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경의 재미있는 이슈메이커-⑬

이미지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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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하늘. 솜털같이 새하얀 구름. 그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투명한 은빛 커튼을 살포시 드리운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따스한 어느 봄날이다. 오래 입어 빛바랜 교복은 몇 번을 다려 입었는지 반질반질하다. 엄마가 정성으로 싸준 도시락을 가방 안에 넣고 나는 그저 해맑다. 기대 반 설렘 반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슬며시 책가방을 열어본다. 아뿔싸! 먼 발치에서 뛰지 말라던 엄마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온다. 책가방 안은 이미 김칫국물로 범벅이다. 괜스레 원망스럽다. 붉게 젖은 책을 꺼내 말리면서 교실은 이내 김치 냄새가 진동한다.

그 당시 다들 몇 번씩은 겪는 일인지라 대수롭지도 않다. 지루한 수업 시간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분명 하루 종일 맑았던 하늘인데 난데없이 어두워진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니. 그제서야 엄마가 챙겨가라고 꺼내두었던 우산이 생각난다. 오늘은 월요일인데, 실컷 엄마가 다려준 교복이 무색해진다. 엄마는 어떻게 이 모든 걸 알고 있는 걸까.

매번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또다시 반복하는, 스스로를 자책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지금보다 실수가 더 많았다. 반찬을 몇 번이나 가방 안에 쏟았으면서도 또 반복한다. 우산을 두고 오는 일은 부지기수다. 심지어 가져온 우산은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나이가 들고 실패한 경험이 쌓이면서 자연스레 실수는 줄어들었다. 대신 일종의 수칙 같은 것이 점점 늘어갔다. 일어나면 물 한 모금 마시기. 외출하기 전 인터넷으로 날씨 검색하기. 식사 후 영양제는 필수. 자기 전 양치질로 마무리하기까지. 이 모든 항목들은 경험과 노하우가 축적된 실패하지 않는 건강한 삶을 위한 나만의 체크리스트다.

재밌는 사실은 일 년에 적어도 한 개씩은 늘어나는 것 같은데, 아직 성공한 삶인지는 모르겠다는 거다.

필자는 사람에 대한 체크리스트도 갖고 있다. 필자도 제법 자기주장이 강한 성격이기에 비슷한 성향의 사람과 마찰을 일으킨 적이 많았다. 그들과 부닥치기를 수차례.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매번 이유를 찾지 못하고 헤맬 뿐이었다.

2012년 필자는 인생 최고의 강적을 만났다. 직장 상사였던 그는 안하무인이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왔고, 제출하는 보고서는 전부 퇴짜를 놓았다. 이유는 하잘것없다. 줄 간격이 맞지 않아서다. 그는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브리핑을 맡긴다. 순전히 지적하기 위해서인 듯 한 페이지를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다행히 일 년 후 그는 다른 곳으로 보직 이동을 했지만 그가 남긴 트라우마는 오래도록 남았다. 다시는 실패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내 체크리스트에는 한 가지가 더 추가되었다. “독선적인 사람은 무조건 피할 것!”

이러한 행동은 자신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자기방어기제가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게 되면 과거의 외상적 경험이 되살아나고, 심리적 퇴행의 결과물로 우울증까지 나타날 수 있다.

부정적 심리상태는 의식적으로 우울하고 비관적인 사고에 빠지게 만들고, 이러한 사고과정을 반복하면 자각 없이 우울감을 발생시키는 자동적 사고가 진행된다.

Abramson(1978)의 학습된 무기력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실패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실패를 어떤 이유에 귀인 시킨다고 하였다. 특히 실패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할 경우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우울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 새롭게 접목된 절망감 이론은 실패한 상황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꿀 수 없을 것이라는 무기력함과 절망감이 반응하여 변화에 대한 의지를 상실하게 만든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실패 경험이 자존감을 떨어트리고 우울감을 증가시킬 것으로 예상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연구결과가 관심을 받고 있다. Haugen(2002)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실패의 원인이 귀인 되는 요인 중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것에 더 강하게 귀인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귀인 양식은 성취동기, 자존감, 긍정적인 기분 상태, 신체 건강, 주관적 행복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는 겸양적인 태도보다 외부적 요인에 귀인 하는 것이 정신적 건강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며칠 전 필자는 8년 전 나를 무수히도 괴롭혔던 옛 상사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보직 이동을 한 후에도 그는 여러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는 이야기뿐이었다. 그 때문에 정신병원 치료까지 받은 이도 있다고 하니 어지간히도 괴롭혔던 모양이다.

나 역시 감당하기 힘든 시간을 보냈기에 이해는 되지만 한편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계기도 되었다. 내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도 나 자신에게 그 원인을 귀인 시키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실패의 경험은 쓰라린 고통을 수반한다. 물론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회피적 태도는 피해야 하겠지만, 자신에게만 돌리는 부정적 태도는 버려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1. 한덕웅, & 장은영. (2000). 사회비교의 목표, 대상 및 성공/실패에 따른 자기 정서의 경험. 한국심리학회지: 사회 및 성격, 14(3), 109-123.

2. 한민지, & 장문선. (2013). 성공 및 실패 경험에 따른 긍정적, 부정적 완벽주의의 특성: 이분법적 사고, 자존감, 정서를 중심으로. 인간이해, 34(2), 151-171.

유은경 사회과학 박사과정
유은경 사회과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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