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불효자는 가슴을 치며 통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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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불효자는 가슴을 치며 통곡합니다
  • 박두웅 기자
  • 승인 2020.07.10 2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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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제70주기 서산합동추모제 열려
맹 시장, 예산수립으로 늦었지만 메지골 유해발굴 시작한다
유족회 정명호 회장 “지난 5월 국회 과거사기본법 개정 통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제70주기 서산합동추모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제70주기 서산합동추모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들의 원혼이 떠돌고 있는 메지골의 유해발굴이 시작되게 됐다.

맹정호 서산시장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제70주기 서산합동추모제 추모사에서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이 여전히 부족한 현실에 송구스럽다. 부족하나마 올해 메지골 유해발굴 예산이 책정됐다서산시는 진상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져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의 아픈 상처가 치유될 수 있도록 유족 여러분과 늘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맹정호 서산시장
맹정호 서산시장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서산유족회(회장 정명호)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제70주기 서산합동추모제(4회째)10일 오후2시 서산시문화회관에서 봉행했다.

추모제에는 맹정호 서산시장, 이연희 시의회의장 등 시의원들과 김복영 한국 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 유족회장과 유족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추모제는 식전행사로 민간인 학살, 끝나지 않은 역사, 메지골 민간인 학살지역 방문에 이어 정명호 회장 인터뷰 영상과 서산승무 이애리 선생의 진혼무로 진행됐다.

 

이애리 선생의 진혼무
이애리 선생의 진혼무

 

이어 제례에는 김창국 감사의 독축, 정명호 유족회장의 초헌, 허웅회 부회장 아헌, 김복영 전국 유족회장의 종헌을 거쳐 유족 및 참석자들의 헌화 등으로 1,025위의 영령들을 추모제가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인사말에서 정명호 유족회장은 지난 52020대 마지막 국회에서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그러나 7가지 독소조항을 해결하지 못한 반쪽 개정 법안이 되었다앞으로 추가 개정안과 배보상 법안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정명호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서산유족회장
정명호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서산유족회장

 

이연희 시의회 의장은 “70여 년전의 참혹한 비극이 다시는 이 땅에서 뒤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있다서산시의회는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유가족에 대한 합당한 예우를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연희 서산시의회 의장 추모사
이연희 서산시의회 의장 추모사

 

한편, 이번 추모제는 서산시가 공식 지원하는 행사로 4회째를 맞고 있으며, 올해는 서산시립합창단이 출연하여 가곡 비목과, 추모의 노래로 2,200여 영령들의 원혼을 달랬다.

 

서산시립합창단
서산시립합창단

 

6·25 전쟁 시기 서산지역 민간인 희생사건은?

 

6·25 전쟁 시기 서산지역 민간인 희생사건은 보도연맹원 희생사건,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 그리고 부역혐의희생사건이 상호 고리처럼 연결되어 연이어 3차례 발생했다.

전쟁 발발 직후 맨 처음 군경이 후퇴하면서 보도연맹원을 집단 살해한 것이 직접적 문제의 출발점이었다. 이어 인민군 점령기에 보복적 차원의 집단살해사건이 있었고, 수복 후에는 상상을 초월한 잔혹행위와 더불어 대규모의 집단살해사건이 발생했다.

전쟁 초기 인민군이 서산·홍성 방면으로 남진하자 서산 경찰은 예산 지역의 경찰과 함께 신창 등지에서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한 전투를 수행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상황이 급박해진 서산과 태안 경찰은 712일경 지역의 모든 공공 기관을 소개한 뒤 철수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전쟁 직후부터 군 경찰서나 면 지서에 예비 검속을 해 두었던 보도 연맹원이나 요주의·요시찰인들을 학살한 것도 이 무렵이다. 당시 경찰이 성연면 일람리 메지골 등지에서 보도연맹원들을 집단 학살한 것도 퇴각 직전인 79일부터 12일 사이였다. 메지골 마을 주민 공 모 씨는 그날 거의 하루 종일 총소리가 요란했고, 그 당시 어른들이 메지골 산골짜기 초입부터 끝까지 시체들로 가득차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서산경찰은 지역 보도연맹원을 포함한 예비검속 대상자들을 연행하거나 불러들여 구금한 후 인민군의 남하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서산 성연면 메지골 당진 한진포구(목캥이) 태안 백화산(사기실재) 등지로 끌고 가 집단 사살했다.

당시 태안경찰서에 순경으로 근무했던 이 모 씨는 진실화해위의 조사에서 충남경찰국의 지시로 예비 검속된 보도연맹원 중 일부를 대전형무소로 이송했고, 후퇴하기 2~3일전에 나머지 예비검속자들을 즉결처분 하라는 공문을 충남경찰국으로 받았다고 진술했다.

