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서산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류영동 부소장

서산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류영동 부소장
서산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류영동 부소장

서산시 부석면 가사2리 출신 충민공 류사선생이 괴산군지에 실린 사실이 확인됐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류사 선생은 20세 나이에 무과급제로 괴산군수에 부임됐고, 임기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에 피해있는 인조임금을 구하기 위해 괴산군민으로 구성된 근왕병을 이끌고 광주로 출정하여 나라를 구하다 장렬히 순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하 병사는 전세가 불리하여지자 시신을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선생의 투구와 토수만을 거두어 말 등에 매달고 지금의 서산시 부석면 가사리 254번지에 전했고, 안타깝게도 먼 길을 달려온 말마저 굶주림과 피로로 도착과 동시에 죽고 말았다.

본지는 가을 햇살이 유난히 내리쬐는 날, 서산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부소장이자 충민공 류사선생의 후손인 류영동 ()서산시 행정동우회 회장을 만났다.

Q 서산지역 출신 충민공 류사 선생에 관한 기록이 많이 없어 아쉬웠다. 류사 선생의 후손으로서 언제부터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접했나?

아마도 막 말을 시작하면서 조부님께서 내게 말씀해주셨던 것 같다. 이것은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우리 부친은 나이 19세에 태안의 전수 리씨가문 딸과 혼인을 하여 55녀 중 장남이자 12대조 후손으로 나를 세상에 낳아주셨다. 당시 첫 아들이니 얼마나 귀했겠나. 오죽했으면 할아버지께서 내게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고 말씀하셨을 정도였다.

나는 그런 할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으려고 책을 펴놓고 자다가도 할아버지 발걸음 소리만 들리면 벌떡 일어나 침 묻은 책을 펼쳐 들고 읽는 척을 했다. 그러면 손자가 공부하는 줄 알고 할아버지는 세상을 다 얻은 듯 좋아하셨다.

할아버지 무릎은 늘 내 차지였다. 당신은 한학을 하시면서 강직·청렴하게 사셨던 분으로 자주 내게 충민공 류사 선생에 관한 일대기를 들려주시며 조상의 뜻을 받들어 늘 품행에 있어서 바르고 매사 정의롭게 행동해야 한다. 류사 선생은 전쟁 중에 오랑캐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휘하 병사를 보면서 분을 참지 못해 당신의 손가락을 잘라 죽음으로 임금을 섬긴다는 뜻의 사군사세 글자를 혈서로 써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셨다. 그러다 물밀 듯이 쳐들어오는 청나라 군사들과 치열한 전투 중에 수십 명의 적을 물리치고 난 후, 적이 휘두른 시퍼런 칼날에 맞아 순절하셨다고 말씀하시더라.

할아버지는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류사 선생은 평소 가족을 잘 챙길 뿐만 아니라 곤궁한 백성들 또한 세세히 살피어 굶주림이 없도록 했다. 우리 영동이도 커서 꼭 그런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라고 말이다.

‘충민공 류사 선생 정려각 신도비’ 제막식 장면
‘충민공 류사 선생 정려각 신도비’ 제막식 장면

Q 문화류씨 집안의 후손으로서 할아버님 평소 뜻대로 하려면 굉장히 마음의 부담이 켜셨을 텐데?

어머니는 아들이 조부 무릎에서 류사 선생의 얘기를 자주 듣는 것을 보시면서 할아버지 말씀 명심하거라. 앞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이 참 많다며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셨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무엇을 하라는 것일까!’생각하며 고개만 끄떡였다.

여기서 우리 어머니를 기억하자면 참으로 따뜻하신, 전형적인 대한민국 어머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일이 있다. 이른 아침 눈을 겨우 뜨고 어머니 품에 안기려고 안방으로 비적비적 들어가 보니 아랫목에 자리를 틀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밥을 먹고 있는 낯선 사람을 발견했다. 놀란 눈이 번쩍 뜨이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뚱히 서 있는 사이, 언제 들어왔는지 함께 사는 삼촌들이 할아버지도 아직 (진지)드시지 않았는데 거지를 안방에 앉혀놓고 밥부터 먹이면 어쩌냐고 볼멘소리를 어머니께 하는 걸 들었다. 그때야 어머니가 지난번처럼 또 거지에게 밥상을 차려준 걸 알았다.

우리 어머니는 당신의 입속에 있는 것조차 이웃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꺼내줄 정도로 정이 많았던 분이시다. 그런 어머니를 내 아내가 참 많이 닮아있다.

아내는 평소에도 텃밭에 이것저것 푸성귀를 심어 엄마방(경로당)에도, 형제간에도 나눠주며 기쁨을 누린다. 그 모습을 보면 생전의 가족을 잘 챙길 뿐만 아니라 곤궁한 백성들 또한 세세히 살피어 굶주림이 없도록 했다는 충민공 할아버지의 말씀이 떠오른다.

나 대신 우리 아내가 류사 선생의 뜻을 받드는 것이 고마워서 식전 산책길 안식구에게 당신 너무 감사하네라고 살짝 고백하기도 했다.

