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갈 나이가 다 됐어. 남은 인생은 음악을 하다 가는 게 내 소원이야

83세 실버 드럼 연주자 손영강 선생
83세 실버 드럼 연주자 손영강 선생

#프롤로그

눈만 뜨면 까만 고무신을 찾아 신고 휭하니 동네 극장으로 달려가 무대 뒤로 숨어들었던 까까머리 소년이 있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경쾌한 손놀림의 드럼 연주자였다. 아이는 쪼그리고 앉아 한나절을 들어도 지겨운 줄 모르고 음악을 감상하며 꿈을 키웠다.

그 현란했던 손놀림, 훗날 소년은 동춘서커스 단원이 되어 당대 날고 기었던 가수들과 함께 연주자의 길로 나서게 됐다.

선생의 나이 어느새 83, 지금은 같은 또래 어르신들에게 경쾌한 리듬으로 음악 선물을 하고 있다. 악기 앞에만 앉으면 팔순의 나이에도 청년 못지않게 신명을 표출하는 손영강 선생.

서산시대는 서산시 팔봉면에 사는 실버 드럼 연주자 손영강 선생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하루 먹을 것이 없어 주린 배를 안고 사는 게 일과였는데 중학교는 그림의 떡이었다

배가 고픈데 학교 가야 하는 이유를 몰랐다. 오늘 하루 먹을 것이 없어 주린 배를 안고 사는 게 일과였다. 연둣빛 꿈이 영글었던 중학교의 교정도 사치였다고 생각한 손영강 선생은 자연스레 학교를 포기했다.

본지와의 인터뷰를 하며 선생은 모친 고생은 보지 않아도 안다. 죽지 못해 살았다는 당신 말씀이 딱 맞는 말이었다. 사시사철 비어있는 독에는 쌀 한 톨이 담겨져 있지 않았고, 식구들은 주린 배를 쳐다보며 하루하루를 견뎌내야 했다고 말하는데 9월의 낮 공기가 서늘하다.

그러던 차, 손영강 선생이 13세 되던 해인 19506·25전쟁이 발발했고, 그의 가족은 피난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지병으로 고생하시던 부친이 56세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는 아픔을 겪었다.

실버 드럼 연주자의 파워풀한 드럼 연주 솜씨
실버 드럼 연주자의 파워풀한 드럼 연주 솜씨

# 일제강점기의 아픔과 6·25전쟁의 고통까지 함께 겪었던 선생에게 드럼 연주는 곧 고통을 잊게 해주는 마약같은 존재였다

혹독한 일제강점기를 거쳐 처절했던 6·25 동란과 지난한 보릿고개. 그 어렵고 힘들었던 격변의 시기를 그래도 희망으로 이겨낸 것은 종로 5가 시장 안에 지금은 사라져 자취도 남지 않은 동대문극장이었다.

당시에는 트로이카 여배우의 등장으로 서민 관객들이 대거 극장에 찾아왔었는데, 그때는 한국영화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였다.

손영강 선생이 살던 곳에도 연극을 보려는 사람들로 연일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리고 연극이 끝나면 2부로 쇼가 이어졌는데 당시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띄었던 것이 바로 드럼 치는 모습이었다. 배고픈 소년이 주린 배를 잊을 수 있었던 것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드럼이 온통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어지러우니 취직이 될 리 없었다. 날마다 드럼 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동대문극장을 찾았다. 현란한 동작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무대 뒤로 몰래 올라가 드럼 치는 분 옆에 바싹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곤 했다. 때때로 관리자들에게 들켜 혼이 나기도 했지만, 이튿날 또 잊어버리고 드럼 치는 모습에 쫓겨 극장을 찾았다. 나도 모르게 신들린 사람처럼 말이다. 얼마나 좋던지 다른 것은 눈에 차지도 않았다.

요즘 같으면 드럼 배우기 위해 학원이라도 갔겠지. 그때야 학원이 어디 있나, 그저 눈으로 치는 것을 보는 게 배우는 것이었다. 드럼 치기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시커멓게 찌그러진 냄비를 엎어놓고 두드리기 시작했다.

당시 냄비는 살림살이 중에서도 귀한 물건이었는데 그걸 치는 모습을 어머니에게 들키는 날에는 여지없이 혼이 나곤 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던 드럼 사랑. 어느 날부터인가 자주 연습을 하다 보니 내가 치는 소리가 차츰차츰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청량리 역전에 있는 동춘서커스에 입단했다.”

