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경의 재미있는 이슈메이커-⑲

 

사진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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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한바탕 지나간 자리. 거센 비바람에 휩쓸린 상흔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 부러진 나뭇가지. 한쪽 팔을 잃고 펄럭이는 현수막. 길가에 나뒹구는 쓰레기들. 새벽 비바람의 위세가 실로 대단하다. 대명천지(大明天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청명함을 넘어 청아하기까지 하다. 무사히 견디어낸 지상의 상흔을 티 없이 바라보는 하늘빛이 순수하면서도 잔학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천둥 번개로 요동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다. 그렇게 무심한 하늘을 한참을 올려다본다.

문득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5학년. 필자의 학급에는 대략 40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었다. 부끄러움이 무언지도 알고, 이성친구에 대한 호기심도 인다. 친구들에게서 따돌림 받지 않으려면 집단의식의 틀 안에서 행동해야 한다.

특이한 행동은 십중팔구 놀림감이 되기 십상이다. 필자는 그런 집단의 틀 안에서 유다를 것 없는 평범한 축이었다. 평범한 외모, 평범한 키, 평범한 성적. 심지어 이름도 무난하다. 특별나고 싶은 마음도 의중 있지만, 번번이 선생님의 타깃이 되는 대상은 피하고 싶다.

독특한 이름을 가진 친구들은 의례 선생님의 호출 1순위였기 때문이다. 필자의 이름은 여간하니 참으로 다행이련만, 하필이면 동급생 중 이름에 성까지 똑같은 친구가 있었다. 놀림감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살아온 초딩인생’ 5년차 태풍과도 같은 위기가 닥친 것이다. 친구들은 괜히 이름 한번 부르고 필자가 쳐다보면 너 아닌데?’하고 놀리곤 했다.

수업 시간. 담임 선생님은 학생들의 수업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게임을 한 가지 제안하셨다. 문제를 내고 손을 들어 맞춘 횟수를 한 달 동안 카운트해서 가장 많은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아이들은 승부욕에 불타 경쟁하듯 손을 들었다. 필자도 이에 질세라 수많은 경쟁률을 뚫고 내 손이 더 잘 보이도록 의자 위에 올라서기도 했다. 시끌벅적한 아이들의 저요! 저요!’ 속에서 드디어 필자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인가. 들뜬 마음을 부여잡고 자리에 일어선 순간. 뒤에 앉아있던 동명이인의 친구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허탈함보다 무안히 일어선 제 모양새가 부끄러워 그만 주저앉았다. 이후 의기소침해진 필자는 선뜻 손을 들지 못했고, 결국 반에서 꼴찌를 기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스럽지 않은 해프닝 같지만, 그 사건은 오래도록 필자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트라우마(Trauma)는 의학적 용어로는 외상(外傷)을 뜻하지만, 심리학에서는 정신적 외상, 즉 정신적으로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격렬한 감정적 충격, 스트레스 등을 의미한다. 어떤 환경에서 발생한 정신적 충격이 장기적으로 기억되어 그 당시의 환경과 비슷한 상황이 되었을 때 심리적 불안감과 공포를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필자가 겪은 트라우마는 학교생활 내내 따라다녔다. 어린 마음에도 약점을 들키고 싶지 않은 자존심만 오롯이 남았다. 티 내지 않으려 애쓴 혼자만의 싸움은 아직까지도 완전히 벗어났다고 자신할 수 없다. 다만 살아온 세월만큼 그보다 더한 상처와 아픔 속에서 무뎌져가고 있을 뿐이다.

세상은 수없이 많은 사건과 사고 속에서 우리를 홍수처럼 넘쳐나는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한다. 위기감과 두려움은 당면한 인간의 과제이며, 우리는 그 영향력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지 않은가.

성인이 된 후 필자는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섰다고 자부했을 때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처를 겪었다. 그 후유증으로 한동안 우울증, 의욕상실, 분노 등의 감정적 패닉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시간이 약이라던가. 어느새 회복된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

한 사람의 인생에만도 수십 번의 상처와 트라우마는 반복된다. 태풍처럼 할퀴고 간 상처는 회복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부러진 나뭇가지에서 다시 새순이 자라고 열매를 맺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태풍과 같은 역경은 또다시 나를 흔들어놓을 것이다. 비바람에 맞설 준비가 얼마나 되어있는가. 넋 놓고 또 당할 것인가. 지나간 상처는 망각의 강 저편으로 흘려보내면 그만이다. 더 이상 위기가 없기를 바라겠지만, 인간사에 위기는 필요악(必要惡)이다. 태풍이 지나고 난 후의 하늘은 이전보다 더욱 청명할 터. 절망의 늪에서 부정적 사고에 지배당할 것인가, 위기와 아픔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할 것인가는 개인의 선택이다.

참고문헌 1. 김왕배. (2014). ‘트라우마의 치유과정에 대한 사회학적 탐색과 전망. 보건과 사회과학, 37(1), 5-24.

2. 이홍석, 이흥표, 권기준, 최윤경, & 이재호. (2015). 무엇이 트라우마인가? 진화심리학적 측면에서 본 트라우마의 이해와 분류. 한국심리학회지: 일반, 34(2), 565-598.

유은경 사회과학 박사과정 중
유은경 사회과학 박사과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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