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후손 정환호 선생(전 서산여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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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후손 정환호 선생(전 서산여고 교장)
  • 최미향 기자
  • 승인 2020.07.01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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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광주 ‘금남로’-서산시 ‘금남로’에는 어떤 비밀의 열쇠가 숨겨져 있을까!

정충신 장군 曰, “한 개인은 명분 때문에 죽을 수 있지만 한 국가가 명분 때문에 망할 수는 없다”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후손 정환호 선생(전 서산여고 교장)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후손 정환호 선생(전 서산여고 교장)

어느 봄날, 정갈하고 참한 곳을 발견했다. 급하게 주차를 하고 여기저기 아름다운 풍경을 렌즈에 담았다. 그리고 후에 이곳이 바로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사당 진충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신기했던 것은 광주광역시에 위치한 금남로와 서산시의 금남로가 동일인물에 의해 탄생된 도로라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전라도 광주에 있는 금남로와 서산시 한라비발디와 동문동 코아루아파트 앞을 지나는 큰 대로의 금남로는 과연 어떤 비밀의 열쇠가 숨겨져 있는 걸까.

금남이란 이름은 바로 정충신 장군의 군호인 금남군(錦南君)에서 따온 것으로, 장군은 15751229일 광주광역시 향교동에서 태어났다.

그렇다면 상당히 궁금한 사항 또 하나가 발견된다. 고향은 전라도인데 사당은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에 있다? 더구나 장군을 기리기 위해 그의 군호를 딴 도로가 광주광역시서산시 동문동에 있다? 참으로 미스테리하다.

서산시대는 전 서산여고 교장이자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11대 후손인 정환호 선생(82)을 만나 30대의 젊은 나이에 종친회와 충무공 정충신 유적현창사업회를 만들었던 계기와 정충신 장군에 대한 여러 가지 역사적 이야기를 들어봤다.

 

당시 가난으로 대부분 교육은 뒷전이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교사의 길을 가게 된 계기부터 말씀해 달라.

 

우리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부터 지방 행정공무원직을 수행하신 분이다. 해방되면서 농회장으로 근무하다 6.25 직후 실직됐다. 당시 마을 사람들보다는 그래도 교육에 더 집착하셨는데 그래서 그런가 43녀 중 맏이인 내가 교사가 되어 후학들을 가르치길 원하셨다.

서산군 대산에서 태어나 서산군 지곡면에서 성장하면서 아버지는 늘 돈이 없으니 알아서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훌륭한 교육자가 되어라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 아버지의 말씀은 곧 법이었다.

서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인천 사범학교로 들어갔다. 어려운 가정생활 속에서도 배움의 끈을 이어가기 위해 신문배달, 구두닦기 등을 하면서 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가 지곡면장을 사직하게 된 충격으로 50세 젊은 나이로 별세하자, 부득이 7남매의 맏이로서 동생들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다.

비록 어깨는 무거웠지만 반대로 또한 성장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1958년 양평에 있는 학교로 발령받아 아버지의 바람대로 국민학교 교사가 됐다.

지금 생각해도 참 악착같이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초등교사 13년 만에 독학으로 공부하여 해미고등학교(현 서산고) 미술 교사가 되었다.

영정(국가민속문화재 제36호) 초상화(길이 200cm, 폭 90cm)는 팔분 좌안상이며 복장은 북청색 운문 단상복이고 머리에는 사모를 단정하게 쓰고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색상에 변화가 거의 없다.
영정(국가민속문화재 제36호) 초상화(길이 200cm, 폭 90cm)는 팔분 좌안상이며 복장은 북청색 운문 단상복이고 머리에는 사모를 단정하게 쓰고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색상에 변화가 거의 없다.

미술 교사였다면 타고난 소질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 진충사 사당에 있는 충무공 정충신 장군 초상화를 직접 그렸다고 하던데?

내가 그린 것이 맞다. 오래전 정충신 장군 초상화를 도둑맞아 한바탕 난리가 났었던 때가 있었다. 진본이 없어졌으니 어땠겠나. 물론 나중에는 찾았지만...

안되겠다 싶어 그때부터 장군의 초상화를 직접 그려 진충사에 모셔 놓고, 진본은 종손댁에 보관하게 됐다..

내 나이 서른도 되기 훨씬 전에 장군을 알게 되었고, 조상 숭배정신 하나를 가지고 종친회와 충무공 정충신 유적현창사업회를 직접 만들어 세상에 알리기까지 기울인 노력들.

지금도 사당에 들러 내가 그린 장군의 영정을 바라보노라면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밀려온다.

군복(국가민속문화재 제36호)이 갑옷은 두정갑으로 속에 가죽이나 쇠로 만든 비늘이 없다. 우리나라 현존 갑옷 중 본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는 갑옷이다.
군복(국가민속문화재 제36호)이 갑옷은 두정갑으로 속에 가죽이나 쇠로 만든 비늘이 없다. 우리나라 현존 갑옷 중 본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는 갑옷이다.

충무공 정충신 장군은 구체적으로 어떤 분인가?

