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내포제시조 충남무형문화재 17-2호 보유자 박선웅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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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내포제시조 충남무형문화재 17-2호 보유자 박선웅 선생
  • 최미향 기자
  • 승인 2020.06.02 18: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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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령의 영웅이 내포제시조 보유자가 되기까지의 인생 풀 스토리

“꿈이 있다면, 제자들을 많이 발굴·배출하여 시조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다”
내포제시조 충남무형문화재 17-2호 보유자 박선웅 선생
내포제시조 충남무형문화재 17-2호 보유자 박선웅 선생

프롤로그

가난한 집안의 8남매 중 장남 박선웅은 꿈을 버렸다. 가수만큼은 하고 싶었지만, 가난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이른 새벽녘부터 늦은 밤까지 배고픔을 참아가며 농사짓는 일을 했고, 그것도 모자라 남의 집 일을 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그 끝없는 막막함 속에서도 그를 지탱시켜준 것은 힘들 때마다 훠이훠이 삶의 고단함을 노래로 푸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그의 가정형편으로는 도저히 가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20살 청년 시절 그는 긴 안목을 바탕으로 시조를 선택했다.

그 순간 신기하게도 번뇌에 싸여있던 그의 가슴이 그렇게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슬프고 처절한 느낌을 주면서도, 맑고 씩씩한 느낌을 주는 내포제시조였다.

서산시대는 지난 금요일, 박선웅 선생을 만나 마치 블랙홀을 타고 아주 오래된 과거의 또다른 세계를 여행하는 듯한 시간을 가졌다.

힘든 소농작의 자식으로 아픔을 견디며 보낸 어린 시절

지금의 서산시 양대동에서 힘든 소농작의 애환을 고스란히 몸으로 견디시는 어머니와 시골장마다 배추, 무 등의 종자를 팔러 다니시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 사이에서 8남매 중 첫째로 세상에 태어난 내포제시조 충남무형문화재 17-2호 보유자 박선웅 선생.

조부모와 그에 딸린 자녀들 셋, 그리고 행상을 떠나는 남편과 남겨진 자식 8, 대식구를 건사했던 어머니는 늘 생활고에 힘들어했다. “부친은 안타깝게도 가족애는 그다지 없었던 것 같았다고 고백하는 선생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행상으로 번 돈을 주로 대폿집에서 탕진하다 보니 우리 집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원망이 가로막혀 자연히 부자지간에는 한 톨의 정도 없었다. 아버지는 우리 자식들을 보며 빨리 커서 일이나 하라고 할 정도로 자녀교육에는 무관심했다.

하긴 당시의 가부장제 아래에서 여성과 아이들의 고충이 비단 우리 집만이었겠나.”

제4회 충남 내포제 시조 정기발표회 모습
제4회 충남 내포제 시조 정기발표회 모습

교사들이 인정한 서령의 노래 영웅박선웅 선생

당시는 바다가 곧 돈이었다. 형제들과 어머니는 지금의 AB지구에서 어패류를 캐며 돈을 벌어야 했다. 바다에 나가 앉았어도 배가 고팠다는 박선웅 선생. 다른 집 어머니들처럼 그의 어머니도 역시 큰아들인 선생에게 모든 것을 걸었고, 빨리 커서 성공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박선웅 선생의 꿈은 가수였다. 가수를 하기에는 돈벌이가 영 시원치 않았다. 그럼에도 남의 집 품팔이를 하면서도 노래를 멈출 수 없었다. 돈을 벌지 못해도 노래만 할 수 있다면 오늘 하루를 산다 해도 행복할 것 같았다.

당시 지금의 서산시청 앞에 서령국민학교가 있었다. 1학년 학창시절, 선생은 소풍 장기자랑에서 백마강노래를 멋들어지게 불렀다. 못 먹고 바싹 마른 8살 사내아이가 노래를 어찌나 잘 불렀던지 여기저기 선생님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난리가 났었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멀뚱멀뚱 서로를 바라보며 시선만 교환하기에 바빴다.

