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알바에서 144억 매출까지 ㈜포피플 김용래 대표
상태바
【인터뷰】알바에서 144억 매출까지 ㈜포피플 김용래 대표
  • 최미향 기자
  • 승인 2020.07.07 01: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엄마를 기다리던 형제가 세상의 주인공이 되기까지 풀 스토리

“세상은 상상한대로 만들어진다. 내 갈 길은 천억대 비즈니스에 도전하는 일”
알바에서 144억 매출까지 ㈜포피플 김용래 대표
알바에서 144억 매출까지 ㈜포피플 김용래 대표

프롤로그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던 가난한 남자가 어느날 144억 매출을 올리는 CEO가 되어 있다? 많은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는 분명 행운의 남자일 거야! 어쩌면 로또에 당첨되었거나 재산을 물려받았겠지

물론 이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행운이 아니다. 두 형제의 용감한 도전이 만든 성공신화다.

포피플 김용래 대표는 치열한 삶 속에는 언제나 동생이 있었다. 만약 내 옆에 동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라며 동생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서산시대는 상상한 대로 세상은 만들어진다는 모토로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김용래 대표를 만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어린 시절에 대해 말해줄 수 있나?

엄마 나이 18살 때 서산시 석림동에서 태어났다. 너무 어린 나이에 나를 낳은 엄마는 막막한 시간을 거쳤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엄마를 얻었고, 엄마는 나를 키우며 참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리고 두 살 터울의 내 남동생을 낳아 주었다. 남동생은 내게 선물 같은 존재였다.

물론 동생을 얻었을 때의 기억은 없다. 하지만 아마도 나는 세상을 전부 얻었을 만큼 행복했을 것이라 미뤄 추측해본다. 많은 사람은 부인을 가리켜 동반자라고 하지만 나는 하나를 더 두고 싶다. 내 동생도 내겐 동반자다.

엄마와 함께한 모습(8살 나와 6살 동생)
사랑하는 엄마와 함께(8살 나와 6살 동생)

의외의 대답이다. 남동생 얘기를 조금 더 해줄 수 있나?

우리는 하나였던 것 같다. 언제나 내가 있는 곳에는 동생이 있었고, 동생이 있는 곳에는 내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8살 때 헤어진 아버지의 기억이 내 머릿속에는 없다. 영화처럼 내 머릿속에도 지우개가 있었던 것 같다.

동생과 함께 아버지와 헤어지고 엄마를 따라 낯선 곳으로 갔고, 그러다 다시 외할머니 집에서 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살기도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할머니의 품은 일 나간 엄마의 품이기도 했다가, 때론 떠나버린 아버지기도 했다가, 그리고 나의 따뜻한 영혼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나와 동생은 자아를 구성했던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엄마를 따라 이사도 여러 번 다녔다. 그럴 때마다 달라지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내겐 늘 형아를 찾는 동생이 있었기 때문에, 어렸지만 때로는 내가 보호자가 된 듯한 착각 속에 빠져들곤 했다.

어머니는 김 대표에게 어떤 대상이었나?

나에게 엄마는 늘 그리움과 기다림의 대상이었다. 내가 동생이랑 서로 의지하며 커나가는 동안 엄마는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 일을 하셨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 내 나이보다도 훨씬 어렸을 때의 우리 엄마 삶이 바로 그 당시였다.

엄마와 떨어져 외할머니댁에 살았을 때였다. 엄마가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일이 우리 형제의 유일한 낙이었다. 동생과 나는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엄마를 기다렸다. 하루 이틀 사흘, 보름 한 달.

그러다 보면 엄마가 나타났다. 두 손에는 우리에게 줄 신발을 사 들고. 정말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우리 엄마였다. 달려가 와락 안기며 나는 엄마 없는 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받은 수우미양가 성적표를 제일 먼저 코앞에 내밀었다.

엄마가 활짝 웃으며 잘했다 우리 아들이라는 한마디는 힘들었던 그간의 모든 기억이 삽시간에 사라지게 하는 신비한 만병통치약이었다.

그리고 밤새 엄마를 차지하고 누운 우리 형제는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엄마에게 속사포처럼 뱉어냈다. 때로는 어리광으로, 때로는 투정으로, 그리고 때로는 엄마에게 기대고 싶어서.

어쩌면 엄마의 웃는 얼굴이 우리 형제를 지탱하는 힘이었던 것 같다.

의좋은 형제, 김용래·김종래 대표
의좋은 형제, 김용래·김종래 대표

사춘기가 무섭다던데 혹시 사춘기 병은 오지 않았나?

아마 이때가 사춘기였던 것 같다. 서령중학교 시절 가정통신문 난에 아버지에 관한 내용을 쓰는 게 가장 힘들었다. 몇 번이고 나는 펜을 들고 점만 찍었더랬다.

