빠가 머물 곳을 찾아다녔고, 마침 전주에 있는 동암재활원에서 반가운 소식을 보내왔다. 그렇게 오빠는 내 곁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인 성인 지체장애인시설에 안주했고, 나는 이란성쌍둥이를 맞이할 준비를 서서히 하고 있었다.

7개월로 접어든 어느날이었다. 갑자기 통증이 찾아들어 급히 산부인과를 찾았다. 두 아이가 바깥 구경을 빨리하고 싶었던지 그렇게 채 달을 채우지 못한 두 아기가 칠삭둥이로 세상에 태어났다. 하지만 태어남과 동시에 이란성쌍둥이 중 언니만 남겨두고 무엇이 그리 급했던지 동생은 하늘나라로 떠나버렸다. 슬픔을 꾹꾹 억누르며 인큐베이터 안에 누워있는 딸을 바라봐야 했던 시간들. 왜 신은 그렇게 내게 가혹했던지 바둥거리는 딸을 내려다보며 한참씩 눈물을 쏟아내야만 했다.

참 와닿는 말이다. 시간이 약이란 말은. 한 아이를 가슴에 묻고 살았다. 딸아이를 볼 때마다 먼저 떠난 아이가 눈에 밟혔다. 가슴을 쥐어뜯던 많은 시간을 뒤로하고 어느날 다시 아들을 임신하게 됐다. 아이는 우리 부부의 걱정과는 달리 열 달을 채우고 내 품에 안겼다. 하지만 그 작은 아이는 태어난 지 7일 만에 흡입성폐렴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했고, 그렇게 혼자 고통을 인내하던 1년 만에야 내 아이 한성이는 우리 부부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학생 중 힘든 집을 선택해서 반찬 봉사 등 다양한 활동을 하는 성봉학교 학부모들
학생 중 힘든 집을 선택해서 반찬 봉사 등 다양한 활동을 하는 성봉학교 학부모들

# 흡입성 폐렴으로 후천성 뇌병변 지적장애 1인 내 아들 조한성

돌이 지나면서 아들과 같은 또래의 아기들이 뒤뚱뒤뚱 걷는 것을 봤다. “우리 한성이는 왜 안 걸을까요?”라고 물으면 사람들은 “15개월이면 걷는다. 16개월 18개월이면 걷는다고들 안심시켜 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걷지않았던 우리 한성이.

19개월이 지나면서 삼성서울병원 외래진료 소아청소년과를 가게 됐고, 그 자리에서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듣게 됐다. 후천성 뇌병변 지적장애 1원인은 바로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흡입성폐렴이었다.

내 아들 조한성. “뇌는 한번 손상당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여자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메아리 되어 돌아왔다. 귀와 눈을 막고 싶었다. 세게 도리질을 해도 자꾸만 들려오는 소리 때문에 어떻게 유모차를 밀고 나왔는지, 어떻게 지하에 있는 재활의학과로 갔는지, 아직도 그때 그 시간만큼은 생각만으로도 아득하다.

그렇게 나는 서산으로 돌아와 아이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야 했고, 내 아들이 갈 수 있는 특수어린이집을 수소문해야 했다.

# 베란다에 서서 꿈을 바라본 내 아들 한성이

걷지 못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가슴 아파할 수만은 없었다. 재활센터를 찾아봤지만 마땅한 곳이 없어, 다리에 힘을 길러주기 위해 베란다 벽에 세워둔 상태로 밥을 먹이고 놀아주기를 시도했다. 매일 바깥세상을 내려다보며 저 아이들처럼 나도 걸을 수 있다는 희망도 함께 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무섭다고 꼼짝도 하지 않던 아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베란다 밖을 내다보며 미소를 짓기도 했다. 심지어 다리에 힘까지 생겨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내 아이는 배란다 서 있기 운동으로 손을 떼고 세상을 향해 한발짝 걸어 나갔다. 그때가 48개월이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그 길로 떡을 해서 돌렸다. 남들은 백일이나 돌이 지나면 돌린다는데 나는 48개월이 되어서야 떡을 돌리는 기쁨을 누렸다.

성봉학교 어머니회장이 되면서  학교의 시스템을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성봉학교 어머니회장이 되면서 학교의 시스템을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 성봉학교 시스템을 바꾼 것은 내 아이가 좀 더 당당해지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

아들과 세 살 터울의 누나에게는 엄마가 책임져야 할 자식이니 너는 네 인생을 살라며 딸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동생을 입학시키지 않고 대신 특수공립 성봉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마음속에는 큰아이가 자기 동생으로 인해 놀림을 받을까봐 염려하는 마음이 더 컸다.

사실 이삭특수어린이집에서 성봉학교에 넣기까지 2년 동안 관심을 가지고 성봉학교에 관심을 쏟고 바라보았다. 당시만 해도 온기라곤 없는 아주 삭막한 곳이었다. 특히 교사에 대한 학부모님들의 인식들이 말이 아니었다. 내 아이가 성봉학교에 들어갈 즈음에는 차가운 학교 대신 따뜻하고 사람냄새나는 학교로 바꿔지기를 바랬다.