어디서 누구에서 배웠나? 너야말로 신동이구나. 이 나이에 가요를 멋지게 부를 수가 없는데 목소리가 정말 좋다등등. 나는 그때부터 선생님들이 인정한 서령의 노래 영웅이 되었다.”

자식 졸업을 시키기 위해 월사금을 빌리러 동동거리며 다니셨던 어머니

힘든 와중에도 어찌어찌하여 드디어 6학년 서령국민학교 졸업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친구들과는 달리 박선웅 선생은 기뻐할 겨를도 없었다. 아버지가 행상에서 돈을 벌어오기를 기다렸지만, 돌아온 아버지의 주머니는 늘 텅텅 비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하루 번 돈으로 풍류를 즐기셨던 한량이었다. 행상으로 번 돈을 들고 늘 당신은 선술집으로 가서 막걸리를 마셨다. 그러다 보니 나는 8개월 치 월사금(등록금)을 내지 못했다. 사실 우리 아버지는 자식들이 공부한다는 것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단지 빨리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던 분이었다.

이런 아버지를 너무도 잘 아는 터라 불쌍한 우리 어머니는 온 동네를 다니며 돈을 꾸기 위해 동동거렸다. 하지만 당시 가난한 우리 집에 선뜻 누가 선뜻 돈을 빌려주겠는가.

다행스럽게도 그때 당숙이 교직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요즘 말로 상당한 백이 있었던지, 아니면 당시의 허실한 행정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노래 잘하는 학생에게 내려주는 장학금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월사금 밀린 것을 면제해주는 특권을 얻었다.

나는 그렇게 겨우 졸업을 했다.

중학교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소농인이 되어 농사일에 뛰어들었다. 그때가 내 나이 겨우 14살이었다.”

서산 해미읍성 전통상설공연에서 서산 내포제시조를 공연하는 충남무형문화재 17-2호 내포제시조보존회
서산 해미읍성 전통상설공연에서 서산 내포제시조를 공연하는 충남무형문화재 17-2호 내포제시조보존회

돈을 벌기위해 시골장이 서는 곳으로 아버지를 따라 행상을 나서기도 했다

“20살 시절, 가수를 하고 싶다는 말에 아버지는 먹을 것도 없는 주제에 가수는 무슨 놈의 가수를 한다고!’라며 일언지하에 반대를 하셨다. 내 생각도 아버지의 말씀처럼 도저히 가수의 길은 어려울 것 같단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어머니는 이런 나를 보며 가난 때문에 꿈을 피우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당신 또한 첫째인 내가 빨리 성공해서 배고픈 우리 식구들 충분히 먹을 수 있도록 농사를 짓는 것, 그래서 부자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돈을 벌기위해 아버지를 따라 시골 장이 서는 곳으로 행상을 따라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와는 반대로 행상을 하는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아마도 내성적인 성격 탓이리라. 한편으론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식구들을 두고 몇 푼 되지 않은 수입을 가지고도 술값으로 탕진하는 아버지가 미워서 기도했다.

빨리 부자가 되고 싶었다. 식구들에게 배불리 먹일 수 있도록 부자가 되고 싶단 생각을 끝없이 했다. 서산 시골에서 부자가 되기란 불가능하단 생각을 하면서도. 혼자 끝없는 고민을 하고 있던 찰나에, 서울에 사는 친구가 서울에만 오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했다. 어린 마음에 솔깃하여 결국 야반도주를 하고 말았다.

하지만 막상 서울에서 내가 할 일은 어디에도 없었다. 막막한 심정으로 일거리를 찾다가 하는 수 없이 일주일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죄가 되어 그때부터 다시 밤을 낮 삼아 일을 하고 또 했다. 여전히 생활은 한치도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나는 또다시 군대 속으로 들어가게 됐다.

