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주기율표를 읽는 시간 저자

김병민 한림대 나노융합스쿨 겸임교수
김병민 한림대 나노융합스쿨 겸임교수

올해는 12월에 수능이 치러진다. 예년 같으면 11월에 치렀을 시험이 팬데믹을 피해가지 못했다. 막바지 준비탓인지 학원을 마친듯한 학생들로 붐빈 버스에서 재잘대는 학생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됐다.

우정과 사랑 그리고 정체성,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인 청춘의 고민일거라 기대했는데, 성적과 대입, 취업, 집값, 그리고 작금의 여러 상황으로 인해 희망 총량이 사라진 박탈감이 그들의 대화 재료였다. 한편 논술 때문인지 정치나 시사에 해박한 사실에 감탄하며 그네들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지만, 한달 후면 한 번의 시험으로 다른 인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숨길 수 없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버스에 있던 학생들에게 헤스의 법칙을 말해주고 싶었다. 물론 지옥 같은 수능을 준비하는 아이들에게는 잔인한 조언이다. ‘헤스의 법칙은 화학II 를 선택한 학생들이 좌절을 경험하게 하는 내용이다. 다시는 화학책을 펼쳐 볼 것 같지 않은 아이들에게 이 법칙을 말해주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화학은 반응의 학문이고 반응에서 열은 중요하다. 열역학을 몰라도 제1 법칙은 잘 안다. 바로 에너지 보존 법칙이다. 지금이야 상식이지만 1800년대 초반에만도 그렇지 않았다. 당시는 열의 정체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러시아 화학자 헤스(Germain Hess)1840년에 열과 일에 관련한 법칙 하나를 발표했다. 이후에 이 법칙은 에너지 보존 법칙의 한 형태로 총열량 보존 법칙으로 불렸다. 이 법칙이 무엇일까.

예를 들어 이산화탄소(CO2)는 탄소 원자 1(C)에 산소 분자 1(O2)가 결합해서 생성된다. 이 반응에는 394 KJ의 열이 발생한다. 그런데 다른 반응도 존재한다. 먼저 일산화탄소(CO)를 만들고 다시 산소와 반응해 이산화탄소를 만들 수 있다. 그러니까 다른 경로를 통해 같은 최종 도착지에 도달하는 셈이고 각각 111 KJ283 KJ의 반응열이 나온다.

두 반응열을 더해보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물질이 반응하며 상태가 바뀌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최종 생성물이 같다면 반응에 관여한 에너지 총량은 같다는 것이 헤스의 법칙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아이들에게 헤스의 법칙을 말해주고 싶었을까. 삶에 대입해보면 꽤 근사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최근 예민한 사회현상의 내면에는 세대 갈등이 녹아있다. 이미 자식 세대에는 부모 세대가 분노의 상대이고 사회의 공적이다.

부동산 중심의 자산구조를 가진 586세대에게 월세를 내며 살아가야 하는 청년 세대, 근력과 용기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 이전에, 기회조차 별로 없는 세대가 느끼는 것은 희망의 부재다. 지금은 세계적으로도 부모가 살았던 시절처럼 경제적 활력도 없고, 이런 변화가 또 부모 세대의 잘못이라고 하기도 어렵기에, 그들 자신도 감내하고 견뎌온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코로나까지 겹치며 뭔가 불공평하고 억울한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데 이런 말이 그들에게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코로나 시대는 꽤 많은 것을 공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공평과 공정은 다르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고 그 안의 삶은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무척 공정하다는 거다. 그리고 긴 시간을 가지고 세상도 점점 좋아지고 있다. 다만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이다.

민주주의가 생경했던 시절, 모든 것이 지금보다 공정하지 못했고 분명히 지금은 그때보다 좋아졌다. 지금 아이들이 동경하는 어른들의 삶은 마치 영화 <설국열차>와 같다. 영화에서 앞칸으로 가기 위해 가열하게 투쟁하던 사람들과 소위 좋은 자리를 지키려 강력하게 버티던 사람들, 하지만 둘 다 오로지 한 길로만 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기성세대도 수능 성적표처럼 앞칸에 있으면 행복할 줄 알았지만 늘 허기지고 빼앗길까 동동거리는 삶이었다. 자신만의 꽃밭이 없었다. 가진 것이 바로 행복으로 대입되는 것은 아니란 것을 이제야 깨달았으니까.

사회적 자원의 공정한 분배 논리라면 기성세대는 앞칸을 그들에게 양보하는 것이 맞기도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가 모두 설국열차를 탈 필요가 있을까 하는거다. 목적지로 향하는 방법은 많다. 열차에 내려 다른 교통수단으로 갈아타도 되고 느리겠지만 걸어가도 된다. 어쩌면 돌아가는 낯선 길이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행복은 찾는 것이 아니라 음미하는 것이니까.

그 다양한 삶의 과정에서 사용되거나 내뿜는 에너지는 모두 다르지만, 삶의 풍경도 내음도 더 가까이 느끼게 되고 더 설레며 자신만의 꽃밭을 만들 수 있을 거다. 오히려 미래가 요구하는 사회 구성원은 그 다양성과 삶을 느끼는 풍부한 경험에서 나올 것이다.

이미 선진국에서 시도하는 인재 채용에 대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헤스의 법칙을 적용해보면 결국 모든 사람의 삶의 종착지는 같으니 어떤 길이든 에너지 총량은 같다. 누구나 타려고 하는 그 열차만이 정답은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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