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가야면옥 이정수 대표

이정수 가야면옥 대표/서산시체육회 운영위원/부춘동체육회 이사/부춘동 지역사회보장위원회 위원/서산법사랑 위원/서산시 씨름협회 사무국장/서산특전동지회 회원/서산생활체육황소씨름 초대회장/(전)민주평통 청년위원장
이정수 가야면옥 대표

#프롤로그

문명의 시계가 멈춘 땅 아프리카 라이베리아공화국, 지난 2월 코로나19가 확산할 즈음 마음의 결기를 품고 광산개발 사업차 출장을 떠난 가야면옥 이정수 대표.

잠시 다니러 간 것이 그만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사태로 6개월간 체류! 아프리카에서 지낸 6개월은 그에겐 오롯이 문명과의 단절인 동시에 그동안 편안했던 일상과의 단절이었다. 특히 남편없이 아빠없이 6개월이란 긴 시간을 보냈을 가족을 생각하면 가슴이 울컥했다는 이 대표. “걱정으로 지냈을 가족을 생각하면 그저 미안할 뿐이라고 말했다.

지구 건너편에서 CNN방송으로 접한 심각했던 국내상황과 예상하지 못한 아프리카의 악재들이 맞물려 마음고생과 육체 고통으로 생존까지 위협받았다는데.

서산시대는 아프리카 라이베리아공화국에 175일 동안 체류되었다 돌아온 가야면옥 이정수 대표를 만나 그간의 못다 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광산개발을 위해 외삼촌과 함께(가운데)
광산개발을 위해 외삼촌과 함께(가운데)

# 20199, 광산산업 해외사업본부장의 사명을 띄고 아프리카로 날아갔다

20199, 외삼촌과 함께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로 가기위해 24시간 하늘을 날았다. 우리가 가는 목적은 배낭 하나 둘러메고 떠나는 여행도 아니고, 남들의 발길이 쉽게 닿지 않은 오지를 탐험하는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집안의 가장이고 어린 두 아이의 아빠였던 내가 선택한 광산사업때문이었다.

그것은 좋은 말론 도전이었고, 또 다른 말론 무모함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검은 땅 아프리카는 37년을 살고있는 내게 꿈과 희망이 더 컸던 나라였다. 하지만 꿈과 현실의 문턱은 너무도 달랐다. 광산에 투자하고 상황을 지켜봤다. 아뿔싸, 수익은 쉽지 않을 듯했다.

특히 그곳에 상주해야 하는데 한국에 사업체(가야면옥)를 두고 있으니 정착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관료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나? 그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믿음이 가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고민을 하다가 추후를 약속하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난 218, 단절과 열림의 세계 아프리카로 꽁꽁 싸매두었던 원대한 꿈을 가지고 다시 날아갔다. 그때는 이미 대한민국을 넘어 전세계로 코로나19가 폭발적으로 터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광산체굴을 하기위한 '주민설명회'
광산체굴을 하기위한 '주민설명회'를 하고 있다.

# 2020218, 코로나19가 확산하는 가운데 검은대륙 아프리카에 입성하다

미국 자유노예들이 만든 아프리카 라이베리아공화국에서 처음 한 일은 매장량 조사였다. 이 일은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하기에 수개월이 걸리는 과정이었다. 우리는 먼저 사업을 하기위해 학교를 지어줘야 했다. 그러자 주민들은 우리에게 우물을 파달라, 길을 내달라는 등 요구조건을 들고 나왔다. 그들의 요구를 다 받아주고 (사업)시작하니 이미 자금이 부족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꿈과 설렘을 가지고 간 아프리카는 이렇듯 처음 몇 개월은 아무리 도전과 모험을 좋아하는 나로서도 힘 빠지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빨리빨리를 외쳤던 대한민국 내나라의 일상들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갈등을 하는 사이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진지하게 고민할수 있었다.

이런 모습이 조금 시무룩해졌나? 아이들은 땅속에 박혀있는 카사바를 캐 주며 힘을 북돋아 주다. 그럴때면 내 속에 뾰족하게 자라고 있던 고향의 기억들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며 지금 처한 상황이 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도 있겠다싶어 기운을 차리곤 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각자도생으로 살아가는 아프리카 주민들, 그 속에서 부대끼며 있다 보니 슬슬 (사업)어디서 뭐가 잘못됐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해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행착오의 과정을 하나하나 경험하며 우리는 결국 광산사업허가를 받아냈다.

지난해 9월 타페타광산 체굴현장에서
지난해 9월 타페타광산 체굴현장에서

# 코로나19로 하늘길이 막혀버린 아프리카 생활, 화상통화가 아니었다면 어쩔뻔 했나

타는 듯한 불볕이다가 어느새 바람불고 비 쏟아지는 아프리카 생활이 어느덧 40일이 된 날, SNS를 통해 생존 신고를 했다. ‘나는 지금 멸치가 되어가는 중이라고 적었다. 특히 대한민국 막걸리 중에서도 당연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지곡막걸리가 유난히 그리움과 동시에 절실하다고, 코로나19로 하늘도 문을 닫아 예정보다 더 길게 체류할 듯싶다고 썼다. 글의 말미에는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니 좋은 날을 기다려봅시다라는 희망의 메시지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의료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험지에서 내게 던지는 절박한 메시지기도 했다.

