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정을 쏟아부어 그 일을 성공시켰을 때의 감동, 그것은 사랑고백보다 백배는 짜릿한 일

▲ “원도심에 기업의 가치를 끌어들여 서산을 브랜딩을 할 수 있다면 정말 멋질 것”

‘청년협동조합 모두’ 정기영 대표
‘청년협동조합 모두’ 정기영 대표

사람에게 열정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사람을 살아있게 하는 생명줄이기도 하고, 또 생생하고 긴장되게 만드는 짜릿함이기도 하다. 특히 모든 열정을 쏟아부어 그 일을 성공시켰을 때의 감동이란 사랑 고백보다 백배는 더 흥분할지도 모르겠다.

서산시대가 만난 정기영 대표는 드라마뿐만 아니라 영화의 OST를 불렀고, 또한 SG워너비, 바비킴, 장나라, 바다, 양파, 세븐 등 유명 가수들의 프로세션으로 참여하여 무대 위를 장식했다.

나아가 활발한 활동을 하는 뮤지션으로서 그가 함께 작업한 가수들만 해도 우리가 잘 아는 박완규, 부활 8대 보컬 정단, K-POP스타 김보경, 김도향, 넥스트의 이현석, 하은 등 여럿이다.

정기영 대표는 현재 ‘KBMA 콘텐츠 미디어’ ‘495(사구오) 프로듀서서산시 청년협동조합 모두의 수장을 맡고 있으며, 최근 서산시 번화로의 대한민국 동행세일 빨강거리Ann’, ‘노랑나랑 거리축제를 기획한 바 있다.

# 서산에는 마땅히 갈만한 음악교육기관이 없어 잠재웠던 뮤지션의 꿈

1981년생 정기영 대표는 아버지의 일터가 있는 울산에서 11녀 중 장남으로 세상에 태어나 그의 나이 11세 때, 2의 고향이 된 지금의 서산으로 이사를 오게 됐다. 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아버지의 발령으로 사랑하던 친구들과 헤어지고 올라오는 길이 그렇게 멀었던 것은 아마도 물리적 거리보다 이별의 아픔 때문이었으리라.

전학 온 정 대표를 위로해 준 것은 누구보다 음악이었다. 미술을 전공하신 어머니는 노래를 좋아하여 그 길로 가고자 하는 아들을 지지했지만, 모친과는 달리 지극히 보수적이고 특히 FM적 성향으로 성실하고 꼼꼼한 성격이었던 아버지는 그가 법조인이 되기를 원했다.

정기영 대표는 당시를 회상하며 아버지가 어렵지는 않았지만 왠지 아버지 뜻에 거역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음악인의 길을 가고 싶다는 것은 마음만 가지고 있었지 딱히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또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말란 신의 뜻이었는지는 서산에는 마땅히 갈만한 음악교육기관또한 없었다. 이처럼 뮤지션은 막연한 단어였기에, 나는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아주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럼에도 내게 음악적 영감을 준 서령고등학교 친구들 강민철, 김준역, 정훈, 이희수, 엄요환, 정찬일 이상 6인이 없었다면 나의 음악적 소양은 아마도 많이 희석되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 나를 믿고 결국 음악의 길을 허락해 주신 아버지가 계셨기에 실망시키지 않고 더 열심히 했다

서령고를 졸업하고 영문학과에 입학하고 난 직후인 어느날, 정기영 대표는 묻어두었던 음악인의 길을 가고자 아버지와 깊은 대화를 하기 위해 대중목욕탕을 찾았다.

감히 내가 아버지에게 거래를 하게 됐다. ‘1년만 음악을 하고 싶다. 그리고 그 길이 제 길이 아니라면 과감히 그만두고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공부를 하겠다. 아들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번만 믿어달라

아버지의 꽉 다문 입술을 못 본 척했지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한참 침묵이 흐르는 사이 목욕탕의 뜨거운 열기는 평소보다 왜 그리 더 뜨거웠던지.