메지골에서 5대째 살고 있다는 김 모(81) 씨의 증언에 따르면 7월경 트럭 1대에는 경찰이, 트럭 4대에는 민간인들이 골짜기로 들어 왔고, 흰 노끈으로 묶인 사람들을 줄줄이 메지골로 끌고 들어 간 후 총소리가 났다.

이후 학살된 시신들이 겹겹이 쌓였고, 경찰이 철수한 후 수일 동안 가족들이 우마차를 끌고 와 시신을 찾아 갔지만, 찾아가지 못한 시신들은 산 짐승에게 훼손되고, 부패가 시작되면서 암매장이 되었다고 당시 상황을 진술했다.

서산군의 경우 1950718일부터 930일경까지 인민군 3개 연대가 군 경찰서에 주둔하였다. 당시 서산 지역의 지방 좌익들은 인민군과 노동당의 지도하에서 군청과 경찰서 등을 장악한 뒤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인민 공화국 시기, 서산군에도 정치 보위국의 지휘 하에서 군 내무서, 면 분주소, 리 자위대가 조직되었다.

이 당시 북한 정권은 군·면 단위의 노동당과 인민 위원회 조직, 또는 청년 동맹, 농민 동맹, 여성 동맹 등 각종 정치·사회단체를 조직한 뒤 이를 매개로 무상 몰수, 무상 분배를 핵심 내용으로 한 북한식 토지 개혁, 8·15해방을 기념한 궐기 대회 형식의 인민재판, 징병과 전쟁 물자 징발 정책 등을 실시하였다.

19509월 중순 인천 상륙 작전이 전개되자 서산 지역에 주둔했던 인민군도 인민군 전선 사령부의 후퇴 명령에 따라 1950930일경부터 후퇴를 시작했다. 당시 태안 지역에도 미군들이 함포 사격을 하면서 근흥면 지역으로 진입을 시도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퇴각하는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대규모 우익 민간인학살 사건이 소탐산과 양대리에서 벌어졌다. 인민군과 좌익세력은 대한청년단원, 공무원, 경찰공무원과 가족 등을 학살하고 심지어 여자까지 경찰공무원 가족이라는 이유로 학살대상에 포함시켰다.

소원면 부면장 김성용 씨, 전직 경찰이었던 이창영 씨, 의용소방대였던 심형섭 씨 등도 서산내무서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양대리에서 총살 혹은 창으로 척살되었다. 심지어 박종혁 씨는 집안이 부유하다는 이유로. 박홍진 씨는 공무원 가족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 이 와중에 집안끼리의 토지문제 등 개인적 원한으로 인해 밀고 되어 죽음을 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진실화해위 기록에 의하면 좌익에 의한 우익인사의 학살은 서산시 177, 태안군 156명 모두 333명이 희생되었다. 지금도 서산시 수석동 소탐산 자락에는 당시 희생된 300여 명 중 28구가 안치돼 있는 반공호국희생자 합동위령탑이 있다.

인민군이 후퇴하고 서산군이 수복되자 서산 지역의 우익 청년(의용 경찰, 의용 소방대, 대한청년단)들은 마을의 청년들을 모아 치안대를 조직한 뒤 아무런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부역자들을 무단으로 색출하여 처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부역 혐의자에 대한 사사로운 학살은 108일 경찰 진주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경찰 자료에 따르면, 195010월 초순부터 12월 말경까지 서산경찰서·태안경찰서 소속 경찰과 해군 등에 의해 서산군 인지면 갈산리 교통호, 메지골 등 최소 30여 곳에서 적법한 절차 없이 부역 혐의자들이 좌익이란 죄명을 쓰고 집단 학살되었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북한군 점령기에 희생된 이들의 유가족 및 우익단체 등이 주축이 된 치안대가 자의적으로 처형 대상자를 정하면서 피해 규모가 컸다고 밝혔다. 당시 서산경찰서 사찰계에서 근무한 한 경찰은 부역 혐의자를 처형하는 과정에서 개인적 감정이 많이 개입됐다고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진술했다.

소탐산 부역혐의자 집단살해사건은 1·4후퇴 직전에 서산경찰서 소속 경찰에 의해 발생했다. 사건 당시 소탐산에 거주하고 있는 한○○은 경찰이 부역혐의자들을 트럭으로 이송하는 것을 목격했고, 이후 약 한 시간 동안 총소리를 들었다고 당시의 기억을 전했다.

당시 태안경찰서 소속 경찰 정○○도 서산경찰서 소속 경찰이 급해서 그냥 끌고 갈 수 없으니까 (부역자들을) 소탐산에서 죽였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

당시 서산경찰서 ○○지서장 등 다수의 경찰들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희생자들은 명확한 처리기준 없이 경찰과 치안대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처형대상자로 분류됐으며, 이 가운데 일부는 치안대원과의 개인적 감정으로 인해 부역자로 몰려 처형되는 등 부역혐의가 불분명한 민간인의 희생도 매우 많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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