3개월 예정으로 떠난 아프리카 광산개발이 전세계 코로나19로 기약없는 체류를 하다 보니, 애들은 아직 어리고 성공적인 기반을 다지고자 떠나온 기존 생각에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37살 가장으로서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내 생각이 너무 무모한 것은 아니었나 자책도 하면서 말이다.

자고 일어나도 언제일지 알 수 없는 공항폐쇄, 그런 속에서도 이런 날도 그리울 때가 있겠지라며 스스로 독려하기도 했다.

세상에 화상통화라는 문명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아빠는 아프리카에서 각개전투 중이다. 너희도 조금 크면 전투준비를 해야 한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아빠는 지금 아프리카에서 너희들 전투 때를 대비하는 중이란다. 엄마 말씀 잘 듣고 어른들 보면 인사 잘하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있어라. 생존법은 확실하게 전수해주마. 사랑한다.’

이것은 화상통화 후 남긴 내 작은 일기들이다.

염증과 피부병, 장티푸스, 말라리아가 내 몸을 공격했다. 3일 동안 꼬박 링거를 맞았다.
염증과 피부병, 장티푸스, 말라리아가 내 몸을 공격했다. 3일 동안 꼬박 링거를 맞았다.

# 아프리카 생활 100, 염증과 피부병, 장티푸스, 말라리아가 내 몸을 공격했다

100일이 지나도록 나는 여전히 아프리카 라이베리아공화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때는 이미 영양실조에 걸리기 일보 직전. 이를 악물고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 돌기둥을 샌드백 삼아 복싱을 했다. 말라리아의 공포와 열악한 위생 속에서 체력을 지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아프리카 현지인들의 말을 빌자면 누구나 한두 번은 걸린다는 말라리아와 장티푸스라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 또한 피해 가지 못했다.

염증과 피부병, 장티푸스, 말라리아가 내 몸을 공격했다. 선교사는 말라리아는 상상할 수 없는 아픔이라며 면역력이 없으면 죽으니 운동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운동광으로 복싱 3, 씨름은 무려 7년 정도나 했던 내가 이런 말을 들으니 미적거릴수가 없었다.

우연히 알게 된 현지 의료종사자에게 부탁하여 3일 동안 꼬박 링거를 맞았다. 병상에 누워있으려니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과 가족들, 특히 아직 어린 두 남매가 그렇게 보고 싶을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르고 절박한 현실에서 나를 놓지 않으려 악착같이 땀 흘리며 운동에 매달렸다. 아니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하는 오기가 발동한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아프리카에서 생존을 향한 몸부림을 쳤다.

낡고 더러워지면 그냥 폐기해버리는, 그리고 또다시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는 첨단 자본의 단절이 서서히 익숙해질 즈음, 내 육신이 딛고 서 있는 땅을 향해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처음으로 가슴 가득 느꼈다. 사람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적응하는 사회적 동물이란 아리스토텔레스 말이 사실인가 보다. 그곳에서 영주권을 취득했고 라이베리아 운전면허증을 취득했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는 말처럼, 힘들고 지치는 일상이 오더라도 100여 명의 직원이 바라보는 눈빛에 결코 주눅 들지 않으려 노력했다. 최대한 강해 보이려고 설정된 일상을 보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정말 나 자신이 그렇게 변해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살아내는 건 어쩌면 그리 어렵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언제든 기꺼이 춤을 추고 노래를 했다. 고된 노동의 하루를 마감하며 춤과 노래로 지친 삶을 위로하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졌던 가혹한 삶과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며 비극에 잠기기보다 현재 부딪친 순간의 기쁨을 선택했다. 느리지만 깊고 진한 삶을 살아내는게 바로 아프리카 정신이었다.

도둑이 많아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으면 총기허가도 나온다.
도둑이 많아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으면 총기허가도 나온다.

# 5개월, 남편없이 아빠 없이 5개월을 사는 가족에게 고맙고 미안하다. 어떡하든 잘 버텨보자

5개월로 접어들자 어느 순간 나를 돌아보니 수도자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의 심경을 나는 이렇게 토로했다.

암울한 시대에 조국을 떠나와 새로운 문화를 접하며 밝은 면보다는 세상은 의도하는 자들에 의해 조작되고 악용되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무엇보다 세상은 절대적 노력없이 이뤄지는 것은 더욱이 없으며 무엇보다 도전에 대한 확신이 중요하다.

이곳에서 나는 철저히 세상은 공짜도 파라다이스도 없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다.”

축복 속에 위대한 내일을 꿈꾼다. 남편없이, 아빠 없이 5개월을 사는 우리 식구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 어떡하든 잘 버텨보자.”

