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경의 재미있는 이슈메이커-㉓

사진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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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청춘. 삼춘가절(三春佳節)처럼 어여쁘다. 여전히 철부지 같은 모양새가 마치 어른 흉내를 내듯 자깝스럽다. 장난기 많고 호기심 가득한 필자는 거칠 것 없이 호기스럽다. 남자 여자 구별 없이 금세 친숙해지는 성격은 타고난 사교성 덕이리라. 스스럼없고 솔직 담백한 필자는 내숭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선택에 있어 주저함이 없었고 크게 고민하지도 않았다. 고민의 90%가 결국 쓸데없는 고민이라지 않은가.

인생에 단 한 번뿐인 대학생활. 이 시간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후회 없이 보내고 싶었다. 흡사 죽음을 앞둔 이의 버킷 리스트(Bucket List) 마냥 필자는 대학생활 동안 하고 싶은 일들을 적기 시작했다. 무전여행하기. 무대에 올라보기. 염색하기. 어쩌면 평생 못할지도 모르는 일들을 적으면서 마음이 뒤설레었다.

동네 작은 미용실. 일단 가장 쉬운 염색부터 해보자. 새치 염색 말고는 마지막일지도 모를 염색인데 그저 평범할 순 없다. 너무 과감하지 않으면서 흔하디흔한 블루블랙은 싫다. 지금이야 과감한 색도 개성이지만 당시에는 노란머리도 유난스러워 냉랭한 시선을 받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택한 그린블랙. 빛에 반사되어 은은하게 비치는 진한 녹색 빛깔을 상상하며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는 미용실 아주머니의 손에 칼자루는 쥐어졌다. 무려 세 번의 탈색과 장장 6시간에 걸친 염색 과정을 마치고 드디어 상상이 현실로 되는 시간. 싸매놓은 수건을 풀어헤치고 거울 속에 비친 머리 꼴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한여름 무성한 잔디밭 잡초처럼 생생한 초록빛에 할 말을 잃었다. 다시 검은색으로 염색할까. 이대로 나가도 괜찮을까.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진 않을까.

찰나적 순간에 수십 가지 생각이 전광석화와 같이 스쳐 지나가면서 어차피 엎질러진 물 후회할 필요 있겠는가. 나보다 더 어쩔 줄 모르는 미용실 아주머니를 뒤로하고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길을 나섰다. 그날은 아마도 태어나서 가장 많은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날이 아닌가 싶다. 가볍게 염색하고 오겠다고 나선 딸의 모양새를 위아래로 훑어보시는 어머니는 하도 황당한지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필자는 학교에서 일명 잔디로 불리며 일약 스타가 되었다. 필자를 모르는 학생이 없었고, 심지어 길 가다 마주친 초면의 사람들도 필자를 알아보았다. 기왕 내친걸음 후회해 봤자 만시지탄(晩時之歎)일 터.

이후로도 필자의 기행(奇行)은 계속되었다. 자전거 하나 빌려 무일푼으로 떠난 34일간의 서해안 일주는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새까맣게 그을린 친구들의 꼬질꼬질한 얼굴을 바라보며 젊음의 객기로 끓어오르는 역동감에 흠뻑 취했다. 후회 없이 보낸 시간에 미련은 없었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후회는 자신의 결정으로 인해 발생한 결과를 다른 결과와 비교하는 과정에서 좌우되는 감정이라고 하였다. , 자신의 현재 결정에 대해 자책하는 감정으로 깨달음 또는 불쾌감 등의 복합적인 감정들이 섞여 있는 것이다. 후회의 감정은 화, 불안, 실망감, 슬픔 등의 감정과는 구분되는 개념으로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감정 중 하나이다. 다른 부정적 감정과의 차이점은 후회는 선택이 선행조건으로 수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후회의 정도는 의사결정의 책임의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필자의 십대는 후회가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리고 이십대는 후회하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을 자신했기 때문이다. 여지없이 성인이 된 삼십 대. 세상은 고작 댕돌같이 단단한 몸뚱이뿐인 필자에게 냉랭했다. 혈혈단신 힘없고 빽없는 설움은 아무리 외쳐도 메아리가 되어 다시 돌아올 뿐이었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외치던 필자는 그 화려한 외침 뒤에서 피눈물 흐르는 심정으로 후회했다.

이제 막 마흔에 접어들면서, 필자는 후회함을 받아들였다. 이미 지나가버린 내 선택에 대한 자책은 나 자신을 피폐하게만 할 뿐임을 알기에 후회라는 감정에서 깨달음만 얻고자 한다. 앞으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있는가에 대한 의문에 선뜻 답하기 어렵다. 솔직히 말하자면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없다. 다만 현재의 시점에서 신중히 고민했고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믿고 나아갈 뿐이다. 류시화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처럼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내 생각을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없다. 그저 그의 시처럼 설령 후회할지라도 지금이 최선임을 믿어보리라.

 

참고문헌 1. 남궁재은, & 허태균. (2009). 한국 대학생들은 무엇을 후회 하는가?: 후회와 지각된 기회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심리학회지: 사회 및 성격, 23(1), 181-194.

2. 윤현숙, 유희정, 이주일, 김동현, 김영범, 박군석, ... & 장숙랑. (2008). 인생의 보람과 후회: 성공적 노화여부에 따른 비교. 정신건강과 사회복지, 28, 5-35.

유은경 사회과학 박사과정 중
유은경 사회과학 박사과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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