가수 단비의 노래에 맞춰 드럼을 연주하는 송영강 선생
가수 단비의 노래에 맞춰 드럼을 연주하는 송영강 선생

# 동춘서커스 단원이 되어 전국을 떠돌며 드럼 연주자로서 공연을 했다

막상 서커스단에 입단은 했지만, 드럼을 배우기는커녕 잔심부름과 빨래, 청소, 악기 닦기 등을 손이 부르트도록 했단다. 솔직히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힐끔힐끔 드럼 연주자가 치는 실력을 훔쳐본 선생은 나보다 월등히 잘한다는 생각은 하질 못했다. 그걸 보면서 내 설 자리가 분명 멀진 않았구나란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때부터 더 악착같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고 당시의 생각을 더듬으며 말해 주었다.

드럼을 배우고자 입단했지만 금방 가르쳐주질 않고 이리저리 핑계를 대는 단원들이 얄미웠다. 그래도 꾹 참다보니 자기 차례가 왔다는 선생은 당시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늘을 품은 듯 행복했다.”

그렇게 선생은 드러머로서 동춘서커스에 정식으로 뿌리를 내리게 됐다. 물론 처음에는 메인 드럼 연주자가 빠지는 날에 겨우 땜빵으로 투입되긴 했지만 말이다.

그동안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미 8군 부대 PX에서 중고 드럼 하나를 구입한 선생. 그때부터 본격적인 손영강의 드러머 인생이 시작되었다.

당시 서커스가 열리는 날에는 하늘에 만국기와 울긋불긋한 천들의 대형천막, 온 동네를 다니며 관객을 부르던 피에로, 둥둥둥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와 현란한 조명의 가설무대 그리고 곡예사 등이 트레이드 마크였다. 지금 생각해도 심장이 떨린다고 선생은 말했다.

# 당대를 주름잡았던 스타들과 무대 위를 휩쓸었다

TV가 없던 시절, 서커스는 서민들을 울리고 웃기는 최고의 볼거리였다. 주로 1부는 연극을 했고, 2부가 되면서 쇼를 했는데 이때야말로 선생의 실력이 제대로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드럼 스틱을 들고 심벌을 때리면 관객들은 보컬을 보는 것보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 많았다. 아주 신명나게 음악 속으로 빠져들다 보면 한겨울에도 온몸에 땀이 흥건히 밸 정도였다는 선생.

10여 개가 넘는 서커스단 가운데서도 인기 절정의 선두주자였던 동춘서커스는 그야말로 당시의 최고 인기를 누리던 사람들의 집합체였다.

12살 어린 나이에 엄마 손을 잡고 노래를 하러 왔던 하춘화 씨부터 오은주, 문주란, 남철·남성남, 서영춘, 나훈아 등 당대 최고의 흥행가도인 그들을 드러머로서 함께 섰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짜릿했다.

특히 교통이 불편하던 그 시절에는 전국을 돌며 국민들에게 각종 볼거리와 웃음을 선물했던 서커스, 그것은 어쩌면 그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하나의 처방전이었다.

심지어 그가 속해있던 서커스에서는 시골마다 멍석을 깔아놓고 공연을 했다. 지금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KBS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는 송해 씨부터 작고하신 이주일 씨까지 수많은 스타를 배출한 동춘서커스, 그 속에 손영강 선생도 한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자랑거리라고 했다.

6시 내고향에 출연할 당시
6시 내고향에 출연할 당시

# 가라오케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밴드는 급격한 쇠퇴의 길로 가게 되었다

그러다 1961516, 이른바 ‘5. 16군사정변이 일어났다. 숨 쉴 틈 없이 바쁘던 그의 인생에도 잠시나마 휴직기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도 몸이 근질근질함을 느꼈다는 손영강 선생.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살아간다고, 드럼 연주자가 손 놓고 쉬는 것도 어느정도 한계가 있었다.

부산으로 내려간 그는 5인조 밴드를 만들었다. 실력을 익히 들어서인지 찾아주는 사람들이 꽤 많아 수입도 짭짤했다.