이곳 생활도 5개월 차를 맞이했다.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까지 와서 욕심을 부린 탓인지, 아프리카가 나를 필요로 한 탓인지, 보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이제는 음식도, 날씨도, 사람도, 언어도, 환경도 그리 힘들지 않다. 다만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고독해진다. 고독은 씹을수록 건강해지는 듯싶다. 이 시간 또한 감사할 뿐이다. 아프리카는 현재 우기철이다. 한국은 지금쯤 장마철인데. 시원하게 쏟아졌다 맑게 갠 날씨를 기다려본다. 영원한 건 없으니까 잘 버텨보자. 모두 건강한 여름 되시길.”

금광개발과 원목사업, 해외자원개발을 위해 체류 된 지 어느덧 150일째를 맞이한 나는 조바심을 내려놓고 서서히 사업에 전력 질주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조금씩 제 모습을 드러낸 광산산업이 어느 정도 제 괘도를 잡아가고 있었다.

길 상태가 좋지못해 2박 3일 걸려서 도착한 부쉬지역
길 상태가 좋지못해 2박 3일 걸려서 도착한 부쉬지역

# 175, 나는 드디어 36시간 길고 긴 비행을 하고 가족품으로 돌아왔다.

코로나19로 모든 공항이 폐쇄되고 하늘길이 막힌 상태로 오늘내일 일주일 한 달, 그러던 것이 어언 6개월. 라이베리아에는 한국 대사관이 없어 나이지리아 대사관에 근무하는 영사님과 연결하여 사정을 설명했다. 마침 유럽 쪽 항로가 열려서 UN비행기 요청을 하게됐고 이외에도 여러 가지 정보를 더 얻게 됐다.

이제 내일이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내 나라로 돌아갈수 있다니 무어라 형언할 수 있을까.

아프리카 라이베리아공화국을 떠나기 전, 여러 가지 생각들이 오버랩됐다.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왁자지껄 웃음이 끊이지 않는 이곳 아이들의 순수함, 아침저녁 보았던 낯익은 얼굴들, 직원 100여 명과 동고동락하며 생활했던 일상들, 다양한 사람들이 아님에도 늘 새로운 일들의 연속, 앞으로도 아주 많이 그리울 가족같은 직원들, 그리고 긴장된 175일간의 매일매일 시간들.

떠나는 나를 보며 직원들은 기쁨과 동시에 슬픔의 감정을 드러냈다. “빨리 돌아와이 말 속에는 그래야 우리가 돈을 벌고, 그래야 우리가 먹고 마실 수 있으니 빨리 와서 고용해달라는 간절한 메시지가 들어있었다.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라이베리아 친구들.

막상 돌아서려니 무엇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예측할 수 없었던 6개월 동안 온몸을 태울듯한 뜨거운 태양과, 무언가에 쫓긴 듯한 급하게 쏟아지던 소나기, 물기 머금은 서늘한 바람까지 예측 가능한 잠시의 틈도 주어지지 않았던 아프리카 생활들.

무엇을 하든 오래 기다려야 하는 아프리카 문화는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성격 급한 한국인 기질의 나 이정수에겐 적응하기 어려운 대목들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이별앞에서는 그 또한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이 되니 말이다.

나는 그렇게 직항이 없어 유럽을 거치고 중동을 거친 3번의 경유로 36시간 길고 긴 비행을 했다. 그리고 그토록 그리워했던 가족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또다른 가족 직원들과 함께
또다른 가족 직원들과 함께

#에필로그

선발대로 아프리카 라이베리아공화국 첫 탈출자가 된 가야면옥 이정수 대표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아프리카의 낯선 곳을 경험하는 일만큼 설레고 두려움이 공존하는 순간은 없었던 것 같다살면서 다양한 경험을 해왔지만 인생에 큰 보탬이 되리라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어서 잠시, 잠깐, 그러다 반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한가정의 가장임에도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 공백에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아프리카에 홀로 떨어져 그리움과 싸우다 보니 그것들이 솜뭉치가 되어 또 다른 책임감과 사랑으로 승화됐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범사에 감사하다. 물을 쓰는 것도 전기를 쓰는 일도, 심지어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병원을 가고, 봉사를 하고. 나는 오늘도 내게 주어진 일상을 행복한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인터뷰를 끝내며 기자의 머릿속에 이 한 줄의 명언이 생각났다. ‘인생은 경험의 연속이다. 비록 이를 깨달을 수 없을지라도 개개의 경험은 우리를 더욱 성숙하게 만든다.’

“빨리 돌아와” 이 말 속에는 그래야 우리가 돈을 벌고, 그래야 우리가 먹고 마실 수 있으니 빨리 와서 고용해달라는 간절한 메시지가 들어있었다.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라이베리아 친구들.
“빨리 돌아와” 이 말 속에는 그래야 우리가 돈을 벌고, 그래야 우리가 먹고 마실 수 있으니 빨리 와서 고용해달라는 간절한 메시지가 들어있었다.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라이베리아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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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시체육회 운영위원 부춘동체육회 이사 부춘동 지역사회보장위원회 위원 서산법사랑 위원 서산시 씨름협회 사무국장 서산특전동지회 회원 서산생활체육황소씨름 초대회장 ()민주평통 청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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