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을 이어갈 한복, 한송이 꽃이 되어 세상에 다시 피다

공예가가 만들어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한복, 서산에 우뚝 솟다

【인터뷰】 전통을 잇는 ‘어린 신부 & 조선 옷방’ 명승란 대표
【인터뷰】 전통을 잇는 ‘어린 신부 & 조선 옷방’ 명승란 대표

프롤로그

습한 공기가 하늘을 덮었고, 그날은 유난히 헤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오후였다. 20년 전부터 신부메이크업을 했고, 15년 전에는 웨딩숍을 추가했으며, 8년 전에는 한복을 다시 추가한 어린 신부 & 조선 옷방 명승란 대표를 만났다.

공예를 전공한 명 대표는 요즘 한복이나 연주복, 웨딩드레스 등에 달 부속품을 직접 제작하는가 하면 디자인과 제작에까지 뛰어들어 자신의 진가를 충분히 발휘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한복이 잊히지 않고 대대손손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므로 이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특별한 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선물을 줄 수 있도록 오늘도 꼼지락꼼지락 손품을 파는 그녀 명승란 대표.

업체들이 부속품을 사가겠다는데 굳이 팔지 않는 이유가 뭐냐?”고 기자가 물었더니 내가 만든 작품은 자식이다. 간절한 마음을 담았기에 소중한 날 우리 집을 찾는 분들에게 귀한 발걸음을 환하게 밝혀주기 위한 어떤 징표기도 하고...”라며 말을 아꼈다.

메이크업을 하고 있는 명승란 대표
메이크업을 하고 있는 명승란 대표

소문만 들었는데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타고난 재주가 있는 것 같은데?

어릴 때부터 그리기를 좋아했다. 워낙 얌전했던 성격이라 소리소문없이 한자리에 앉아서 꼼지락꼼지락 그렇게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리다 보면 내가 그림 속 공주님도 되었다가, 왕자가 되어 보기도 했고, 때로는 작은 풀꽃 하나도 됐다. 14녀 중 둘째들의 사회성은 뛰어나다고 했는데 나는 활발한 성격과는 조금 벗어나 있었다.

대학을 딱히 가야겠단 생각도 들지 않아 고등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사회생활을 했다. 그러다 어느날 친한 친구가 대학을 다니는 것을 보고 2년 동안 착실히 모은 돈으로 대학을 갔다. 그것도 공예를 전공했으니 지금 일과 얼마나 적절한 매칭인가.

솔직히 내 자랑 같지만 학원 한번 다니지 않고 실기시험을 치렀고, 나는 무사히 합격의 영광을 안고 서울 생활을 했다. 이런 거 보면 실력이 전혀 없진 않았던 것 같다(웃음).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 초청 전시회를 하기도 했고, 남해 이순신순국공원에 대형 도자기벽화를 세운 한얼도예 이호영 명인밑에서 2년 동안 도자기 일을 했다. 그럭저럭 순탄한 시간을 보냈다.

도예를 도중에 접은 것 같은데 어떤 피치 못할 이유라도 있었나?

얌전했던 내가 유독 들떠서 움직였던 것이 바로 여행이었는데, 도예를 접은 원인도 모두 내 속에 잠자고 있던 여행이란 놈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여행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어느새 짐을 꾸려서 이미 발길을 길 위에 올려놓을 만큼 즐겼다.

경기도 이천 도예 공방에서 일하다 어느날 문득 만난 제주도가 너무 이뻐서 그만 눌러앉아 버렸다.

그곳에서 휘어지는 바람 소리를 가만히 앉아 듣기를 좋아했고, 책을 읽으며 제주의 푸른 바다를 간간이 바라보는 것도 좋았고, 무엇보다 제주도의 느낌을 정말 가슴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먹고 살아야 했기에 횟집에서 일하며 여행자금을 마련했다. 그 돈으로 다음 여행지를 만나고, 다시 짜릿하고 행복한 여행을 계획. 그렇게 몇 달씩 일하고 그 돈으로 친구와 혹은 혼자 다음 또 그다음 여행지를 물색했던 겁 없는, 하지만 사랑스러운 나의 찬란한 20.