그렇게 나는 서울과 부산을 왕복하며 밴드 생활을 영위했다. 하지만 1981년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길 가다가도 쳐다봤다는 이유만으로 총대에 까이던 세상이 되었다. 강도·도둑도 아닌데. 괜히 뒤집힌 세상이 보기 싫어 다시 달팽이마냥 껍질 속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때부터 수입이 불규칙해져 갔다. 그나마 조금 들어오면 아이를 키우는 집사람에게 부쳐줬다. 그것도 오래가질 않았다. 공연은 했지만 주로 업주들에게 떼이는 돈이 만만치 않게 많아져 갔다. 또 받더라도 간에 기별도 가지 않게 주었고. 그도 어려워 한 달치 밀리다 보면 어느새 2~3개월은 족히 받질 못했다. 큰맘 먹고 독촉을 하면 다음 달에 준다는 말에 또 주저앉고.... 그렇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음악활동을 했다. 단장이 실컷 부려먹고 도망가는 경우도 많았다.”

선생은 그때야말로 음악은 그저 봉사라는 생각이 극명하게 뿌리박혀있던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에서 가라오케문화가 들어왔다. 그가 결성한 밴드는 곧바로 직격탄을 맞았다.

돈을 벌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했다는 손영강 선생은 옷 장사를 하기도 했고, 아무것도 모른 채 그동안 모은 돈으로 식당을 차려 보기도 하고, 그 외에도 여러 업종을 바꿔가며 장사를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여전히 드럼을 놓지는 않았다는 손영강 선생.

그러던 차, 그만 덜컥 집사람이 폐결핵을 앓게 되었단다.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몸에 좋다는 것을 구해서 먹였지만, 결국 무남독녀로 자란 딸아이가 동덕여고에 입학함과 동시에 36살 꽃다운 나이에 집사람을 저세상으로 보냈다.

아라메음악봉사단 단원들과 함께(제일 왼쪽)
아라메음악봉사단 단원들과 함께(제일 왼쪽)

# 그 후로도 굴곡진 삶을 살았다. 그러다 서산 팔봉으로 터를 잡고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그 후로도 굴곡진 삶을 살았다. 그러던 차 좋은 여자분을 만나 후배가 있는 서산 팔봉으로 자주 내려오게 됐고, 올 때마다 참 살기 좋다는 생각을 했단다. 마침 빈집이 있는데 와서 살라는 말을 들었고 그참에 짐을 챙겨 내려옥 됐다는 손영강 선생. “벌써 15년이나 됐다. 그때가 내 나이 예순여덟이었다.”

정착해서 살다 보니 어디서 들었는지 저 사람 딴따라 출신이란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 그걸 듣고 여기저기 음악 봉사단체에서 연락이 왔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때부터 네 군데 봉사단체에서 드럼 연주자로 공연을 하게 됐다. 물론 모두 봉사다. 그것도 벌써 10여 년이 됐다.

선생은 말했다. “요즘은 주로 요양원에서 봉사를 한다. 하다 보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참 좋아하신다. 예전 어릴 때 내가 했던 모습처럼 드럼 치는 내 옆에 꼭 붙어 앉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그분들은 드럼 치는 것을 못 봤으니까. 내가 (심벌)때리면 흥이 나는지 가수보다 나를 바라본다. 때로는 가수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어르신)그분들 입장에선 또래 늙은이가 치니 얼마나 희한하겠나. 또 어디서 이런 걸 봤겠나.”

때로는 봉사 가는 게 힘들어 오늘은 가지 말까?’ 생각하다가도 금방 몸 건강할 때 다녀오자라며 준비해서 간단다. 결국 갔다 오면 자신의 몸이 더 건강해짐을 느낀다는 손영강 드럼 연주자.

그래서 그런가? 기자의 눈에는 83세 나이지만 겨우 이순(耳順)을 넘긴 듯 젊어보였다.

드럼 연주자 손영강 선생의 파워풀한 드럼 연주
드럼 연주자 손영강 선생의 파워풀한 드럼 연주

# 에필로그

이제 갈 나이가 다 됐다고 말하는 손영강 드럼 연주자는 이 나이에도 남을 위해 드럼 연주를 해주고 웃음을 준다는 것이 행복하다. 지금까지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했다. 이제 여한이 없다. 남은 생은 내 음악을 듣고 행복할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음악을 받치고 싶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선생을 가리키며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정말 젊어 보였다. 어디를 봐도 83세 같지 않은 모습에 잠시 놀랐지만, 이내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음악이란 젊음의 충전기가 늘 가까이 있으니 당연한 결과 아닐까.

이제 여름이 가을을 부르고 있다. 부디 이 가을에는 햇살 한 자락 가슴에 두르고 손영강 드럼 연주자가 선물하는 따뜻한 미지의 세계로 떠나보시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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