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지난 18일 36년 교직을 떠나는 서령고 한철웅 교사
상태바
【인터뷰】 지난 18일 36년 교직을 떠나는 서령고 한철웅 교사
  • 최미향 기자
  • 승인 2020.08.23 12: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 청춘을 묻은 서령고, 여전히 그곳을 보면 그리움이 먼저 보인다

“제자·교직원들과 바쁘단 핑계로 진솔한 얘기 나누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서령고등학교 한철웅 교사
서령고등학교 한철웅 교사

프롤로그

카페에 흐르던 음악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 사이로 커피향이 이른 아침의 조용한 공기를 가르며 배달되었고, 세로로 길게 이어진 통로 화초들이 여름 아침 폐 속의 더운 공기를 피톤치드로 밀어냈다.

탁탁탁, 구두 굽 소리에 안쪽 창가에 앉은 중년이 기자를 건너다보았고, 기자는 직감적으로 그가 오늘의 주인공 서령고등학교 수학 담당 한철웅 교사였음을 알았다.

이른 아침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만난 한 교사에게 기자는 대뜸 퇴직 후가 더 바쁘지 않냐고 물었고, 그는 커피를 기다리며 조그만 웃음 뒤로 그럴 때도 있지만, 보통은 서산시지속가능발전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거창한 서두를 꺼냈다.

짧은 대화였지만 이미 한 교사는 자신이 장기간 머문 곳을 떠나 제2의 삶은 타인을 위한 것으로 첫발을 내디뎠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교단에 몸담은 지는 몇 년이 되었으며, 학교를 떠나면서 감회가 남달랐을텐데?

36년 교직 생활을 끝으로 지난 18일 교정을 떠나왔다. 생각하니 짐을 꾸리는 내내 시원함과 동시에 무언가 모르는 섭섭함이 엄습했다. 그런 마음이 든다는 것 자체가 미련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럴 일은 죽었다 깨나도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잠시만의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그때는 정말 의미있는 추억들을 좀 더 많이 쌓을 것 같다.

학생들과 교과 이외 도움이 될만한 일들을 많이 남겨 주지 못해 아쉽기도, 미안하기도 하고 특히 교직원들과 서로 바쁘단 핑계로 소주 한잔하면서 진솔한 얘기들을 많이 나누지 못해 아쉽고. 정말 소통의 부재 없이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는데 그게 잘 되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학교를 떠나오기 한 달 전부터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하느라 학교 안을 몇 바퀴씩 빙빙 돌며 걸었다. 내 청춘을 묻은 곳이기에 자주 뒤를 돌아보며 갈 길을 멈췄다. 아직도 여러 날은 내가 머물렀던 곳으로 눈길을 보낼 것 같다. 어쩌면 습관적으로 그쪽을 향해 걸을지도 모르겠다.

서령고 1학년 8반 제자들과 함께
서령고 1학년 8반 제자들과 함께

교사가 된 계기가 듣고 싶다. 혹시 꿈이 교사였나?

이 이야기를 하려면 아버지 얘기를 빠뜨릴 수가 없다. 우리 할아버지는 면 단위 기초의원이셨다. 의원직을 하면서 빚을 많이 지셨고, 어느날 빚만 잔뜩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셨다. 당시 아버지는 대학교에 다니고 있던 무렵이었다는데, 그로인해 당신은 학업을 중단하고 고북면 정자리 고향으로 내려와 군청 공무원으로 일하게 됐다는 말을 들었다.

옛날 공무직은 워낙 박봉이라 당신에게 남겨진 빚을 갚아나가기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결국 아버지는 사표를 내고 농사를 짓게 됐다. 밤을 낮 삼아 죽으라고 일한 대가로 차츰차츰 가세가 기울어졌던 우리 집은 조금씩 제자리를 잡아나갔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인가 어느날 부모님이 학교 갔다 돌아온 나를 불러 앉혔다. “공부는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게 아니다. 니가 알아서 해라. 단 맏이인 니가 바로 서야 동생들도 (맏이)보면서 자란다. 우리는 철웅이가 선생님이 되었으면 좋겠다. 너는 누가 봐도 선생감이다며 이모가 있는 대전으로 가서 고등학교에 입학하기를 바라셨다.

이것이 바로 내가 서대전고등학교에 다니게 된 계기가 됐고, 그리고 당시 분위기처럼 나 또한 부모님 말씀은 곧 법이란 생각으로 당연히 교사가 되는가 보다생각하고 공부를 했다.