카메라도 없이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그리고 히치를 하고 다녔다. 자연이 주는 메시지인 바람과 햇살과 물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가끔은 바람처럼 찾아오는 여행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내가 서 있는 존재의 이유였다.

팜플렛 제작사진 촬영
팜플렛 제작사진 촬영

어린 신부 & 조선 옷방을 운영하게 된 계기는 뭔가?

결혼을 하고 10년 동안 떠나있었던 내 고향 서산으로 내려왔는데 막상 오고 나니 친구들이 모두 떠난 이곳은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외롭던 차, 당시 충남예식장을 차린 이모 덕분에 메이크업을 배운 노하우를 살려 곧바로 실습 없이 웨딩숍 현장에 투입되어 일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처음 하는 일이었지만 신부들이나 혼주들에게 특별한 크레임이 없었던 게 신기할 정도다. 여행만큼이나 내 속에 메이크업 아티스트라는 자리도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나한테 정말 잘 맞는 직업이라 아주 재밌게 일했다.

주말이면 다리가 퉁퉁 붓도록 샵에서 종종거리며 분주한 손놀림을 해냈다. 내 손을 거친 분들이 행복한 걸음으로 웨딩홀 카펫을 밟을 때면 괜히 내가 더 행복해서 주책없이 울컥거리기도 했다.

참 열심히 살았다. 그러던 5년 차에 웨딩숍인 조선 옷방를 인수하게 되어 새로운 날개를 달았다. 손님이 밀려들다 보니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게 됐고, 덤으로 직원들도 나날이 불어나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는 절실함에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8년 전, 한복을 추가로 메이크업, 신부 드레스, 한복을 책임지게 된 어린 신부 & 조선 옷방을 오픈하게 됐다.

한복을 유난히 좋아하는 명승란 대표와 직원
한복을 유난히 좋아하는 명승란 대표와 직원

한복에 관한 관심이 평소에도 있었나?

한복은 색감과 디자인이 상당히 매력적이어서 평소에도 관심이 아주 많았었다. 내 나이에 맞는 일이기도 했고. 그런데다 마침 가까운 친구가 평택에서 같은 업종을 하고 있던 터라 훨씬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 전국을 다니며 한복의 무한한 매력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전통한복은 대구와 부산이, 퓨전 한복은 서울이 유명해서 전국투어를 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시간은 나를 한복의 세계로 빠지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고급한복을 비치하기 시작했다. 주위에서 말렸지만 내가 봐도 (수준)낮은 건 도저히 못 하겠는데 어쩌겠나. 그것이 결국 성공의 비결이 됐다. 고객들의 반응이 생각 이상으로 상당히 좋았다.

이제는 서울 고객들이 우리 집으로 내려와 한복을 컨텍하고 올라갈 정도다. 솔직히 한복의 수준이 높은 데 비해 아무래도 서울과는 임대료나 그 밖의 지출이 현저히 낮으니 금액 또한 월등히 저렴했다.

또 하나, 아주 큰 복병이 숨어있다. 이것은 바로 내가 직접 고안해서 만들어내는 부속품에 대한 고객들의 감탄이었다.

조물조물 부속품을 만드는 것을 즐기는 명 대표
조물조물 부속품을 만드는 것을 즐기는 명 대표

한복이나 웨딩드레스에 다는 부속품을 만들게 된 동기는 뭔가?

한복을 보면서 뭔가 목마름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대도시로 나가는 고객들의 발걸음을 붙잡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색다르고 고급스럽게 만들까!’를 늘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한복에 부착할 부자재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한복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차별화를 사기 시작했고, 이런 소소한 하나하나가 특별한 날의 특별한 주인공으로 빛나게 해주었다. 꼼지락의 대가가 만들어낸 작품을 보며 신랑·신부와 혼주분들은 연신 세상에 너무 이쁘다며 감탄을 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물건을 납품하기 위해 오시는 분들도 부속품을 팔라고 했다.

이밖에도 완제품인 한복에 다시 천을 끊어다 디자인을 하기도 했는데, 감사하게도 이제는 대도시에서 매장을 운영하는 분들이 디자인을 진짜 잘 뽑았다고 하시며 이런 디자인은 내가 가져갔으면 좋겠다고 말씀 하신다. 나아가 언제부턴가 한복은 내가 직접 디자인하고 원단을 사다 잘 꿰매시는 분에게 맡긴다. 때론 제때제때 만들 수 있는 것은 원단을 가져와서 직접 만들기도 하고.