그때 처음으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외롭고 공허한 마음도 부쩍 심해지고...

그러나 누구 하나 사춘기라고 감싸줄 사람이 내 곁엔 없었다. 그럴때마다 동생 손을 잡고 운동장으로 나가 농구를 했다. 힘들면 힘들수록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장래에 대한 막막함, 질풍노도의 불안한 심정들이 구멍으로 바람세 듯 숭숭 빠져 나갔다.

그때는 꿈을 꾸기엔 내가 처한 상황이 너무 열악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공부와 운동뿐이었다. 그 결과 나는 중학교 전교 회장을 했고 덕분에 우리 엄마는 학부모 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전례없이 서령중 전교 회장이 오직 버스가 타고 싶은 마음에 지곡 서일고등학교로 입학을 했고, 뒤이어 고려대학교 사회체육학과에 입학했다.

고려대 진학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즐거운 성취감을 맛보게 해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스노우보드 전지훈련차 갔던 스위스
스노보드 전지훈련차 갔던 스위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입학했는데 그곳 생활은 어땠나?

즐길 겨를이 없었다.서산의 우물 안 개구리가 캠퍼스에 입학하니 그곳엔 의외로 괴물들이 상당히 많았다. 한마디로 또 다른 세상이었다.

대학에서 스노보드를 알게 되었다. 내 삶이 완전히 바뀐 순간이었다. 선수가 되기 위해 봄·여름·가을·겨울 해외 전지훈련을 갔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는데, 스노보드 강사 생활 및 관리자로 박봉을 받았고, 퇴근 후부터 늦은 밤까지 바에서 일을 했으며, 남는 시간에는 분식집 철가방 2개를 들고 배달을 하기도 했다.

참 악착같이 살았다. 새벽에 잠시 눈 붙이고 다시 일터로 나가 돈을 벌어야 했던 그 퍽퍽한 시절, 그래도 내겐 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어느날 내게 배웠던 한 살 많은 형이 나를 뛰어넘어 대한민국 최고의 선수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형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그 절망감이라니.

한계였다. 26살에 스노보드 꿈을 접었다.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막막했다. 그때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가족이 내 눈에 보였다.

스노보드 꿈을 접었는데 많이 절망했을 것 같다. 다시 일어선 계기는?

내 동생의 따뜻한 손과 LG유플러스였다. 가족이 보이면서 먹고 살아야겠단 생각이 들어 동생과 함께 LG유플러스 판매사원을 했다.

접근은 서로가 분명 달랐다. 나는 입대 전 잠시 머무는 단순한 알바 자리 정도였다면 동생은 꿈꾸며 일하는 평생직장이었다. 그래서일까 매장 안에서 판매를 하던 동생은 매장 밖에서 판매하는 나와는 달리 매사 아주 재밌게 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어느새 판매왕의 스타 자리에까지 등극하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동생과는 달리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멀쩡한 내가 매장 앞 길거리에서 히치영업이나 한다고 생각하니 상당히 부끄러웠다.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만날까 봐 숨고 싶었을 때도 수없이 많았다.

동생은 나날이 당당해져 갔다. 그를 지켜보면서 어느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래 이왕 일할 거면 나도 즐겁게 한번 해보자그때부터 동생을 표본으로 삼아 선의의 경쟁에 푹 빠지게 됐다.

그 즈음 영장이 나왔다. 그때까지도 매장에서 옆도 보지않고 참 열심히 일에 묻혀 지냈다. 이제 어제의 내가 아니었다. 알바에서 평생의 직업으로 탈바꿈한 나였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군대에 들어가야 하다니!

하지만 어쩌랴. 지점장님께 군대 빨리 갔다 오겠다. 제대하면 다시 받아달라는 말을 남기고 나라의 부름을 받았다.

내무반에서도 오죽했으면 남들은 여자친구에게 전화한다지만 나는 다시 복귀할 사업장의 지점장님께 전화를 걸었을까. “영업실적은 괜찮냐? 동생은 잘하고 있냐? 나를 잊지 마라며 나의 존재가치를 심어주기도 했다. 지점장님은 니가 내 상사냐? 군대에서 실적을 다 물어보게라며 웃곤 했다.

군대는 무엇보다 내게 소중한 시간이었다. 입대부터 제대까지 단 하루도 빠짐없이 영어공부를 하며 사회 복귀를 꿈꿨다. 드디어 29살 군대를 전역하고 꿈에 그리던 직장으로 다시 복귀를 했다.

LG유플러스에서 대상 받은 사진
LG유플러스에서 대상 받은 사진

2년 공백기로 영업마인드가 많이 사장되었을텐데?

