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 제작실장이 곱창을 손질하고 순대를 삶기까지의 짧은 인생 긴 얘기

“아무리 아름다운 백조도 물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발길질을 한다는 걸 알았다”

서산시 호수공원 장터순대국 고지연 대표
서산시 호수공원 장터순대국 고지연 대표

프롤로그

작가 강미영은 글을 통해 숨통트기의 비법을 아주 간단히 말해주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다른 버스를 타고 완전히 다른 길을 달릴 수 있다. 어디로 갈지 선택권이 나에게 있음을 깜빡했다. 스스로 닫힌 세상으로 계속해서 들어서면서 빠져나갈 수 없다고, 답답하다고 외쳤다. 그저 문을 열고 나오면 되는데 말이다라고 숨통트기의 비법을 알려주었다.

서산시대가 만난 서산시 장터순대국 고지연 대표는 충무로에서 무전기를 들고 영화 건축한 개론’ ‘전국노래자랑’ ‘1987’ 등을 제작했지만, 어느날 갑자기 10년 동안 몸담았던 영화판에서 과감히 문을 열고 무전기 대신 냄새나는 곱창으로 숨통트기에 성공했다.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꽤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나는 좀 더 멋진 일을 하고 싶어서 박수칠 때 떠나왔던 것뿐이다. 미련도 후회도 없다. 다만 영화판은 내게 추억이며 아련함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보시다시피 나는 지금 펄펄 끓는 순대국밥이 더 매력적이다라고 말하며 특유의 귀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젊은 나이에 국밥집을 운영하는 것도 놀랍지만, 유명한 영화인 ‘1987’의 제작 실장을 맡았다는 것도 정말 놀랍다. 전공이 영화 쪽이었나?

그렇다. 초등학교 때부터 영화감독이 꿈이었다. 마침 아버지가 덕산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그곳에 한서대 영화연출학과 조교님이 아르바이트하러 오셨다. 난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주말마다 아버지 가게에서 일하고 있던 터라 쉽게 한서대 영화계통 학과에 대해 알게 됐고, 소원대로 그쪽 과에 입학했다.

공부하면서 나는 서울 충무로로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고, 반대로 아버지는 내 뜻과는 정반대로 13녀 중 맏이인 내가 시골 삽교에서 작은 사진관을 운영하길 바랐다.

어느날 대학 선배님이 ·태안으로 빅뱅 뮤직비디오를 찍으러 내려가는데 아르바이트 좀 할래?”라는 제안을 받았고, 나는 당시 빅뱅 멤버 씨야와 탑을 좋아하는 왕팬으로서 비용도 받지 않고 현장에서 이리뛰고 저리뛰며 재미있게 일을 했다. 특히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두 사람에게 옆에서 음료수와 의자를 챙겨주는 일이란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신나고 행복했다.

말 한마디 건네보진 못했지만 내가 주는 것을 마셔주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얻은 듯했다. 그리고 나는 빨리 현장에 투입되어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바람은 현실이 되어 졸업 전 어느 봄날, 드디어 충무로 영화제작사에 취업하게 됐다.

 
충무로에서 무전기를 들고 있을 즈음
충무로에서 무전기를 들고 있을 즈음

Q 얘기를 들어보면 대표님이 일했던 그 당시 충무로 영화 제작 현장은 굉장히 열악하다고 들었다. 혹시 여자라서 더 힘들고 그러지는 않았나?

지금과 다르게 여자라서 안된다, 여자니까 하지마라등 정말 성별에 대한 차별이 아주 심할 때였다. 그때는 현장에서 담배를 피우며 조감독들 빨래까지 시키는 때였으니까 오죽했겠나.

부푼 꿈을 안고 시골에서 올라간 나는 그 모든 것을 꿋꿋이 견뎌냈다. “여자니까 너는 안에서 영수증 정리나 해라고 시키면 밤새 (영수증)정리를 하고 겨우 새우잠을 자며 아침 일찍 일어나 현장 진행까지 해냈다.

여자니까 운전 못 하지?”라고 하면 할 줄 안다며 스타렉스를 몰았고, 여자니까 무거운 걸 들지 말라고 하면 할 수 있다. 남녀 차별하냐며 말통 두 개씩을 끄떡끄떡 들고 다녔다. 너는 그것만 해라고 하면 속으로 나는 시키면 저 사람보다 더 잘 할 수 있는데.’라며 서운해 돌아서며 이를 악물기도 여러번.

책정된 월급보다 터무니없는 금액인 50만 원 인건비로 하루하루 현장을 누빈 적도 있었고, 회계를 보던 중 5백만 원이 빌 때는 니가 메꿔라라는 말에 이리저리 긁어모아 채워 넣은 적도 있었다.

정말 그때만 해도 어린 마음에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무진 애를 썼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근무하면서 총 쉬었던 날이 겨우 30일 정도나 될까? 돈 뜯기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억울한 일은 마음에 두고두고 상처가 되어 나를 힘들게도 했다.