시조는 곧 박선웅, 시조는 곧 사람과 사람을 이을 수 있는 교감

군대를 제대하고 내 속에 잠자고 있던 가수에 대한 미련 대신 시조에 대한 욕구가 발동됐다. 그것은 내 생의 마지막 선택이기도 했다.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심화영 선생을 찾아 민요와 장구를 배웠고, 노인들이 주로 노래하는 내포제시조를 배웠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남의 집 일을 하면서도 내 입에서는 끊임없이 시조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어쩌면 대식구를 먹여 살릴지도 모르는 지푸라기 같은 희망이기도 했다.

박선웅 선생은 나를 살린 것은 노래였다. 노래 중에서도 시조였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도 나는 이런 시조에 관한 생각만 온 머리에 가득 찼었다.

그 당시 먼 훗날 나를 바라봤을 때 내가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뭐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것이 바로 힘들 때 나를 지탱시켜준 시조였다. 그렇다면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그럼 시조를 배우자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시조는 내 삶의 목표이자 성공의 지름길이 되었다.

시조는 곧 박선웅, 시조는 곧 사람과 사람을 이을 수 있는 박선웅식 교감이었다. 눈을 뜨면 노래를 했다. 끊임없이 하다 보니 어느날 목에서 아기 주먹만한 핏덩이를 토했다. 드디어 나는 시조인이 되었다.”

충남무형문화재 제17-2호 내포제시조 박선웅 보유자 공연 모습
충남무형문화재 제17-2호 내포제시조 박선웅 보유자 공연 모습

스산의 얼이 담긴 내포제의 소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박선웅 선생

박선웅 선생이 젊었던 시절에는 시조하는 명창들이 지금의 방탄소년단처럼 사람들을 몰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들이 가는 곳에는 시조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단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시조를 하면 기립박수를 치며 어디 사는 누구냐?’ 관심을 가지며 물어오기도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끊임없이 연구했고, 하다 보니 12음계를 개발하기도 했다. 시조의 모음과 자음법을 만들어 세상에 내보이기도 하고.

본명인 박선웅으로도 썼지만 어진 별이라는 뜻의 박인규도 함께 사용했다. 인규라는 이름이 좋은가, 이상하게 그때부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상이란 상은 전부 휩쓸다시피 했다. 물론 전국에서 제자들도 몰려들었다.”

1962년 유병익, 유흥복 선생으로부터 내포제 시조를 사사 받아 입문했던 박선웅 선생. 그로부터 22년 후인 1984년 선생은 전국시조경창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현재까지 50여 년 동안 내포제시조의 체계적 보존·전승에 이바지해 온 시조계의 독보적인 존재다.

박선웅 선생은 내포제시조 계승발전은 물론 지역의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서산시내포제시조연구회를 창립하여 지역의 문화예술 소통과 화합을 도모하기도 했다.

기자와의 인터뷰 말미에 선생은 우리 소리가 소외되어 가지 않고 후대에까지 전해지려면 스산의 얼이 담긴 내포제의 소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회원들에게 강습을 이어오며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
회원들에게 강습을 이어오며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

에필로그

2014년 충남도의 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된 내포제시조는 서산시에 있는 무형문화재로 박선웅 선생이 보유자다. 기자는 박선웅 선생께 시조가 뭐냐고 묻자 옛날 4대부에서 불리던 노래였다. 우리 민족이 만든 문학인 동시에 시조는 우리 고유의 정형시에 곡을 붙여 부르는 우리나라 전통음악의 한 장르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 보니 음악도 바뀌어 긴소리보다 짧은소리를 선호하는 시대가 됐다. 그래서인가 시조계가 더 어렵다. 앞으로 꿈이 있다면 제자들을 많이 발굴·배출하여 시조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

서산시대는 앞으로도 지역의 문화·예술 발전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박선웅 선생의 건강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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