물론 모든 것은 내가 손댈 수 있는 부분만 손대는 거지 넘보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복을 제대로 배운 분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웨딩드레스를 보면 여전히 설렌다는 명승란 대표

웨딩드레스를 보면 여전히 설렌다는 명승란 대표

20년이면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드나?

나도 사람인지라 왜 그런 생각이 없었겠는가. 가끔은 손 떼고 싶은데도 오래된 단골들이 있어서 다시 무릎이 꺾이기도 한다.

솔직히 처음 웨딩업을 시작할 때는 한번 결혼해서 나가면 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웬걸. 그 사람이 또 돌잔치 한다고 오고, 다시 가족 누구 결혼한다고, 또는 부모님 칠순이라고 이렇게 저렇게 계속 이어지더라.

이런 분들의 사랑으로 여기까지 오게 됐다. 단골들이 나를 살려주는 묘약인데 이분들이 있는 한은 오래도록 이 길을 가고 싶다.

순서를 기다리며 메이크업을 받던 시절
순서를 기다리며 메이크업을 받는 모습

매장을 거쳐 간 분들을 따진다면 어느 정도 되며,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뭔가?

한자리에서 20년을 한결같이 외길을 걸었으니 도대체 몇 분을 했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아무튼 나이 어느 정도 되시는 서산분들은 대부분 나한테 받았던 것 같다. 그때는 주말마다 발 뻗고 편안하게 지낸 적이 없었으니까.

그분들이 지금은 나랑 같이 나이를 먹어 가고 한복을 대여하기 위해 우리 매장을 찾는다. 입어보고 가방을 들며 거울을 비춰보고.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살짝 미소지으며 인연을 따져보고.

이렇게 단골들과 세월의 무상함을 달래는 시간이 참 좋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세관에 걸린 일이다. 특이한 원단을 찾기 위해 코로나19 전에 해외로도 나가곤 했다. 한복을 입고 들 수 있는 화려한 가방을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맘에 드는 것은 해외에서 20개씩 건져 올 때도 있었는데 세관에 걸린 적이 있었다.

가방이 많으니 샤넬 가방인 줄 알고 다 펴보라고 했다. 물론 금액적으로 얼마 안 되는 줄 알고 다시 받아 나오기는 했지만.

고운자태를 뽑내는 한복에 부속품을 달아놓은 모습
고운자태를 뽑내는 한복에 부속품을 달아놓은 모습

마지막으로 꿈이 있다면?

오천 년 삶의 이야기를 담아온 우리 옷 한복, 그 가치를 계승하고 동시대와 호흡하는 한복문화를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나는 오늘도 아름다운 우리 옷을 연구하고 있다.

한복이라는 문화 콘텐츠가 얼마나 멋진가. 선진국일수록 자신들의 고유전통의상을 함께 발전시켜야 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쉽게도 문화적 발전보다 한복이라는 콘텐츠가 한참 먼 것 같다. 이것은 실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정부나 지자체에서도 전통한복을 제대로 만들 수 있는 분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그분들을 대우해주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한복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줄 수 있는 퓨전 한복도 발전되었으면 좋겠다. 일단 사람들이 부담 없이 입어주어야 전통도 계속 커나갈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원거리에서나마 그 몫을 하는데 작은 보탬이 되고자 한다. 우리의 전통은 천년이 되어도 이어져야 하니까.

에필로그

전통을 잇는 어린 신부 & 조선 옷방 명승란 대표. 그녀는 인터뷰 말미에 지금도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혼주분들의 예복문화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어머니들은 한복을 입는데 왜 아버지들은 양복을 입을까. 남자분들의 한복이 정말 멋스럽게 잘 나와 있는데 그날 하루만이라도 우리의 전통 옷을 입는 것은 어떨까.

앞으로 나는 우리의 옷인 한복을 대대손손 이어갈 수 있도록 먼 곳에서나마 일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서산시 서해로 3639 ‘어린 신부 & 조선 옷방’
서산시 서해로 3639 ‘어린 신부 & 조선 옷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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