드디어 우리 아들 한성이가 성봉학교 학생이 되었다. 내가 어찌하다보니 어머니회장이 됐고. 그때부터 서서히 성봉학교 시스템을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성이와 같은 우리 장애아들이 좀 더 당당해지기 위해서는 필요불가결한 요소들이었다. 이 모든 것들은 딸아이로 인해 부성초등학교 운영위원회에 가입했던 것이 토대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 성봉학교 버스에는 아이들의 미소가 붙어 있다.

가장 먼저 했던 것이 바로 학교 버스에 아이들 얼굴을 스티커로 붙이는 일이었다.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측은한 눈길이 싫었다. 스마일 캐릭터, 활동사진, 말 타고 드럼 치며 꿈을 향해 나아가는 아이들 모습 등 다양한 사진들을 한 장씩 붙여나갔다.

처음에는 오지랖 떨고 잘난체한다며 싫어했던 학부모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진심을 알아주게 되었고, 그들조차 서서히 장애인에 대한 인식개선뿐만 아니라 내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주었다.

내가 이렇게 바꾸고자 했던 이유 중 하나가 아주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어느날 급식실에서 모 교장 선생님이 덩치 큰 학생의 등을 후려치며 작작 먹어라라고 한 것이다. 그 뒤부터였다. 그것도 어머니회장인 내가 보는 앞에서 그랬으니 어찌 속이 뒤집히지 않을 수 있겠나.

얼마나 속이 상하던지 자모들에게 지금부터 우리 스스로 아이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냅시다라고 했다.

그동안 아이를 더 오래 맡기려고 이리저리 눈치보며 전전긍긍했던 학부모님들까지 발 벗고 나서 우리 아이들의 부르짖음을 대변해 주셨다. “절대 구걸하지 맙시다. 장애인이니까 불쌍하다고, 장애인이니까 도와달라고 하지 맙시다. 대신 이제는 우리가 앞장서서 비장애인을 도와줍시다.”

이 말은 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했다.

성봉학교 운동회 문화를 바꾼 김영운 회장
성봉학교 운동회 문화를 바꾼 김영운 회장

# 성봉학교 엄마들이 팔 걷고 나선 봉사활동

한때는 장애인학교가 들어선다는 것에 적극적으로 반기를 들었던 명천리 마을에 4년째 회관 청소를 하고 있다. 또 학생 중 힘든 집을 선택해서 반찬 봉사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 학생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의외로 이곳에 오는 학생 중 가슴 아픈 아이들이 많다.

기억나는 가정이 있다. 학부모회장에 막 취임하고 첫 운동회였다. 그날은 급식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각자 도시락을 싸 오라는 당부의 말씀이 있었다. 그때였다. 한 분이 쭈뼛거리며 유통기한이 지난 먼지 묻은 맥콜 한 통을 돗자리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지적장애 초등학교 4학년과 4살 짜리 동생, 그리고 다문화 엄마와 나이 든 아빠가 사는 가정이었다. 물론 이것저것 함께 나눠 먹긴 했지만 내 눈에는 누구보다 어린 동생이 너무 불쌍했다.

또 한 집은 장애인 친구를 고모가 입양해서 키우는 가정이다. 고모에게도 딸린 자녀가 3명이나 있는데도 말이다. 안타까운 건 자신의 아이 중에도 장애가 있는 친구가 내년 성봉학교에 입학할 예정이다.

조모 밑에서 살던 장애인 이슬(가명)이도 생각난다. 그 아이는 경계성 장애아였는데 머리도 땋아주며 내가 참 예뻐했었는데 어느날 혼자 남아 이슬이를 키워주었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어야했다. 다행인 것은 지금은 성인이 되어 스스로 풍파를 잘 헤쳐나가고 있다.

아무튼 이런 여러 가정들을 보면서 반찬 봉사를 하게 됐다. 그리고 바뀐 것이 바로 운동회 문화였다. 그날만은 뜨뜻한 국수라도 말아서 학교에서 동네 어르신까지 모시고 와 급식을 한다. 오신 어르신들은 학부모회에서 또 나서서 직접 책임지고 모셔다드리고 말이다.

한부모 및 조부모 가정에 위생용품을 지원하기 위해 성금을 기탁한 김영운 회장(오른쪽 세번째)
한부모 및 조부모 가정에 위생용품을 지원하기 위해 성금을 기탁한 김영운 회장(오른쪽 세번째)

#에필로그

딸이 다니는 학교 운영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지난 10월 서산시에 생리대 성금으로 200만 원을 맡겼고, 이달에는 연탄 1000장을 기부한 김영운 회장은 이런저런 이유로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니 이제야 어려운 분들이 눈에 보인다. 아마도 한성이 엄마가 아니었으면 몰랐을 것들을 참 많이 보게 됐다고 말하는 그녀가 참 씩씩해 보였다.

인터뷰를 마치며 김영운 회장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뭐냐고 물었더니 우리 서산에도 장애아를 데리고 당당히 갈 수 있는 장애인전용카페를 만들어주면 좋겠다중학교에만 들어갈 나이가 돼도 덩치가 크다. 그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 활동 보조들과 아이들이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전용카페를 만들어주면 좋겠다. 부디 선처하여 서산시와 충남도가 장애인을 위한 선도적인 도시가 되기를 소망한다라고 말했다.

월요일 저녁 무렵, 행복한 만남이 설레었던 까닭은 장애아들의 미래를 위해 오늘 하루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엄마라는 이름의 김영운 그녀를 만났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서산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