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경의 재미있는 이슈메이커-⑯

사진출처 네이버
사진출처 네이버

19817월 어느 여름날. 전날까지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장맛비를 쏟아 붓더니 그날따라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다. 살을 에는 듯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이 무정하다. 만삭의 몸으로 지쳐 잠들기를 수회. 지금이야 어디든 있는 에어컨이지만, 그 시절엔 그랬던가. 오롯이 온몸으로 더위를 이겨내야 함이 어찌 한 사람뿐이랴. 그저 뱃속의 아이까지 두 사람 몫을 견뎌내야 함이 힘겨울 따름이다. 내리 스무 시간을 옥죄이는 진통 속에서 시간의 흐름이 여느 날보다 무겁고 더딜 뿐이다.

스물네 살 꽃다운 나이. 아이를 가졌다는 감동도, 첫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두려움도 냉혹한 현실 속에서는 그저 부질없다.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를 일궈내기까지 이 악물고 치열했기에 감정적 번뇌는 사치일 뿐이다. 꿋꿋이 버텨낸 인고의 스무 시간이 지나고 나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산후풍(産後風)’이라고 들어보았는가? 출산 후 찬바람을 쐬면 뼈에 바람이 들어간다는 풍문이다. 지금은 여름에 출산하더라도 25~27도 정도의 쾌적한 공간에서 산후조리를 하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딸의 첫 출산을 돌보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오신 할머니는 한여름임에도 연탄불을 피우셨다. 혹여나 뼛속에 바람들어갈까 이불까지 꽁꽁 싸매고 덩달아 나까지 한 방에서 더위와 싸워야 했다.

필자의 모친은 7월 이맘때가 되면 아직도 그날의 기억을 또렷이 회상하신다. 하필이면 가장 더운 날 아이를 낳아야 했던 엄마도, 세상에 빛을 보자마자 땀띠와 씨름해야 했던 필자도 한여름 더위에 적응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세상에 나오는 순간부터 인간의 삶은 적응의 연속이다. 부모 곁에서 모든 사랑을 한 몸에 받다가 동생이 태어나는 순간 상실감을 이겨내야 한다. 당연히 내 것이었던 것들을 포기하고 첫째로서의 삶을 받아들인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고 본격적인 경쟁의 삶이 시작된다.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숙제도 열심히 해가지만 나는 그저 유다를 것 없는 학생일 뿐이었다. 그저 그런 평범한 삶에 적응되어갈 즈음 중학생이 되고 또 고등학생이 된다. 설레는 시작과 아쉬운 끝을 뒤로하고 또다시 새로운 환경과 사람에 익숙해져야 한다.

청소년 시기에 형성되는 적응력은 신체적, 심리적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 또한 타인과의 사회적 상호 작용을 경험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한 포용력과 이타적 행동을 형성하게 된다. 가장 큰 변화로 신체적 성장이 급속히 발달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불균형적 어색함으로 인한 부적응이 나타나기도 한다.

일련의 성장통을 이겨내며 무사히 학교생활을 마친다고 끝이 아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창한 명목의 시대는 개인의 적응 능력을 수시로 요구한다. 환경의 변화는 미처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지나친 경쟁과 장래에 대한 불안감은 현실도피라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도태되지 않기 위한 노력은 치열했고, 사회생활은 험난했다.

설렘보다 두려움이 앞섰던 첫 직장 생활. 필자가 처음 근무를 시작한 곳은 여자 화장실이 따로 없었다. 남자들만 생활하던 곳에 아무런 준비 없이 내던져졌다. 숙맥처럼 아무 말도 못 하던 스무 살 언저리의 어수룩함 때문인지 부끄러웠다. 하루 중 화장실 가는 것이 가장 큰 고역이었다. 결국 화장실 가는 것을 포기했다. 얼추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종내 필자의 몸에서 이상 신호를 보내왔다. 신장에 통증이 왔고 혈뇨 진단을 받았다. 나는 내 건강을 위해 뻔뻔해지기로 결심했다. 다음날부터 아무렇지 않은 척 화장실을 사용했다. 어색한 시기를 이겨내니 그 생활도 제법 적응되었다. 적응력 레벨의 한 단계 상승을 자축하며 견뎌내지 못할 일도 없을 것 같은 묘한 자신감에 실없이 흐뭇해졌다.

우연히 작은 화분 하나를 얻었다. 엉겁결에 받은 산세베리아는 기대 이상으로 잘 자랐다. 훌쩍 자란 화초는 더 이상 작은 화분이 맞지 않았다. 큰 화분으로 옮겨 심어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처음 해보는 화분 갈이에 그동안 정든 화초가 적응하지 못할까 걱정이 앞섰다. 십여 일이 지나고 어느새 새 화분에 적응한 화초는 이전보다 화려한 잎을 뽐내며 더욱 크게 자라났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나 그러하다. 그럼에도 이겨내지 못할 것은 없다. 하물며 작은 미물조차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까지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고 성장하지 않는가.

참고문헌 1. 장휘숙. (2002). 청년후기의 부모에 대한 애착, 분리-개별화 및 심리사회적 적응. 한국심리학회지: 산업 및 조직, 15(1), 101-121.

2. 임혜림, 김서현, & 정익중. (2014). 긍정적 부모양육태도가 청소년의 심리사회적 적응에 미치는 차별적 영향. 청소년복지연구, 16(4), 1-27.

유은경 사회과학 박사과정 중
유은경 사회과학 박사과정 중

 

 

저작권자 © 서산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