그럼에도 참고 참았던 것은 나도 할 수 있다. 나도 될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제작부장·실장까지 하면서 무전기를 들고 진두지휘를 하게 된 일들.

가만히 생각하면 그렇게 힘들었던 당시의 일들이 왜 그곳을 떠난 지금에서야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을까. 이런 걸 보면 아무리 어렵고 힘들었을지라도 추억이란 단어는 늘 아름다운 것 같단 생각이 든다.

 
고지연 씨가 맡은 첫작품 '하늘과 바다'
고지연 씨가 맡은 첫작품 '하늘과 바다'

Q 작품 얘기를 해달라. 대부분 첫 작품은 힘들 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미련이 남는다고 하던데?

나라고 별수 있나. 대부분 물어보면 첫 작품은 다들 힘들다고 하더라.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24살에 첫 작품 하늘과 바다’(2009) 제작팀으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영화 마음이를 만드신 오달균 감독 작품인데 장나라 씨가 하늘역을 맡았고, 현쥬니 씨가 바다역을, 그리고 지금은 유명한 유아인·최정우·연재 씨가 조연을 맡았다. 마음이 정화되는 듯한 작품이었는데 현장에서의 나는 힘들기 그지없었다.

그때 알았다. 아무리 아름다운 백조도 물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발길질을 한다는 것을. 그래도 당시 제작부장님을 잘 만난 덕분에 하루도 쉬지 않고 연이어 3편의 작품을 운 좋게 제작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자생력이 생겨 다른 작품들은 혼자서도 척척 해낼 정도가 됐다.

사실 그 판도 나름 좁다. 어떤 작품에 누가 일을 잘한다더라 하면 금방 소문이 퍼져서 일이 끝나기도 전에 작품같이 하자며 의사 타진을 해 온다.

덕분에 건축학개론’(2012), ‘전국노래자랑’(2012) 외 다수의 작품 제작팀으로 일을 했고, ‘레드카펫’(2013), ‘황제를 위하여’(2014)에서는 제작부장으로, 그 후 정지우 감독님의 침묵에서는 슈퍼바이저로, 장준환 감독님의 ‘1987’(2017)에서는 제작실장으로 현장을 누볐다.

 
씨네21 ‘스페셜’ 영화계 내 성폭력 열 번째 대담 프로에 출연할 당시
씨네21 ‘스페셜’ 영화계 내 성폭력 열 번째 대담 프로에 출연할 당시

Q 현장에 있다 보면 상당히 많은 분을 만나게 되는데 혹시 기억나는 배우는 없나?

평소 강동원 씨를 너무 좋아했다. 어느날 영화 ‘1987’에서 특별출연으로 강동원이 나오게 됐는데 마침 그날이 감정씬이었나 아무튼 중요한 장면이라 촬영 끝나고 식당으로 이동하여 밥을 먹게 됐다.

마침 내가 앉은 바로 맞은편 왼쪽에 강동원 씨가 앉아 밥을 먹고 있었는데 너무 두근거리고 부끄럽고 어색해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음식만 먹고 있었다. 휴~~

그런데 갑자기 그분이 실장님 이것도 드세요라며 자기 앞의 갈비찜을 내게 주는 게 아닌가. 너무 놀라 먹긴 먹었지만,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웃음).

 
영화 '1987'을 끝으로 서산으로 내려온 고지연 씨
영화 '1987'을 끝으로 서산으로 내려온 고지연 씨

Q ‘1987’ 영화는 상당히 대작이던데 그래봐야 불과 3년 전 작품이다. 충무로 현장에서 직접 무전기를 들고 진두지휘하던 분이 어떻게 서산으로 내려와 식당을 할 생각을 했나?

인간관계로 인해 약간 숨이 막힐 즈음, 숨통트기를 하기 위해 주변 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접고 서산으로 내려왔다. 당시 아버지가 식당을 하시면서 동시에 부산물 취급을 하던 중이었다. 좋은 재료를 받아 장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어릴 적 부모님이 식당을 하셨기 때문에 접근성은 상당히 좋았다.

말이 나온 김에 ‘1987’에 관한 얘기를 좀 하자면, 사실 그동안 나는 영화 현장에서 사람을 따라다니며 작품을 만났다. 대부분 사람은 누구 나오는 무슨 영화냐?”라고 묻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에 어느 날 동료가 지연아, 이제 작품을 보며 경력을 쌓아라라고 말해주더라. 그때 ‘1987’을 소개해 줬다. 출연진도 화려했지만, 시나리오도 상당히 의미 있어 처음으로 대개 설레며 일을 했다.