대전에서 학교에 다녔으면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도 해본 적 없었겠다. 학창시절 어떤 학생이었다고 생각하나?

반듯한 학생이었지만 때로는 장난꾸러기였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한편으론 맹랑한 학생이기도 했다. 부모님과 떨어져 처음 하숙 생활을 하는데 얼마 동안은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주말마다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부모님 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일요일이면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돌려 대전으로 향했고....

그러던 시간이 어느 정도 이어지자 서서히 나는 현실에 적응해 나갔고, 그때부터 도시락을 2개씩 싸서 다니며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방학이 되면 부모님이 계시는 곳으로 달려가 시골아이들을 모아놓고 나무 그늘 밑에서 공부를 가르쳤다. 아마도 교사가 되려면 실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더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쳤던 것 같다.

사실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해줘야 마땅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농사 도와주는 시간에 차라리 한 글자라도 더 열심히 공부해서 당신들이 원하는 선생이 되는 게 효도하는 지름길이란 생각을 했다. 또 다른 한편으론 열심히 해서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리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고.

다시 방학이 끝나면 다시 대전으로 돌아와 대전고등학교학생들을 거울삼아 죽으라고 공부에 매진했다. 당시 대전고는 1년에 200여명씩 서울대를 보내곤 하던 시절이었는데, 학교를 떠나 내가 경쟁해야 할 상대가 바로 그들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 인생에 대전고 학생들은 이를 악물고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촉매제 역할이었던 것 같다.

중국교류단과 제주도에서
중국교류단과 제주도에서

수학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 많은 과목 중에서 유독 수학이 좋은 이유라도 있었나?

어린 시절, 수학 점수를 맞으면 선생님이 동그라미를 크게 그려주더라. 그게 너무 좋았다. 그때 어느 선생님께서 너는 커서 수학 교사가 되면 좋겠다고 말씀해 주셨다. 또 수학을 하다 보면 답이 똑똑 떨어지는 것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사고력, 판단력, 논리력, 추리력 등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길러지는 신기한 이점 또한 발견했다. 이보다 더 흥분되는 이유가 또 있나.

고교 시절에는 교장 선생님이 많은 학생 사이에서도 유독 서산 출신 학생이라 그런지 너 서산에서 왔지?”라며 관심을 가져주셨다. 그리고 선행상 같은 건데 학교장 추천으로 대전 시내에서 큰 상을 받기도 했다.

아마도 그 이면에는 소극적인 성격임에도 타지에서 온 녀석이 부단히 노력하는구나!’라는 모습을 보았던 것 같다. 일례로 음악 시간에 누가 노래 부를 사람?”하면 그렇게 내성적인 성격임에도 저요라고 몇 번 손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 후부터는 내가 손을 들지 않더라도 노래 부를 사람하면 자동으로 한철웅 한철웅!!”이라며 친구들이 구호를 불렀고, 나는 그때마다 산타루치아를 과감히 불러 젖혔다. 가만 보면 음치스럽지는 않았던 것 같다(웃음).

학교로 처음 발령받았을 때의 마음가짐은 어땠나?

두말할 것도 없다. 무조건 열심히 해야겠단 생각밖에 없었다. 서령중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다. 새내기 교사로 설레는 마음을 안고 교문을 들어섰을 당시 기쁘면서도 너무 떨렸다. 아이들 하나하나 눈 마주치는 것도 당시로써는 낯설어서 서먹하고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때는 서령중학교 건물이 많이 낡아 있었던 때였다. 심지어 바람이 불면 바람에 지붕위의 기왓장, 유리청소할 때 창틀이 떨어지곤 했다. 교장 선생님이 부임 첫날 화단 앞으로 나를 불렀다. 서둘러 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때도 화단 위에 기와가 떨어져 발밑에 나뒹굴어 있었다. ‘, 내가 맡을 업무는 바로 청소지도구나!’를 생각했는데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 이왕 맡았으면 불평불만 없이 적극적으로 임하자고 생각하며 군인 정신을 떠올렸다.

정말 나는 다음날부터 마음을 쏟기 시작했다. 일찍 출근하여 적극적으로 임하니 직원들이 인정을 해줬고, 교사가 적극적으로 임하니 학생들도 하나둘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학교든 아니든, 맡은 바 임무가 그 무엇이든 간에 충실히만 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정받는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도 다시 한번 인지하게 되었다.