그 짧은 사이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만약 아버지가 안 된다고 하면…….’ 더는 해답이 나올 것 같지 않은 찰나, 아버지의 무거운 입술이 드디어 열렸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버지는 아들인 나를 믿고 결국 음악의 길을 허락해 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아버지로서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내가 좋아하는 길로 깊숙이 들어가기 위해 대학교에 휴학계를 냈고 영감을 준 친구들과 그룹사운드를 결성하여 '천년동안도' 라이브클럽에서 노래하며 영감을 다져나갔다.”

감사하게도 가족들은 그런 나를 보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으로 와주었고, 심지어 친구분들을 모시고 오시기도 했다.”

부모님의 격려 덕분에 20년 외길을 걷게 됐다는 정기영 대표는 부모님이 없었으면 자신은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방송 코러스를 하며
방송 코러스를 하며

# ‘내 자리는 또다시 무대라는 생각에 다시금 이를 악물고 연습에 연습으로 담금질을 해나갔던 시절

정기영 대표는 그 후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스타제국에 소속되면서 보다 활발한 활동을 했다. 특히 KBS드라마 애정의 조건’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와 영화 열한번째 엄마’ OST ‘기다림의 끝을 부르기도 했다.

그밖에도 신인가수 보컬트레이너와 SG워너비, 바비킴, 장나라, 바다, 김형중, 지금은 고인이 된 박용하 등 국내 굴지 가수들의 슈퍼세선(콘서트에서 일류 연주자와 가수가 협력하여 공연하는 것)을 하기도 했다.

처음부터 무대에 올랐던 건 아니라며 방송 초반에는 엄청나게 혼나면서 배웠다. 당시에는 욕을 너무 먹어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당시 KBS 2TV ‘윤도현의 러브레터에 가수 조성모 씨가 출연하게 됐을 때였다.

마침 내가 무대에 올라 함께 공연하게 됐는데 음을 잘 맞추지 못해 그만 퇴장을 해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난 후, 모든 스태프진들과 가수들이 보는 앞에서 심하게 혼이 나야 했다.

그것도 하나 못하냐. 정신 차리고 똑바로 배워라. 배워서 남주냐. 그때마다 자존심도 상했지만 그보다는 더 내 마음이 절벽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명색이 노래를 좀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명색이 OST를 부른 가수인데...’라고 생각하니 소속사 식구들에게 자존심도 상하고 알 수 없는 오기도 발동했다. 그리고 속상했던 것은 왜 그럴 때마다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르는지.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변의 진리는 내 자리는 또다시 무대라는 생각에 다시금 이를 악물고 연습에 연습으로 담금질을 해나갔다.

칼을 가는 심정으로 하루 한 시간 자면서 맹연습을 한 날도 있었다. 특히 콘서트를 했던 날에는 대부분 피곤하여 나가떨어지는 시간임에도 돌아와 다시 새벽까지 연습하곤 했다.

무수히 속울음을 삼켰던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사람들을 두고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참 희한한 것이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왜 꿈처럼 아름다운 추억이 될까.”

무대위에서
무대위에서

# 해군홍보단 입대는 내 삶의 방향을 확고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정기영 대표의 삶 속에는 음악과 일상이 분리하는 일은 결코 상상하지 못한다. 그 일례로 대한민국 건강한 남아로 태어나면 반드시 가야 하는 입대마저도 2년 공백의 틈을 주지 않기 위해 24살 나이에 해군홍보단에 입대하게 됐다. 음악에 대한 목마름과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활동을 지속해서 확장성 있게 펼쳐나갈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매리트였다.

군대였지만 연예인 제조소라는 별칭까지 얻게 될 정도로 정말 대단한 곳이었다. 전세계를 다니며 공연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아마도 한 열 뼘쯤은 성장했지 않을까 싶다.”