서산시 부석면 가사2리 충민공 류사 선생의 '충절사'사진4: 연구소사진5
서산시 부석면 가사2리 충민공 류사 선생의 '충절사'사진4: 연구소사진5

Q 조부님이 그토록 강조했던 충민공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충민공 류사(柳泗 1599~1636) 선생은 조선 중기 무신으로 자는 성부(聖夫)이고 본관은 문화이며 괴산군수를 역임하셨다. 또한 고려 개국공신 삼중대광, 벽상공신 대승공 차달(車達)25세손이고 조선 태종조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충경공 류 양의 12세손이며, 수통정 류광록의 맏아들로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가사리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밀양 박씨이고 후배(后配)는 평양조씨다. 어려서부터 용맹하고 강직했으며 병서(兵書)에 통달함은 물론 용모가 단정하였다. 자라면서 행실이 바르고 예로서 몸을 닦았으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며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다.

161920세 젊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 병절교위 군자감을 역임하였고, 1632년 괴산군수 겸 선전관 오위도총부 부총관이 되었다. 특히 괴산에서 목민관으로 있을 때 청렴하고 자애롭게 백성을 사랑하며 가족은 물론 백성을 세세히 살피어 굶주림이 없도록 하여 괴산 백성들은 류사 선생을 부모같이 섬기고 따랐다고 한다.

1636(인조14) 괴산군수로 재직하던 중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남한산성에 피해있는 인조임금을 구하기 위해 괴산군민으로 구성된 근왕병을 이끌고 경기도 광주까지 나아가 필사즉생(必死則生)정신으로 오직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하였다.

이때 청나라 오랑캐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휘하 병사를 보면서 분을 참지 못해 손가락을 잘라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찢어 그 위에 죽음으로 임금을 섬긴다는 뜻의 사군사(死君事)’라는 세 글자를 혈서로 써 깃발에 꽂고 흔들어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던 분이시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물밀듯이 쳐들어오는 청나라 군사들과 치열한 전투 중 적을 수십 명 죽이고 자신 또한 적의 칼날에 맞아 순절하는 안타까움을 당했다. 이때 전세가 불리하여지자 부하 병사가 미처 류사 선생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다만 투구와 토수만 간신히 거두어 말의 등에 매달고 지금의 사당이 지어진 서산시 부석면 가사리 254 충절사에 도착하여 전했다. 그리고 난 후, 그 말 또한 치열한 전투와 연이은 굶주림·피로으로 쓰러져 죽었다.

충민공 류사 선생에게 내려진 '교지'
충민공 류사 선생에게 내려진 '교지'

Q 충민공 류사 선생에 관한 기록 중에 지금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들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나?

물론 아주 많을 줄로 안다. 그중에서 몇 개를 말하자면,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충북 괴산군수 시절 남한산성 험천에서 무릇 무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으뜸이다. 그러니 끝까지 싸워서 오랑캐를 물리치라며 직접 쓴 혈서를 깃발에 매단 체 대성통곡을 하며 사병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지금 전해지는 류사 선생의 이야기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군인정신으로 <가장 영광된 죽음은 마지막 전투에서 적의 군검에 쓰러져 죽는 군인>이란 뜻으로 후대 사람들에게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류사 선생이 순절했단 소식을 들은 인조임금은 매우 놀라 슬퍼하며 신하를 보내 조문하게 하였고 본인은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소찬을 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당시 청나라와의 전쟁으로 인해 전망공신에 대한 상을 내리지 못하다가 1717년 종묘 조정 시 특별히 이등공신 종2품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고, 시호는 충민이며 큰 공적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영구히 충절사사당에 세워지도록 해주었다.

그 후 1867, 매일매일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기록한 일기인 승정원일기(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는 고종 시절, 류사 선생에게 충신·효자·열녀 등에게 내려지는 정려(旌閭)를 세울수 있도록 했고, 정문(旌門)을 하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18811020, 조정에서 다시 병절교위 훈련원주부 류사 증 종2품 가선대부 병조참판으로 교지(敎旨)를 내렸다.

현재 묘소는 서산시 부석면 가사리 산 245번지검안산에 있으며, 묘 앞에 치열한 전투 속 굶주림과 피로함에도 불구하고 장군의 유품을 매달고 도착한 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충마묘(忠馬墓)까지 만들어 그 뜻을 후대에 널리 기리도록 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역사를 추적하다 보니 조선시대 병자호란 당시, 우리 서산 출신의 군수님 네 분이 타지역에서 근무하다 참전하여 순절하신 사실을 확인했다. 그분들을 위령하기 위해 사당을 지으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지금껏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이 부분도 깊이 고민해볼 문제라고 본다.

이제 몇 달 후인 음력 1226일은 류사 선생이 전쟁에서 순절한 날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흑소 한 마리를 하사받아 제를 올리고 다음날 동네잔치를 했다고 들었다. 지금은 문중이 다수모여 자정에 제를 올리는데 그때마다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죄송함에 몸둘바를 모르겠다.

사실 20년 전부터 충민공 류사 선생을 문화재에 등록하기 위해 절차를 밟고 있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부분은 현재를 살아가는 자손의 한사람으로서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내 평생소원이 있다면 이분을 문화재로 등재하여 후손들에게 나라사랑과 충절의 정신을 물려주기를 소원해 본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 바쳐 충성했던 충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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