17세의 나이로 적진을 뚫고 의주로 피란 간 조정에 장계를 전달한 충신이다.

정충신 장군의 고향은 광주광역시 향교동으로,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일 때 어린 소년의 몸으로 호남지역의 전투상황을 담은 장계를 가지고 2천리 적진을 뚫고 선조 임금께 전달했다.

장계를 받아든 조정에서는 전세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었는데, 당시 호남지역의 선전으로 인하여 왜군은 서해안으로 북상할 수 없었으며 이는 곧 조선 조정의 명나라 망명을 막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정충신 장군은 무과에 급제하여 군관으로 군문에 투신하게 되고, 명나라 구원군을 도와 평양탈환과 서울탈환에도 많은 공을 세운 바 있다.

스승 이항복에 대한 보은을 다했다.

1618년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론이 나오자 이를 반대한 그의 스승 이항복이 북청으로 귀양살이를 하러 가게 되었다. 이때 충무공 정충신은 관직을 버리고 스승 이항복을 따라 귀양길을 따라가며 지성으로 섬겼다. 이후 이항복이 귀양지에서 사망하자 그의 시신을 모시고 포천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르며 스승에 대한 보은을 다했다.

이괄의 난 때 조선 왕조를 지켰다.

1622년 평안도 병마우후에 임명되고, 1623년에는 안주목사 겸 방어사가 되었다. 이듬해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충무공 정충신은 이괄과의 친분을 끊고 의연히 일어나 전부대장으로 관군을 이끌고 서울 길마재 전투에서 반군을 궤멸시켜 조선 왕조를 지겼다.

이 공로로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영변 대도호부사로 승진하였으며 1625년에는 진무일등공신 정헌대부 금남군에 책훈되었다.

등거리 외교정책을 주장하며 충절을 보였다.

1633년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후금과의 외교적 절교를 알리는 국서를 가지고 후금에 가는 사신 김대건 일행의 길을 막고 의주에 머무르게 한 뒤 오랑캐를 함부로 자극해서는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상소를 올린 인물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정충신을 충남 당진과 황해도 장연으로 유배 보내게 되고, 이로 인해 정충신은 많은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는 한 개인은 명분 때문에 죽을 수 있지만 한 국가가 명분 때문에 망할 수는 없다는 유명한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1636년 향년 61세로 별세하여 우리 고장인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에 예장되었다. 공이 서거한 지 49년 뒤인 1685년 숙종 11년에 충무라는 시호를 내려 충무공이 된다.

나무투구(국가민속문화재 제36호, 1975년에 도난당함) 괴목나무로 만든 원두형의 투구(높이 50cm, 직경 45cm)로 대형이다. 현존하는 유물로는 재질이 목재인 것이 유일하고 모양도 독특하다.
나무투구(국가민속문화재 제36호, 1975년에 도난당함) 괴목나무로 만든 원두형의 투구(높이 50cm, 직경 45cm)로 대형이다. 현존하는 유물로는 재질이 목재인 것이 유일하고 모양도 독특하다.

 진충사와 충무공 정충신과의 관계는?

진충사는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국사봉 동쪽 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에 조선 중기의 명장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사우가 있다.

창건연대는 조선 인조 14년 왕명으로 건립되었고 영조 13년 중수하였다. 5대손 곡성현감 세흥에 의해 당진군 정미면 신시리로 이건 되었다가, 그 후 9대손 재칠대에 지곡면 대요리 740번지 종손가 옆으로 다시 이건되어 봉안해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후손들과 대산의 김기풍 선생을 비롯한 지역유지들의 건의로 1970년에 지곡면 대요리 677번지 지금의 자리에 진충사를 신축했다.

진충사 전시관에는 국가민속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된 유품 5점과 지방문화재 40점을 비롯한 그의 유품들이 있으며, 해마다 양력 425일 유림과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

향로 및 향합(국가민속문화재 제36호)의 부조 등으로 보아서 충무 시호 하사 시의 ‘국왕 하사품’으로 추정된다.
향로 및 향합(국가민속문화재 제36호)의 부조 등으로 보아서 충무 시호 하사 시의 ‘국왕 하사품’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조선시대 500년 동안 충무 시호를 받은 9분 중 한 분이신 충무공 정충신 장군이 우리 고장에 모셔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하다. 요즘처럼 땅에 떨어진 윤리도덕과 나라사랑 정신을 진작시키기 위해서라도 많은 분들이 자부심을 느끼며 진충사를 방문해주시면 고맙겠다.

이곳에 오시면 충효정신, 청렴결백한 공직자정신, 스승 존경정신, 절의정신 등 거룩한 정충신의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어 좋다. 나 또한 앞으로도 정충신의 얼을 후세들에게 널리 알리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서군사명기(국가민속문화재 제36호, 길이 138cm, 너비 55.5cm)로 정충신 장군이 정묘호란때 사용한 부원수의 사명기이다.
서군사명기(국가민속문화재 제36호, 길이 138cm, 너비 55.5cm)로 정충신 장군이 정묘호란때 사용한 부원수의 사명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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