사이즈가 크다 보니 PD님과 분업하면서 제작실장으로 스태프진 구성과 현장 진행도 함께 했고, 1회차에서 마지막 회차까지 항상 장준환 감독님을 모시고 다니며 연출과 여러 가지 상황 대처법에 관해서도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참고로, 당시 감독님의 배우자가 배우 문소리 씨였는데 가까이서 뵈면서 ~ 결혼하면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상의 지혜도 덤으로 배울 좋은 기회가 됐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다. 10년 만에 대작 ‘1987’을 끝으로 무전기를 내려놓고 곱창장사를 하기 위해 서산으로 내려왔다. 당시도 그랬지만 지금도 동료들이 다시 충무로로 올라오라고 유혹한다. “너 다시 해볼 생각 없냐? 가게 안정됐으면 지금이라도 맡기고 한 작품이라도 해봐라

솔직히 미련은 없다. 대신 생각하면 아련하다. 이제 나는 그들의 대나무숲이 되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웃음). “어제는 말이야...”라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는데 참 재밌기도 하다. 대나무숲이 되어 속풀이를 해오는 그들의 말을 경청하는 재미도 솔잖이 재밌다.

 
순대를 직접 끓이는 모습
순대를 직접 끓이는 모습

Q 영화판을 주름잡던 사람이 요식업계에 뛰어들다니. 그것도 33살 어린 나이에 절대 만만치 않은 곱창장사와 순대국밥 집을 오픈하게 됐는데 걱정은 되지 않았나?

물론 걱정은 됐지만, 생각보다는 수월했다. 나는 용감하게도 운이 7할이고 노력이 3할이라는 운칠기삼이란 말을 좀 믿는 편이다. 평소 곱창을 상당히 좋아하는 1인이다. 육가공 부산물을 취급하고 계시는 아버지가 계셔서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줄 거라는 확신이 생겨 시작하게 됐다.

처음 시작한 것이 곱나와라곱창인데 그 이름과 메뉴, 소스 등 모두 내가 직접 했다. 특히 곱창 손질은 아버지에게 배웠다. 참 어느날 열심히 곱창을 손질하고 있을 때였는데 아버지가 나를 건너다보시곤 지연아 똥냄새 나지 않아?”라고 하셨다. “괜찮아요. 돈 냄새인걸요라고 말하는데 그 말을 하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파안대소를 했던 기억이 있다.

운도 잘 따르는 편이다. 오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TV ‘나 혼자 산다의 마마무 멤버 화사가 소곱창을 맛있게 먹는 신이 나왔다. 그때부터 손님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때 단골로 왔던 사람 중의 한 명이 지금의 남편이 됐다(웃음).

그러다 아버지가 허리를 다치셨다. 더는 부산물을 취급하지 못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업종을 바꾸게 됐다. 애착이 많이 간 곱창집이라 마음이 좀 그랬다. 그럼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을 만나려고 곱창집을 했나 보다싶으니까 감사하기도 했고, 아무튼 여러 가지 심정이었다.

그리고 다시 장터순대국으로 메뉴를 바꿨다. 곱창은 단가가 높은 편이라 대중적이지 못한 관계로 주로 주 고객이 40대 이후 손님이셨다면, 이제는 누구나 쉽게 오실 수 있도록 순대국밥집으로 바꿨다. 다양한 연령층을 겨냥한 것이다.

올해 유난히 더울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우리 메뉴가 뜨거운 국물이다 보니 한여름에는 손님이 없을 거로 생각하고 올여름은 마음을 비우고 장사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긴 장마로 인해 의외로 손님들이 뜨거운 국물을 많이 찾게 되었다. 가만히 보면 내게만은 운이 7할이 아니라 대충 9할은 되는 것 같다(웃음).

 
곱창집 단골 손님에서 부부로 인연을 맺은 두사람
곱창집 단골 손님에서 부부로 인연을 맺은 두사람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작년 12월에 결혼했다. 당시 충무로에서 일하던 분들이 정말 많이 오셔서 축하해 주셨다. 식당을 오픈할 때도 나를 아는 동료들이 고지연은 뭘 해도 잘할 것 같다. 그런 게 있다. 너에게는. 다시 현장으로 복귀해도 잘할 것이고, 식당일이든 뭐든 다 잘할 것 같다라고 덕담해줬다.

지금도 서·태안으로 촬영 올 때는 스태프진 모두가 들러 얼굴 보며 밥도 먹고 수다도 떨고 한다. 정말 감사할 뿐이다. 이분들에게 실망시키지 않도록 앞으로도 여전히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것이다.

! 꼭 이 말은 전하며 인터뷰를 마치고 싶다. 수해로 힘들어하는 분들이 많은 와중에 다시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부디 힘내시고 건강 잘 지키시길 기원한다.

 

에필로그

고지연 장터순대국밥집 대표는 문득 무전기를 너무 잡고 싶을 때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번 어느 날에는 마침 동료와 전화하면서 지나가는 말로 무전기 잡고 싶다라고 말하자 ~ 언니 선물로 무전기 사드릴 테니 이모님들이랑 무전기 차고 가게에서 일하라고 해서 인터뷰를 하다말고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기자가 웃음을 머금고 정말 (충무로)가고 싶을 때가 없냐고 묻자 고지연 대표는 나는 지금의 내 자리가 좋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는 일은 그쪽이나 이쪽이나 매한가지다. 나는 앞으로도 지금의 자리에서 모든 날 모든 순간을 게으름 피우지 않고 충실하게 살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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