제대를 하면서 2008, 지인들과 ‘KBMA 콘텐츠 미디어를 여의도, 창전동, 공릉동, 동탄점, 서산점에 설립하게 됐다. 그로인해 가수를 배출하는가 하면, 음악 OST 등 다양한 방법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됐다.

많은 분이 알고 있는 생로병사의 비밀, 퀴즈 대한민국, 무한지대, 보람상조 CF, 12일 나 혼자 산다 등 방송 배경음악이 우리 회사를 통해 날개를 달고 나갔다.

SG워너비 진호 씨와 함께
SG워너비 진호 씨와 함께

# 학창시절 음악에 목말라 있을 때 실용음악학원이 없어 애태웠던 것을 알았기에 ‘KBMA실용음악학원을 오픈했다

어떤 분들은 왜 굳이 서산에 ‘KBMA실용음악학원을 오픈하게 됐냐고 묻는다. 부모님이 계시는 이곳에 설립한 이유는 당연히 내가 사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 옛날 음악에 목말라 있을 때 어떤 곳에도 실용음악학원이 없어 애태웠던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후배들에게만은 애태우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학원을 통해 꿈을 펼치는 친구들을 보면서 새삼 굉장히 뿌듯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자신이 다닌 우리 회사에 취업하는 것을 보면 이것이 바로 보람이구나싶다. 앞으로도 고용 창출을 하기 위해 애쓸 생각이라고 말하는 정기영 대표.

그는 최근 도시재생 뉴딜사업관련 청년협동조합 모두의 수장으로서 2017년부터 지금까지 서산시 원도심에 시민로드패션쇼’, ‘번화로 꽃으로 물들다등 다양한 축제들을 기획·운영해 왔다.

올해 축제는 중소기업벤처와 소상공인센터에서 후원하는 것으로, ‘대한민국 동행세일이란 프로젝트였다.

특히 서산시의 3개 상인회인 서산시 중심상가 상인회빨강거리 앤중앙상가 상인회번화2로 상인회의 연합행사인 노랑나랑 거리축제를 성공적으로 열었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청년협동조합 모두가 기획한 서산시 번화로의 ‘노랑나랑 거리축제’
청년협동조합 모두가 기획한 서산시 번화로의 ‘노랑나랑 거리축제’
청년협동조합 모두가 기획한 서산시 번화로의 '빨강거리Ann 시민로드패션쇼'
청년협동조합 모두가 기획한 서산시 번화로의 '빨강거리Ann 시민로드패션쇼'

인터뷰를 마치며

서동초를 거쳐 서산중학교와 서령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신의 꿈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소년 정기영. 부모님의 응원에 힘입어 어느날 문득 꿈과 동행하며 걸었던 문화예술의 외길인생 20년이 그의 화려한 이력이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인생 절반을 그렇게 앞만 보고 걸었다. 아마도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꿈이 있는 사람에게는 한줄기 열정만 불어넣어 줘도 거뜬히 일어설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앞으로의 꿈을 묻자 그는 먼저 아시아계 가수들의 제작과 문화예술을 통한 기획·교류를 하고 싶다. 그리고 지역에는 도시재생뉴딜사업 관련 문화예술기획, 지역문화콘텐츠제작 일을 하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도심에 기업의 가치를 끌어들여 서산을 브랜딩 할 수 있다면 정말 멋질 것 같다고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기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일들 앞에서 지금처럼 열정적으로, 있는 힘껏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켈트족의 기도문 한 자락을 남긴다.


당신의 발 앞에 언제나 길이 나타나기를

바람은 언제나 당신의 등 뒤에서 불고

당신의 얼굴에는 해가 비치기를

이따금 당신의 길에 비가 내리더라도

곧 무지개가 뜨기를...

 

‘빨강거리Ann 시민로드패션쇼’ 출연진들과 함께
‘빨강거리Ann 시민로드패션쇼’ 출연진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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