36년 근무를 마치고 퇴임인사를 하며사진5:
36년 근무를 마치고 퇴임인사를 하며사진5:

담임을 맡으면서 아쉬운 부분이나 기억나는 학생이 있다면?

고등학교 담임을 할 때였다. 부임하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부터인가 한 학생이 등교하지 않았다. 가정방문을 몇 번이나 했는데 집에도 없었다. 정말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부모님도 모른다고 했다. 답답한 마음에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여제나 저제나 학생을 기다렸다.

입이 바싹바싹 마르기를 여러 날이 흘렀지만 아이의 소식은 없었고, 결국 아이는 학교에 나오지 않은 관계로 등교 정지가 내려졌다.

훗날 학생의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취직을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안도는 했지만, 교사로서 배움을 마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또 하나, 가슴에 맺힌 학생은 태도를 바로 잡아주기 위해 학생의 이름을 불러준 사건이었다. 약간 산만한 학생이었던 그 아이는 내게 서운함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나중에사 풍문으로 들었다. 이름 불러주는 것이 자기를 미워하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나는 태도를 개선해주고 싶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학생과 풀지 못한 것이 마음 아프다. 지금쯤 서른 중반이 되었으려나. 다음에 만나면 소주 한잔 앞에 두고 아니었다고, 그런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고, 만약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했다고 말하고 싶다.

많은 아이를 만났다. 물론 기억나는 아이들은 참 많다. 이 아이들이 세상의 중심에서 서령인으로 바르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선생님들의 동료애를 표현한 액자
선생님들의 동료애를 표현한 액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후회되는 점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나?

맞벌이 부부다 보니 육아에 어려움이 있어 슬하에 아들 하나만 두었다. 금이야 옥이야 할만한데도 교사라는 이름으로 정작 내 아이에게는 소홀히 했던 게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우리 아들은 외할머니 손에 크다시피 했다. 아침이면 전쟁통도 그런 전쟁이 없다. 출근하면서 장모님 집에 태워다주고 퇴근하면서 태워오고.

아들이 유치원 다닐 때도 정작 재롱잔치나 부모님이 함께 가야 하는 날에도 함께 가지 못하고 나는 수업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충분히 변통하면서 갈 수 있었을텐데 우리 집사람도 나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중에 사진을 보면 다른 집 부모들은 대부분 참여를 했던데…….

너무 했다는 생각에 지금도 가슴이 많이 아프다. 그런데도 우리 아들이 속 한번 썩이지 않고 잘 커 준 게 얼마나 기특한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 참 아찔했던 순간도 몇 번 있었다. 아파트 건너 가게에 뭘 사러 갔는데 제 딴에는 아빠 따라간다고 차도를 뛰어왔던 모양이다. 한쪽에서 갑자기 승합차가 달려오더니 갑자기 내 눈앞에서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사고가 난 줄 알고 무턱대고 뛰어갔다. 그런데 아이가 벌떡 일어나 엉엉 울더라.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경기가 일어날 정도로 무섭다.

또 한번은 바닷가 얕은 곳에서 튜브에 몸을 끼워 물놀이를 하고 있던 아이에게 갑자기 파도가 덮쳤다. 구사일생으로 우리 아이가 살았다.

어쩌면 내 아들이 천운을 타고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건강한 모습으로 사회복지사 일을 하고 있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전해달라

지금 우리 사회는 개인주의 경향이 팽배하다. 이런 현상은 우리 교육도 마찬가지다. 봉사활동 하나를 보더라도 선의의 봉사활동이 드물다. 뭐 좀 하라고 하면 나름 거래를 한다. 시간 인정해주고 생활기록부에 써 주고 해야만 움직인다. 그렇게 순수했던 아이들의 모습이 이제는 찾아보기가 드물다.

이런 현상을 깊게 생각하며 바라봐야 할 것이다. 물론 봉사에 대한 계기 마련 측면에서는 좋을 수도 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진정성이 결여됐다.

부디 미래를 짊어질 우리 아이들이 더는 마음 다치지 않고 순수함을 간직할 수 있도록 교육계가 깊이 있는 고민을 해줬으면 좋겠다.

에필로그

학생들이 교사를 인정해줄 때 가장 보람있고, 졸업한 제자들이 학교를 찾아올 때가 가장 행복했다는 한철웅 교사. 그에게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계획이냐고 묻자 아들이 사회복지사다. 다른 분들은 퇴직하면 여행을 한다는데 나는 지금부터라도 아들 곁에서 그동안 챙겨주지 못한 여러 가지 일들을 함께 하고 싶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