아니다. 무엇보다 반드시 성공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군대에서도 끊임없이 공부를 했었다. 그 원동력은 바로 어렸을 때부터 친구처럼 따라다닌 가난이었다. 나는 부자가 되고 싶었다. 엄마와 가족들, 특히 외할머니께 효도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은 꿈이 있었기 때문에 악착같이 판매전략을 익혔다.

그렇게 나는 제대를 했고 다니던 직장으로 복귀하면서 휴대폰 매장이 고속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동생의 뒤를 이어 드디어 점장이 되었다. 서산시 광장에 있던 LG유플러스 매장 김용래 점장. 그것이 내 자리였다.

그곳에서 새로운 행복을 디자인해 나갔다. 30건 하던 것을 내가 맡으면서 3배 이상, 당진 매장 발령으로 300%와 대전 은행동 지점에서 350%를 성장시키는 등 고공행진을 이어 나갔다.

당시 전국 유플러스 소매경진대회 발표를 하고 나서부터는 확장성이 눈에 띄게 넓어졌고, 심지어 전국에서 영업 수완을 배우기 위해 몰려들 정도였다.

그리고 동생의 사업 권유로 LG유플러스 서산점을 오픈했다. 감사하게도 사업 시작 2년 만에 유플러스 소매사업장으로는 서산에서 처음으로 1등을 하게 됐다. 다들 놀라워했다. 처음 알바를 시작한 매장에서 우리 형제의 이름을 달고 대표라는 직함으로 이룬 성과는 대단한 의미였다.

이듬해 2013년 대상, 2014년도 최우수상 등을 비롯하여 대전, 전주 등을 포함한 16개 매장운영과 매출 150여억 원의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직원들과 함께
직원들과 함께

휴대폰 판매업 외에도 다른 사업체를 경영하고 있다고 들었다. 요즘 어떤 심정으로 일하고 있나?

아 맞다. 요즘은 정말 사명감으로 매진하고 있다.

내게는 딸린 식구들이 참 많다. LG유플러스, 세컨즈쓰리미디어 ‘3초마켓모든 상품 중에서도 야심차게 내놓은 취한저격과 해양심층수 물들다의 생수, 피를 나눈 사랑하는 가족들, 회사 식구들 70,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고객들 등. 그래서 요즘은 아파도 아플 시간이 없다.

우리 회사 이름이 포피플 아닌가. 이것은 사람을 위한 회사라는 뜻이다. 그에 걸맞게 가장 우선순위에 놓여 있는 것이 곧 사람이다.

그동안 나를 스쳐 간 직원만도 약 5~6천 명이다. 대부분 등록금을 벌기 위해, 용돈을 벌기 위해 이런저런 이유로 왔던 분들이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이곳이 단순히 그쳐가는 정류장에 불과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내겐 비록 그렇게 지나치는 곳일지라도 그들의 인생에 아주 멋진 과정 하나쯤은 남겨주자는 것이 내 지론이다.

즉 멘토 같은 심정으로 일하고 있다. 내 동생과 내가 서로에게 평생 응원을 아끼지 않는 멘토가 되어 서로를 이끌어 주었듯이 말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무자본 창업 시스템이다.

이 개념은 우리 형제가 유플러스의 도움을 받아 시작한 만큼 이제 맨몸으로 사업을 시작하려는, 또는 재기하고 싶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새로운 창업 시스템이다. 15여 년의 비결과 자본의 도움으로 그들이 제대로 사회에 성장하기를 돕는 취지다.

김용래 대표와 가족들
김용래 대표와 가족들

에필로그

나는 두 딸 소율이와 나율이를 가진 아빠이며, 한 가정의 가장인 동시에 아들이고 손자이고 형이다. 적어도 나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회사에서는 직원들이 존경할 수 있는 친구 같은 대표, 주변에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늘 편안함으로 다가가는 지인으로 그렇게 모두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하게 하는 모티베이터이고 싶다포피플 김용래 대표.

그는 말했다.

나의 20대는 세상 무서울 것 없이 꿈만 꾸던 시절이었다면, 지금 나의 40대는 책임질 게 너무 많은, 꿈을 현실로 옮겨심는 시절이다. 영국 속담에 나무를 심는 사람은 자기는 물론 남들까지 사랑한다고 했다. 앞으로도 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내 동생과 함께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다.”

7월 한가한 주말에 만난 김용래 대표. 그는 분명 어제와 오늘에 대해 무수히 많은 대차대조표를 그렸을 것이다. 어쩌면 그 먹먹함이 그를 성장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일을 향해 성장해가는 김용래 대표 형제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우애 있는 걸음으로 부지런히 함께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두 분은 이 세상의 멋진 주인공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